레스큐 시스템 108화.
수혁은 서장을 통해 포상 휴가를 받았다.
3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가 서장이 줄 수 있는 한계였다.
별다른 포상을 원하지 않았던 수혁도, 휴가만은 거절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휴가철이 지난 후 조금 한가해지면 그때 휴가를 낼 수 있었다.
서장은 계속해서 뭔가를 더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정도가 전부였기에, 서장은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휴가가 생겼네.”
아직 휴가를 쓰려면 두 달은 더 있어야겠지만, 괜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비번 날과 잘 합치면 5일 정도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 수혁 씨, 복귀하셨습니까?”
실실거리며 사무실로 돌아가던 수혁의 앞에 유지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조금 전에.”
수혁은 유지환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 멈칫- 했다.
그의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대전에서 꽤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 있었죠. 경기에서 우승했으니까.”
“아니, 제가 말하는 건 고작 그런 게 아닙니다.”
유지환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고작이라니.
수혁은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최은송과 일주일간 대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한 것 정도?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유지환의 얼굴이 이렇게 심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거 말곤 잘 모르겠는데요.”
수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유지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시애가 그 바쁜 와중에도 수혁 씨를 응원하러 직접 대전까지 내려갔는데. 그걸 잊으신 겁니까!”
‘아…….’
깜빡하고 있었다.
유지환은 버블걸스 덕후였지.
“아, 하하. 설마요.”
수혁은 유지환의 시선을 피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유지환은 버블걸스나 시애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괜히 여기서 붙잡혔다간, 쓸데없이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지환은 수혁이 가만히 도망가도록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덥석-!
기회를 봐 몸을 돌려 튀려던 수혁의 팔을 유지환이 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수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유지환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유지환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을 예정이라면, 그땐 저도 좀 부탁드립니다.”
험상궂은 얼굴과 다르게, 그의 음성은 간절했다.
지난번 수혁의 집에서 버블걸스를 직접 봤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직접 앞에 있을 땐 한 마디도 못 하던 양반이…….’
집들이 때 유지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수줍음을 탔다.
덕분에 인사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고.
그때의 기억이 있는 수혁은, 왠지 유지환이 귀엽게 느껴졌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 줘요. 나 팔 아파.”
수혁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하자, 유지환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았다.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붙잡았는데, 그게 얼마 전 승강기 사고로 다쳤던 팔이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방금 전까지의 박력은 어디로 갔는지, 유지환은 안절부절못하며 수혁의 팔을 살폈다.
“조금 아프긴 했는데,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수혁이 작게 웃으며 팔을 살짝 돌려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지환은 울상을 지으며 계속해 사과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그만하세요.”
조금 골려줄 생각으로 엄살을 피웠는데, 이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기에, 수혁이 더 민망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그 덕분에 버블걸스에 대한 이야기가 쏙 들어가 버렸다.
그것에 만족한 수혁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유지환을 뒤로하고 잽싸게 도망을 쳐버렸다.
물론, 잠시 후 떨어진 출동 명령 덕분에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 지역의 출동 횟수가 전국 평균의 두 배 이상입니다.”
행정안전부 장관 조장호는 소방청장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습니까?”
“예. 더 큰 문제는 대형 재난의 발생률입니다.”
“그건 얼마나 되죠?”
조장호의 질문에 소방청장이 한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소방 방재청 차장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꺼내들며 보고를 시작했다.
“지난해 재산 피해 5억 이상,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형 재난의 발생 건수가 타 지역에 비해 세 배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보고서에는 가스폭발 사고와 조연산 화재 등의 대형 재난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세 배라니……. 유독 그곳에서만 이렇게 많은 재난이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조장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여러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원인은 급격한 개발로 인한 환경 변화입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논밭밖에 없던 지역이 거대한 신도시로 변했다.
개발은 너무도 빨랐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이제야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안은 있습니까?”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바로 얼마 전 지하철역 붕괴사고 같은 게 몇 번 더 터지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옛날 백화점과 한강의 다리가 무너졌을 때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소방관들이 나서서 예방 점검을 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애초에 그 넓은 도시를 샅샅이 점검할 인력조차 되질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방법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조장호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허,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요.”
