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88화
17층쯤 도달하자 이제 대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화재가 일어난 층의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을 것이고,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연기에 가로막혀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수혁은 요구조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생명 감지Ⅱ’를 사용했다.
‘음…….’
스킬에 감지된 요구조자들의 숫자는,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예상대로 연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한 이들이 위쪽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위로 올라오는 연기를 피해 계속해서 위층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마스크가 부족하겠는데?’
구조용 보조 마스크를 있는 대로 챙겨오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사다리차도 왔고, 진압대에서도 챙겨왔으니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수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제작진들은?”
박상태가 뒤쪽을 흘깃- 쳐다보고는 물었다.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가장 뒤쪽에서 달려오던 강효상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조금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금방 따라올 것 같은데.”
박정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질책이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그딴 거 기다릴 시간이 어딨어!”
박상태의 호통에 박정우가 찔끔했다.
박정우는 자신의 말이 헛소리인 것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본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주 방송 출연한다고 정신이 그쪽에 몽땅 팔려가지고 미쳤어?”
박상태의 질책은 타당했다.
‘에휴…….’
수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정우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박상태는 단순히 박정우가 방송 출연에 눈이 멀어서 이렇게 행동한다고 여겼지만, 수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물론 박정우가 방송에서 자신의 모습이 멋지게 나가길 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의 저변에는 수혁과 같은 의도가 있었다.
바로 소방관의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그것이 서툴러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박정우는 분명 그것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박상태는 대원들에게 주의를 준 후,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층을 오르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식이는 나랑 가고, 재한이랑 효상이, 그리고 수혁이랑 정우가 한 조로 수색한다.”
“알겠습니다.”
“그전에, 제작진들한테 연락해야 하지 않아요?”
박상태가 잊고 있었던 것을 수혁이 지적했다.
“아, 그렇지.”
자신들이 위쪽으로 올라가면, 뒤늦게 도착한 제작진들이 그냥 위로 올라올지도 모른다.
방연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야도 제대로 확보하기 힘든 곳에서 그들만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박상태는 무전기를 들어 제작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디쯤 계십니까?”
박상태가 묻자 무전기 너머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제작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14층입니다.]
지금 구조 3팀이 있는 곳이 20층이었으니, 6층 차이였다.
“함부로 그냥 올라오지 마시고, 19층에 도착하면 무전 주세요.”
[알겠습니다.]
무전을 끝낸 박상태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달려왔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수색은 23층부터 시작한다.”
이재한과 강효상이 25층.
박상태와 김강식이 24층.
수혁과 박정우가 23층을 맡기로 했다.
수혁은 그 세 층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수혁이 말을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도, 그들이 수색을 멈추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그것 때문이었다.
수혁은 박정우와 함께 23층에 도착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동하는 동안 박정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상태의 꾸중에 기가 팍- 죽은 듯 싶었다.
“정우 선배.”
수혁이 그런 박정우를 불렀다.
“어, 말해라.”
수혁의 예상대로 박정우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해야 방송에 잘 나왔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수혁은 일부러 박정우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박정우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안 써도 돼, 인마.”
박정우는 수혁이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눈치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로요. 이왕 방송에 나오는 거 잘 나오면 좋잖아요.”
“글쎄다…….”
박정우라고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소방관이 사람 잘 구하는 모습 보여주면 되겠지.”
머리를 굴리던 박정우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죠? 사람 잘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겠죠?”
수혁은 박정우의 말이 맞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사람 구하러 가죠, 멋있게.”
수혁이 박정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선을 그린 눈매만큼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후배가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데, 박정우는 더 이상 풀이 죽어 있을 수 없었다.
뭐, 전혀 후배 같지 않은 후배이긴 했지만 말이다.
수혁과 박정우는 23층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요구조자는 없었지만, 박정우의 옆에 붙어 계속해서 말을 걸며 같이 움직였다.
그런 수혁의 노력 덕분인지, 박정우는 언제 꽁해 있었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혁아.]
그때, 무전기에서 박상태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씀하세요.”
