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03화.
“팔은 정말 괜찮은 거죠?”
“물론이죠!”
수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젠 통증이 거의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물론 수혁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여전히 최은송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팔의 근육이 파열되고, 인대도 손상된 부상이, 벌써 다 나았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혁이 계속 괜찮다고 하고, 병원에서도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눈 좀 붙여요.”
지금 둘은 최은송의 차를 타고, 경기가 열리는 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제 푹 잤더니 쌩쌩하네.”
“하긴, 어제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더라고요.”
최은송은 어제 수혁의 자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웃었다.
“어? 내가 코를 골았어요?”
“엄청요.”
수혁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그럼 나 때문에 제대로 못 잤겠네.”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누군가와 이렇게 같이 살아본 적이 없던 터라, 코골이 같은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걱정 마요. 저도 잘 잤으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수혁의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푹 잤던 것이다.
“수혁 씨는 그거 말고 다른 것에 좀 신경 써주세요.”
“다른 거라뇨?”
“제발 화장실에서 씻고 나올 때, 발에 묻은 물 좀 제대로 닦아요. 바닥에 계속 발자국 생긴단 말이에요.”
“아, 하하.”
“그리고 수건도! 한 번 사용한 건 빨래통에 넣어주고요. 몇 번씩 같은 거 쓰지 말고.”
수혁은 최은송의 잔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런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아내도 없이 혼자 살아왔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잔소리해 줄 사람이 생겼다.
수혁은 그런 사소한 것도 행복할 뿐이었다.
“웃어? 저 지금 진지하거든요?”
수혁이 실실거리며 웃는 것을 발견한 최은송이 눈을 흘겼다.
“알았어요,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요.”
수혁은 다신 발에 물을 묻히고 집안을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세계대회면 외국 소방관분들도 오는 건가요?”
대화를 나누던 도중 최은송이 물었다.
“그렇겠죠? 대회 이름부터가 세계 소방관 경기 대회니까.”
“와, 그럼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많겠네요. 몇 명이나 돼요?”
“글쎄요……. 나도 처음 참가해 보는 거라 잘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수혁은 이번 대회에 대해 굳이 알아보지 않았다.
몇 개국이 참가하는지, 몇 명이나 참가하는지.
박상태가 말을 해준 것 같긴 한데, 흘려들은 탓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경기 준비, 너무 대충한 거 아니에요?”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알기론 대회의 목적이 경쟁보단, 세계 각지의 소방관과 그 가족들이 참여해서 우정을 나누자는 취지니까. 그냥 축제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하긴. 전에 봤을 때도 스포츠 경기 같은 느낌보단, 축제 분위기가 많이 났었죠.”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다.
다만, 세계 각지의 뛰어난 소방관들이 참가하기에, 대회의 수준이 좀 더 높아졌다는 것만 조금 달랐다.
“난 그래도 수혁 씨가 우승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내 남자친구가 세계 최고의 소방관이라는 소린데. 좋기만 하겠어요?”
최은송이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수혁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수혁의 우승은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수혁은 굳이 우승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에 우승해 봐야 수혁에게는 별 다른 이득이 없었다.
특진도 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내심 우승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3위 정도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은송이 이렇게 기대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우승을 노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럼 한번 해볼까요, 세계 최고의 소방관?”
“그럼 좋죠. 그런데 너무 무리하진 마요.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무리하다가 괜히 더 악화될 수도 있으니까. 세계 최고의 소방관도 좋지만, 나는 안 아픈 수혁 씨가 더 좋아요.”
“그럴게요.”
둘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네요.”
최은송이 차를 멈춘 곳은, 대회 개막식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는 한 종합운동장이었다.
“와, 사람 많네요.”
최은송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이 다 소방관이나 가족들은 아닐 테고…….”
“구경 온 사람들일 거예요. 오늘 여러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하니까.”
세계대회라 그런지, 개막식부터 화려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공군의 에어쇼까지 한다니, 사람들이 모일 만도 했다.
“오늘 저녁에는 맥주 축제와 푸드 코트도 열린다니까, 거기도 한번 가봐요.”
대전은 인터넷상에서 노잼 도시로 유명했다.
즐길 거리가 딱히 없는 도시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대전시에서는 그런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꽤나 공을 들여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
93년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금 세계인들에게 대전이라는 도시를 알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면, 그 의도는 어느 정도 먹힌 것 같았다.
