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86화
“이건 좀……. 너무 비싸지 않아요?”
수혁은 눈앞에 있는 소파의 가격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둘, 셋… 일곱.’
무려 일곱 자리 숫자의 가격이었다.
“집의 퀄리티랑 맞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최은송의 말에 수혁은 자신의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떠올렸다.
“그래도 너무 비싼데.”
수혁이 망설이자, 최은송이 풋- 하고 웃었다.
“걱정 마요, 내가 사는 거니까.”
“은송 씨가요?”
수혁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집에 놓을 가구를 왜 최은송이 산단 말인가?
“뭘 그렇게 놀라요? 제가 사면 안 돼요?”
“은송 씨가 사주는 거면 더 안 되죠. 이건 너무 비싸요. 저쪽에 가면 10만 원대 소파들도 있던데, 거기로 가요.”
“안 돼요.”
수혁은 최은송의 손을 잡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정 부담되면 혼수 미리 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되죠?”
이번엔 눈이 아니라 입이 커졌다.
“호, 혼수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수혁은 머리가 굳어져 버렸다.
“왜요? 저랑 결혼 안 하려고 했어요?”
최은송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수혁에게 눈을 흘겼다.
“그, 그건 아닌데…….”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둘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이긴 했다.
그런데 최은송이 이렇게 훅- 들어오자 수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럼 논쟁 끝. 소파는 이걸로 해요.”
수혁은 최은송이 이끄는 대로 어버버- 하며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마요. 수혁 씨한테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으니까.”
그녀가 타고 다니는 차도 그렇고, 푸켓 여행을 갔을 때 그녀가 준비한 것들도 그렇고.
최은송은 부자가 틀림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최문식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벌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한가락하는 집안인 것 같았다.
그런 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자신을 만나고 있다는 게 좀 의아스럽긴 하지만…….
“이거, 이거! 이것도 좋겠다.”
최은송은 신이 나서 백화점 안을 날 듯이 돌아다녔다.
쇼핑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혁의 다크서클도 길어졌고.
그날 최은송이 쓴 돈은 수혁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마저도 수혁이 결사항전의 태도로 막은 덕분이었다.
“내가 사도 되는데…….”
“안 돼요. 이만큼 사준 것도 지나쳐요. 나머지 것들은 제가 준비할게요.”
수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수혁의 태도에 최은송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좋아요. 그럼 나머지는 수혁 씨한테 맡길게요. 대신 나랑 상의해서 살 것! 알았죠?”
최은송은 수혁이 가격에만 연연해 너무 싸구려들만 살 것이 겁났는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요, 그럼…….”
수혁은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나도 사용할 것들이니까. 아무거나 막 사면 안 돼요.”
최은송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수혁은 쌓였던 피로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오늘 은송 씨가 이렇게 선물을 많이 해줬으니까, 저녁은 내가 쏩니다!”
수혁이 선언하자, 최은송에 ‘와아!’ 하고 기뻐했다.
그때였다.
“어? 아저씨?”
옆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혁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의 여자 한 명이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
수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아저씨! 여기서 다 보네요?”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여자의 정체는 바로 박수진이었다.
신일역 붕괴 사고 당시, 수혁을 도와 고군분투했던 그 박수진 말이다.
“저야 잘 지냈죠, 아저씨 덕분에.”
박수진은 헤헤- 하고 웃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
최은송이 그런 박수진을 쳐다보며 수혁에게 물었다.
“아, 전에 신일역 사고 때 같이 갇혀 있었던 생존자예요.”
수혁은 간략하게 그때의 일을 설명했다.
“아저씨 여자친구분이세요?”
이번엔 박수진이 최은송에게 물었다.
최은송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저씨 능력자였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혁과 최은송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뻥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수진 씨 남자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수혁이 애써 박수진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물었다.
“아, 당연히 헤어졌죠. 내가 그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진짜!”
박수진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고 현장에선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표정이 참 다채로운 친구였다.
“안 그래도 한 번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저를요?”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었고…….”
박수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보여 드리려고요.”
“……이게 뭔데요?”
박수진이 꺼내든 것은 수능 문제집이었다.
“저 수능 다시 보려고요.”
박수진은 마치 ‘나 잘했지?’라는 표정이었지만, 수혁은 대체 뭐가 잘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저씨 보고 생각 많이 했어요. 감명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졌죠.”