“그래서 말인데…….”
소방청장은 잠시 망설이다 준비해 온 기획안을 하나 꺼내 들었다.
조장호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가장 앞에 있는 글자를 읽었다.
“특수 구조대 설립 안건?”
조장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경기도 특수 구조대는 남양주에 이미 있지 않습니까?”
김갑수가 팀장으로 있는 수도권 119특수 구조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새로이 하나 창설하는 것도 대처 방법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양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대형 재난 발생 시, 헬기를 동원해 투입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발 빠른 대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소방청장은 아예 그 도시에 특수 구조대를 상주시키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예방이 불가능하다면, 사후대처라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산이 나오겠습니까?”
특수 구조팀을 하나 창설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력도 인력이지만, 그에 따른 예산이 편성되어야만 가능한 일.
그런 절차가 우리나라에서 쉽게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산 부족으로 인해 장비조차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
“그것을 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조장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소방청장의 말대로 특수 구조대를 하나 만들어 배치하면, 훨씬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전국 평균의 몇 배나 되는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지역이었으니, 인력 낭비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예산인데…….’
아무래도 이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요.”
조장호는 회의를 마치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경제부총리를 한번 만나봐야겠군.’
조장호는 자신과 친분이 깊은 경제부총리 최문식을 떠올렸다.
그라면 이번 안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 * *
수혁은 소파에 앉아 최은송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저 날이에요?”
수혁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던 최은송이 물었다.
“네, 아주 힘든 날이었죠.”
수혁이 자신의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그날의 상처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TV 속에서 수혁은 팀원들을 이끌고 정글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 비 진짜 많이 내리네요. 저런 상황에서도 촬영을 계속했어요?”
“카메라는 쉬지 않고 돌아가더라고요.”
수혁이 팀원들과 함께 커다란 나무 밑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그 후 움직이는 장면까지 나왔다.
“고생 많으셨네.”
최은송은 괜히 수혁에게 미안해졌다.
원래 예능에 관심이 없던 수혁이 자신의 부탁 때문에 저런 오지로 가서 고생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힘들진 않았어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다른 출연자들은 모르겠지만, 수혁은 정말로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질 않았다.
“아, 여기네요.”
수혁이 화면을 가리켰다.
비가 조금 잦아들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예원이 갑자기 나타나며 수혁을 놀래키려던 상황.
하지만 엉뚱하게도 수혁이 아닌, 시애가 자지러지게 놀라며 뒤로 넘어지는 장면까지 그대로 방송에 송출이 되었다.
“이게 그대로 다 나오네.”
수혁은 이 장면은 편집으로 잘라낼 줄 알았다.
예원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시애의 모습은 주말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주기엔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방송을 내보내는 것을 보면, 둘과 어떻게 잘 이야기가 된 것 같았다.
카메라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제작진들과 의료진이 시애에게 달려가는 모습과 모자이크 처리를 하긴 했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시애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올 정도로 긴박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수혁이 나서는 장면이 나왔다.
그것을 보며 수혁이 최은송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무리하는 모습에 그녀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최은송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저래서 수혁 씨가 직접 업고 달린 거였구나?”
수혁은 그저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만 설명했었기에,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시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 나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지 체감이 되었다.
이윽고 수혁이 시애를 업고 정글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나왔다.
“저때는 힘들었죠?”
최은송이 묻자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동안 촬영할 때보다, 저때 한 시간 남짓 달린 게 백배는 더 힘들었죠.”
농담이 아니었다.
시애를 업고, 비가 내리는 정글 속을 한 시간이 넘게 달리는 일은, 수혁으로서도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TV에선 정글을 빠져나온 수혁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얼굴에 피를 흘리며 다가오는 수혁.
그 모습을 본 최은송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담담하게 버텨보려고 해도, 수혁의 저런 모습을 보는 건 힘들었다.
수혁은 시애를 구급대원에게 넘기고는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최은송이 손을 뻗어 수혁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생했어요.”
수혁은 그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