“기대되네요.”
최은송은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회 기간은 총 일주일.
수혁이 참가하는 최강 소방관 경기가 일주일 내내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다른 경기들도 많았기에 대회 기간이 길었다.
“내 경기는 이틀 뒤니까, 일단 그때까지는 여행 왔다 생각하고 놀아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제가 벌써 일정 다 짜왔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나만 믿어요.”
최은송은 이번 일주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계획을 세워왔다.
푸켓에서도 느낀 거지만, 최은송은 여행에 관해선 정말 꼼꼼한 성격이었다.
“저도 기대되네요.”
과연 이 노잼의 도시에서, 어떻게 즐겁게 지낼 수 있을지 말이다.
“이크, 시간 다 됐네요. 일단 들어가요.”
개막식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둘은 손을 붙잡고 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개막식은 화려했다.
전투기들이 화려하고 하늘을 날며 축하비행을 해주었고, 유명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기도 했다.
참가국 대표단 퍼레이드도 있었는데, 수혁은 주최 측에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기로 했다.
굳이 그런 것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불꽃놀이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불꽃놀이에, 수혁은 괜히 아이처럼 들떴었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멈추고, 개막식도 끝이 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바로 맥주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수혁과 최은송 역시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가 걸음을 걷는 건지, 아니면 인파에 휩쓸려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최은송의 손을 꼭 붙잡고 이동하던 수혁과 어깨를 부딪쳤다.
“What the…….”
수혁과 부딪힌 남자는 커다란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수혁의 키가 작은 것이 아님에도, 수혁보다 한 뼘 이상은 더 커 보였고, 덩치가 유지환보다도 더 거대했다.
그는 수혁과 부딪친 충격에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쏟고 말았다.
“아, 쏘리.”
수혁의 잘못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둘 모두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수혁은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그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쪼끄만 원숭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수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론 수혁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 ‘Monkey’가 대충 어떤 뜻인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얘가 저한테 원숭이라고 한 거죠?”
수혁이 고개를 돌려 최은송에게 물었다.
“네, 조그만 원숭이래요.”
“하아…….”
설마 외국도 아니고, 대전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들을 줄은 몰랐다.
수혁은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참았다.
딱 보아하니 대회에 출전한 소방관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과 다퉈봐야 좋은 꼴을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옆에는 최은송까지 있었으니,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냥 가죠.”
수혁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You scared?”
뒤에서 남자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뭐래요?”
“쫄았냐는데요?”
“……그냥 무시하고 가요.”
생각 같아선 뒤로 돌아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다시 한 번 참았다.
대신 혹시라도 경기 날 만나게 된다면, 자신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만들어줄 것이라 다짐했다.
“수혁 씨, 파이팅!”
경기 준비를 하러 들어가는 수혁을 향해, 최은송이 두 주먹을 꽉 쥐며 응원을 했다.
수혁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탈의실 쪽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최강 소방관 경기에 참가하는 소방관들이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다.
수혁은 괜히 주눅이 드는 느낌을 받으며, 한쪽 구석으로 가서 챙겨온 옷들을 꺼냈다.
“Hey!”
그런 수혁을 향해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수혁이 돌아보자, 금발의 외국인이 이죽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왠지 낯이 익긴 했지만, 얼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Hey, chicken.”
그러다 뒤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는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이틀 전, 자신과 어깨를 부딪치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던 그놈이었다.
“얼씨구?”
수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기분이 나빠해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수혁이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그때 그 새끼네. 반갑다, 이 새끼야.”
“Shake it?”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해, 인마.”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수혁은 웃으며 욕을 한 사발 퍼부어주었다.
“푸흡!”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소방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 아이고…….”
그는 한국인이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참아보려고 했는데, 너무 웃겨서.”
끅끅거리며 웃는 그를 보며 수혁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죄송한 건 제가 더…….”
수혁이 고개를 숙이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수혁에게 시비를 걸었던 외국인을 향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대회 주최 측에 알리겠다며 협박했다.
“Shit!”
그러자 상황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해결이 되었다.
“여, 영어를 잘하시네요?”
“어렸을 때 영국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거든요.”
그의 말에 수혁이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저는 대구에서 온 진태용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알고 있어요, 김수혁 씨. 유명하시잖아요.”
진태용이 눈에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