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05화.
장내가 술렁거렸다.
대회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경기에 참가한 소방관들도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율리안의 기록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저럴 거면 그냥 올림픽을 나가지…….”
누군가 중얼거렸고, 그걸 들은 소방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기록을 낼 정도의 힘과 체력이라면, 올림픽에 나가도 메달을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 대회 우승자는 벌써 가려진 것 같네요.”
세계 신기록에서 무려 40초나 빠른 기록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저 기록의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소방관들은 앞으론 2위 경쟁을 해야 되겠다며 아쉬워했다.
수혁만 빼고.
‘엄청나구만.’
박상태가 얘기했었던가?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다고.
박상태가 말한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유지환도 꽤 대단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율리안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진짜 괴물은 저런 사람이지.’
수혁은 율리안이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레벨 업’을 통해 얻은 힘으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게 됐지만, 율리안은 그런 것도 없이 훈련만으로 저런 육체를 얻었다는 말 아닌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1등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수혁이 팔을 살짝 돌려보았다.
지끈- 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 경기를 치르는 데에는 지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혁은 걱정하지 않았다.
“23번, 24번!”
수혁의 번호가 불렸다.
담담한 표정으로 출발선에 나서는 그의 옆에 올리버가 나란히 섰다.
만면에 짓고 있는 웃음으로 봐선, 어지간히 수혁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보니 너 꽤 유명한 놈이더군.”
올리버가 수혁을 쳐다봤다.
“하지만 난 그딴 과장스러운 말 안 믿어. 네깟 놈이 백 명을 넘게 구했다고? 기자 놈들한테 돈 주고 찍어달라고 매수한 거 아니냐?”
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본 올리버가 피식- 하며 웃었다.
“오늘 내가 네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면, 세상은 네가 아니라 나를 주목하게 될 거다. 이 거짓말쟁이 동양인 꼬맹아.”
올리버는 계속해서 수혁을 도발했다.
물론 수혁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진짜.’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대충 올리버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라는 것 정도는 읽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무시해라.”
수혁은 귀찮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올리버에게 망신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올리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율리안에 대한 생각이 수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딴 피라미에게 줄 관심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올리버는 수혁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표정을 구겼다.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수혁에게 팔을 뻗으려던 찰나.
“준비!”
심판의 준비 신호가 떨어졌다.
“……흥!”
올리버는 어쩔 수 없이 출발선으로 가서 섰다.
혼을 내주는 건 다음에 해도 된다.
지금은 이 경기에서 수혁을 이기고, 그가 받던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이 중요했다.
“출발!”
타앙-!
시작 신호가 떨어지고, 둘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좋아!’
올리버는 자신의 스타트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연습할 때보다 훨씬 좋은 컨디션에, 잘하면 자신도 기록을 하나 세울지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뭐, 뭐야?’
올리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올리버가 이제 호스를 들고 몇 발을 내딛는 사이, 수혁은 이미 펌프차 근처까지 도달했다.
모든 장비를 벗고, 호스도 없이, 편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달려도 저런 속도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올리버는 더욱 스피드를 냈지만, 수혁과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허탈함이 새겨졌다.
1단계가 끝나고, 2단계 장애물 코스가 시작됐다.
첫 번째 장애물은 포스머신.
양갈래로 나뉘어진 철판 위에 올라가, 그사이에 놓인 70㎏의 중량물을 망치로 타격해, 정해진 위치까지 이동시키는 종목이었다.
수혁은 출발선에서 10m 떨어져 있는 포스머신에 빠르게 달려간 뒤, 망치를 들고 그 위에 섰다.
그러곤 망치를 내려쳤다.
떠엉- 떠엉- 떠어엉-!
고작 세 번의 망치질만으로 중량물이 목표지점에 다다랐다.
율리안조차도 여덟 번이나 친 것을 말이다.
수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대체 힘이 얼마나 세야 세 번 만에 포스머신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은 묵묵히 2단계도 순식간에 끝을 내버렸다.
‘이제 마지막인가?’
수혁은 3단계인 타워도 올리버와 압도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며 끝마쳤다.
3단계는 체력을 시험하는 단계다.
41㎏의 사다리를 지정된 장소로 운반해 설치한 뒤, 25㎏짜리 중량물 두 개를 들고 계단을 이용해 타워 최상층으로 올라간다.
그 후 중량물을 지정 위치에 놓고 로프를 이용해 호스를 땅에서 끌어 올린 후, 다시 중량물을 들고 내려가 소방호스와 관창을 연결하는 것까지가 3단계였다.