기특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수능 문제집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처음엔 아저씨처럼 구조대원이 하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좀 무리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길을 선택했어요.”
박수진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진로를 이야기했다.
“의사가 될 거예요.”
수혁과 최은송이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조대원이 되는 게 무리일 것 같아서 의사가 되겠다고?
박수진은 그런 둘의 표정을 보고,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제 체력이 문제라는 거예요. 저는 몸보단 머리 쓰는 쪽이 편해서.”
수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했네요.”
구조대원은 사람을 구한다.
그리고 의사는 사람을 살린다.
하는 일도 다르고, 하는 공부도 달랐지만, 궁극적으로 의사와 구조대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수진은 수혁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최종적인 꿈은 국경없는 의사회에 지원하는 거예요. 돈도 좋지만… 그보다는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국내 병원의 의사와 국경없는 의사회의 의사 중 어느 쪽 일이 더 가치 있다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직접 발로 뛰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했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수혁은 자신으로 인해 이런 큰 결정을 내린 박수진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수진 씨는 잘할 겁니다.”
그 무서운 공간 안에서.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여자가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당시의 박수진은 수혁과 같은 구조대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그 누구보다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혁은 힘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주었다.
그 뒤,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박수진이라고 했나요? 저 여자분?”
대화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던 최은송이 물었다.
“아, 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최은송은 웃으며 말하는 수혁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아무래도 수혁 씨를 좀 좋아하는 것 같던데.”
수혁이 멈칫- 했다.
그러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요.”
수혁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하지만 최은송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작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고생 많으십니다.”
출근한 수혁은 먼저 와서 준비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진들에게 인사했다.
“아, 수혁 씨.”
제작진들 역시 수혁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사람이 좀 많아진 것 같네요?”
신일서 안은 제작진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전에도 적은 숫자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바글바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조금 있으면 정리가 될 테니, 그때까지만 불편하시더라도 조금 양해 부탁드립니다.”
PD가 수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단은 장비를 세팅한 이후 모두 밖으로 내보낼 예정이었다.
본의 아니게 업무에 방해가 되었는지라, PD는 연신 사과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왔냐?”
사람의 장막을 뚫고 온 박상태가 수혁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이래요?”
수혁이 묻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방송 스케일을 조금 더 키운다더라.”
“……그건 또 뭔 말이고요?”
“어제 교통 사고 현장을 찍은 게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고. 인력도 더 내려오고, 제작비도 더 나오고.”
“흐음.”
수혁은 턱을 긁적이며 바쁘게 움직이는 제작진들을 쳐다봤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을 찍는 게 나쁘진 않았다.
사람들이 소방관에게 관심을 많이 주면 줄수록,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지금도 자비로 장비를 사는 소방관들이 넘쳐난다.
열 명 중 네 명은 그럴 것이다.
장비가 부족하고, 노후화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아닌 본인이 직접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몇 번이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금까지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 수혁이 죽기 전까지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자신들로 인해 소방관들에 대한 이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 지금보단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PD가 웃으며 말했다.
“평소처럼, 저희는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게 말이 쉽지…….”
박상태는 그나마 적응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더 늘어나자 다시 부담스러워진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박상태는 손을 휘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거 제 욕심 때문에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너무 죄송하네요.”
박상태의 뒷모습을 보며 PD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시는 거예요. 막상 출동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움직일 겁니다.”
박상태뿐만이 아니라, 구조 3팀 전원이 똑같았다.
지금은 어색하게 로봇처럼 행동해도, 현장에 나가면 제작진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게 뻔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수혁은 PD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아이고, 따가워라.”
아직 등에 입은 화상 때문에 편히 앉을 수가 없었다.
“많이 아프냐?”
김강식이 캔커피 하나를 수혁에게 던지며, 옆에 앉았다.
“아프다기보단 좀 불편하네요.”
“그러니까 인마, 몸 좀 사려.”
김강식은 이러다 수혁이 정말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수혁의 능력을 믿긴 하지만…….
수혁은 너무 많은 위기를 겪어왔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왔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잘못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명심할게요.”
수혁은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건성으로 대답하기는.”
혀를 찬 김강식이 수혁의 머리를 한 번 헝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애쓰지 마라.”
수혁의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들렸다고 착각했다.
‘누구였지?’
분명 누군가 자신에게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게 누구인지, 언제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 애쓰지 말라고?’
수혁이 픽-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