박상태가 연락한 이유는 바로 제작진들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박상태는 수혁에게 제작진들을 데리고 함께 올라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녀올게요.”
수혁은 박정우에게 잠시 내려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19층까지 내려오자, 박상태가 말했던 대로 제작진들은 그곳에서 수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쉽지가 않네요.”
구조 3팀과는 다르게 천천히 휴식을 취하며 올라왔는데도 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아무래도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움직임이니까 힘드실 겁니다.”
이들이 아무리 체력이 좋고, 걷는 것에 익숙하다고 해도, 계단을 오르는 건 그것과 다른 이야기였다.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들을 사용하다 보니, 쉽게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올라가시죠. 발밑 조심하시고.”
연기 때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았기에, 수혁은 조심조심 그들을 이끌었다.
제작진의 숫자는 총 여섯 명.
각자 한 명씩 맡아 촬영을 하기 때문에 구조 3팀의 숫자와 동일했다.
“정우 선배!”
더는 23층을 수색해 봐야 의미가 없었기에, 수혁은 박정우를 불러 제작진들과 같이 위층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24층에서도 수색이 끝났는지, 박상태와 김강식이 나오고 있었다.
둘은 제작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곳은 현장이었다.
제작진들과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25층에서 이재한과 강효상까지 합류한 구조 3팀은 곧바로 그 위층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혁과 박정우가 맡은 곳은 28층이었다.
그곳에는 요구조자가 있었다.
수혁은 박정우와 함께 빠르게 수색해 나가며 은근슬쩍 요구조자가 있는 방향 쪽으로 이동했다.
“요구조자 발견!”
수혁이 도착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 안에는 남녀 세 명이 물에 적신 휴지를 입에 가져다 댄 상태로 구석에 숨어 있었다.
“구, 구조대!”
사람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다행히 그들은 연기를 들이마시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겁에 질려 위층으로 도망치진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화재 시 연기대처 방법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이거 쓰세요.”
수혁은 보조 마스크를 꺼내 그들에게 씌워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런 수혁에게 울먹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나중에 밖에 나가면 해주세요. 일단 지금은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수혁은 요구조자들을 진정시키고는 박정우를 돌아봤다.
“누가 갈까요?”
“내가 남지.”
박정우는 남아서 수색을 계속하기로 하고, 수혁이 요구조자들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거동이 충분히 가능한 요구조자 세 명을 이동시키기 위해 둘이 움직이는 것은 인력 낭비였다.
수혁은 요구조자들을 데리고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속도는 느렸지만, 차분하게 연기가 없는 층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내려가시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1층까지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기 때문에 수혁은 여기서 다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가, 감사합니다.”
벌써 몇 번째 감사 인사인지 모르겠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조심해서 천천히 대피하세요.”
요구조자들의 얼굴에 씌워주었던 보조 마스크를 챙긴 수혁은,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수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제작진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괜히 수혁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작진이 괜찮은지 확인하려 뒤를 돌아본 수혁이 그의 표정을 보곤 먼저 말을 꺼냈다.
“할 말 있으세요?”
계단을 왔다 갔다 하며 호흡이 거칠어진 제작진과 다르게, 수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진짜 대단하시네요.”
제작진은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이런 상황에 침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나, 도저히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 체력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매일 하는 일이니까요.”
레벨이나 스킬이 그 비결이라는 얘기는 할 수 없었기에, 수혁은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그 대답이 제작진에게는 더욱 와닿은 모양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라……. 그게 더 대단하네요.”
그 말에 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괜히 멋쩍은 기분에 수혁이 뭔가 더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김수혁 씨!]
갑자기 무전기를 통해 누군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수혁이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작진으로 보이는 음성에는 당황과 다급함이 가득해 보였기에, 수혁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제작진이 무전기를 만지는 것에 서툴러서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혁이 자신을 따라오던 제작진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 무전기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바, 박정우 씨가! 박정우 씨가 다, 다쳤습니다!]
수혁의 눈이 커졌다.
대체 자신이 자리를 비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계단을 올라가는 수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