대부분의 소방관들이 이 단계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옆에서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올리버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방금 전 경기를 치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괴, 괴물…….”
올리버는 질린 눈으로 수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보기에 수혁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엔 올리버의 말을 알아들은 수혁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올리버의 기가 꺾인 듯 보였다.
수혁은 얼굴에 친절함을 한가득 담아 올리버에게 말했다.
“앞으론 아무 데서나 깝치고 다니지 마라, 새끼야.”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마친 수혁은 이제 마지막 남은 단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4단계는 심플했다.
바로 계단 오르기.
출발선에서 구조물 상단까지 계단을 이용해 빠르게 올라간 뒤, 종료 버튼을 누르면 끝이었다.
문제는 종료 버튼이 10층 높이에 있다는 것.
앞서 3단계의 경기를 치르며 체력을 쏟아낸 소방관들로선, 절대 쉽지 않은 코스였다.
“출발!”
수혁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체력 소모?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코스들은 수혁의 체력을 전혀 소모시키지 못했다.
이 정도의 난이도라면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수혁은 마치 처음 경기를 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4층… 그리고 10층.
눈 깜짝할 새 10층에 도달한 수혁은 여유 있게 종료 버튼을 터치했다.
시간 계측을 위해 버튼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계측 요원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이런 기록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계측 요원 중 한 명이 인사하자 수혁은 고맙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이 다시 내려가자,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율리안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몇 초 차이지?”
“글쎄, 한 5초 정도?”
고작 5초였지만, 율리안의 기록이 세계신기록을 40초나 단축시켰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도 나오는구나.”
괜히 뿌듯해졌다.
***
“어때?”
앞서 경기를 마친 필립이 휴식을 취하며 경기를 보고 있던 율리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기는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다.”
“……와우, 저 친구가 그렇게 빨라?”
아직 수혁의 경기 장면을 보지 못한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군.”
율리안은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는 것도 힘든데, 그것을 40초나 단축시킬 정도였으니, 그의 자신감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수혁의 경기를 보고나자, 그 확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기록이 몇인데?”
필립의 기록은 5분 37초였다.
아쉽게도 이전 세계기록을 뛰어넘진 못했지만, 그래도 상위 1%의 놀라운 기록이었다.
이 정도면 율리안을 이기진 못해도, 최소한 3위 안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네가 직접 봐. 이제 종합 기록이 나올 때 됐으니까.”
때마침 수혁이 경기를 끝마치고 기록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율리안,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야? 아니면 저 전광판이 고장난 거야?”
“놀랍군.”
필립은 자신의 눈을 비볐고, 율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4분 42초!”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소방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
“4분 42초라고?”
“율리안보다 13초나 빠르단 말이야?”
율리안이 세계 신기록을 갱신했을 때도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 기록이 율리안의 것이기 때문에 어렵사리 납득할 수가 있었다.
율리안이 본래부터 뛰어난 기록을 세웠던 소방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지도 모를 아시아인이, 율리안의 기록을 뛰어넘는 것도 모자라, 세계 신기록을 또 갱신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정행위가 있었던 거 아니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기록에, 소방관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이라던데… 혹시?”
수혁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것보단, 부정행위를 의심하는 쪽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봐, 올리버!”
누군가 경기를 마치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올리버를 불렀다.
“너라면 알겠지? 저 기록, 사실이야?”
그가 전광판을 가리키며 묻자, 올리버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4분 42초./글/
경악할 만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사실이냐고?”
올리버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만 말해주지. 저놈은 괴물이야, 율리안보다도 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수혁의 기록에 그 어떤 조작이나 부정행위가 개입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필립.”
올리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율리안이 필립을 불렀다.
“저 친구 진짜 대단한가 보네. 아, 경기하는 걸 안 본 게 후회되는걸?”
하지만 필립은 율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필립.”
율리안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어, 어. 왜? 아차, 내 정신 좀 봐. 대기실에 장비를 놓고 왔네. 나 잠시 거기 좀 다녀올…….”
“10유로.”
“……뭐?”
“돈 내놔, 내기에서 졌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율리안이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필립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옛다, 10유로.”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돈을 건넨 필립이 물었다.
“안 분해? 네 기록이 깨졌는데?”
율리안이 세계 신기록을 세운 지 30분도 되지 않아 깨져 버렸다.
필립은 만약 자신이 율리안의 입장이었다면 분통이 터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율리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진 것보다, 수혁이라는 사람을 발견한 것에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저런 소방관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