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61화
박상태는 잘됐다는 듯 수혁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간 가슴 졸였을 텐데,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렇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사실 잊고 있었던 적이 더 많았다.
가끔 자기 전에 잡생각을 하다가 ‘아, 그런데 징계는 어떻게 됐지?’ 하며 떠올리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박상태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수혁은 크게 웃어주었다.
“그래도 소방 기술 경연 대회는 참가해라. 거기서 입상하면 1계급 특진이야, 인마.”
그러고 보니 대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특진해서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었다.
입상할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가볍게 몸 풀고 온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으니, 수혁은 마음 편히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김갑수라는 사람이 너를 좀 보잔다.”
“……그게 누군데요?”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수도권 119 특수 구조대 팀장.”
박상태의 설명에 수혁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구조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라고 했었지?’
구조 3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을 특구가 도와줘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팀장의 이름이 김갑수라는 것도.
“그런데 그분이 왜?”
박상태가 저렇게 얘기를 하는 걸로 봐선, 그냥 단순하게 얼굴만 보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입원해 있는 동안 면회를 와도 몇 번을 왔을 테니까.
박상태는 잠시 주저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너를 특구에 데려가고 싶으시단다.”
“하하하.”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인마? 안 그래도 나는 심각한데.”
“웃기니까 웃죠.”
수혁은 특수 구조대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특수 구조대도 많은 사람을 구하기야 하겠지만, 이곳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쳤다.
굳이 구조 3팀을 나와서 특수 구조대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갈 생각 없으니까 됐다고 하세요.”
“뭐?”
이번엔 박상태의 눈이 커졌다.
“안 간다고? 왜?”
“왜긴 왜예요.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거기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하라고. 저는 여기가 좋아요.”
처음에 냉랭했던 분위기도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고, 동료들과의 신뢰도 쌓였다.
이제 박상태나 대원들은 수혁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는 믿어주는 정도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특수 구조대로 가면?
‘그런 분위기를 또 겪으라고?’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하지만 박상태의 생각은 좀 달랐다.
특수 구조대는 구조대의 꽃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 차출이 되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범위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만큼 힘들기야 하겠지만, 명예로운 자리였다.
물론 지금보단 월급도 오를 테고…….
그런 곳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수혁의 모습을 박상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안 간다면 우리야 좋다만.”
박상태는 혹시나 수혁이 말을 바꿀까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왠지 다급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혁은 미소를 지었다.
“괜한 걱정을 하네, 진짜.”
다시 자리로 돌아간 수혁은 책상 정리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 굵직굵직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이전 생에서도 지하철 붕괴 사고 이후, 한동안은 잠잠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바쁜 건 여전하지.’
이제 곧 여름이다.
다른 계절도 바쁜 건 마찬가지겠지만, 여름은 특히나 바빴다.
사람들이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휴가를 즐기러 떠나다 발생한 교통사고부터, 술을 마시고 일어나는 주취 사고들까지.
정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다.
뭐, 체력에는 따를 자가 없는 수혁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보단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이전 생에서 여름휴가는 대부분 고승우와 만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끝났다.
운이 없는 것인지, 휴가철에는 항상 솔로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이라는 그 흔한 에피소드 한 번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이번 휴가는 최은송과 함께한다.
둘만의 여름휴가라니…….
꿈으로 끝났던 이전 생과는 달리, 이번 생에서는 현실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동해? 제주도? 아니면 해외?’
은근슬쩍 휴가지 후보에 해외를 끼워 넣어 봤다.
한 번도 우리나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수혁으로선 해외에 대한 로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데 돈이…….’
한창 꿈을 꾸던 수혁이 갑자기 나타난 현실이란 벽에 막혔다.
돈이 없었다.
수혁은 소방관에 임용된 지 아직 1년 차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사회초년생.
일하며 특별한 지출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기야 하지만, 그리 많진 않았다.
‘그걸로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까?’
단둘이 3박 5일 동남아 여행을 다녀올 정도의 자금은 충분했다.
하지만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예산이 얼마나 드는지 알지 못하는 수혁으로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모자라면 대출이라도 받아야 하나?’
뇌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한 수혁은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언제 온 것인지.
바로 옆에서 김강식이 수혁의 얼굴을 빤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아, 깜짝이야!”
수혁이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놀라기는.”
그런 수혁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김강식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냐니까?”
“아, 그게요.”
수혁은 조심스럽게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엉큼한 놈.”
“어, 엉큼하다니요?”
“그러니까 지금 제수씨랑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는 거 아냐? 얼굴 봐라. 아주 좋아서 죽네, 죽어.”
뭔가 재밌는 냄새를 맡은 것일까?
주변에서 아저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 수혁이가 제수씨랑 여행을 간다고? 단둘이?”
이재한이 은근한 표정으로 놀리기 시작했고.
“하여간 요즘 것들은 빨라도 너무 빨라.”
사라졌던 박상태 역시 어느새 다가와 일행에 합류했다.
수혁은 속으로 허허- 웃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런 놀림을…….’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그게 지금 생각을 좀 하고 있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서…….”
“태국 가, 태국. 거기서 둘이 오붓하게 마사지도 좀 받고.”
“에이, 요즘엔 베트남이 대세죠.”
“거긴 사기꾼 많아서 좀 그래.”
“태국은 뭐 없나?”
수혁은 뒷전에 두고 자기들끼리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때, 난처한 얼굴로 앉아 있던 수혁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도중, 뭔가가 거슬렸다.
‘뭐였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동남아와 휴가라는 단어가 들린 순간, 괜히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태국에서 뭔가 일어나나?’
수혁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재난들도 모두 알 수는 없는 마당에, 저 먼 태국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동남아 쪽에서 큰 재난이 발생하긴 하는 것 같은데…….’
그게 태국인지, 필리핀인지, 혹은 베트남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일어나는지도.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저 기억의 편린 덕분에 드는 불안감일 확률이 컸다.
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넘긴 뒤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태국이 짱이라니까, 이 새끼들아!”
박상태의 버럭- 으로 토론은 끝이 났다.
누가 뭐래도 계급이 깡패이긴 했다.
“……태국이요?”
수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최은송이 여름휴가로 같이 태국 여행을 가자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부산이나 동해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에, 느닷없이 태국으로 가자니.
전에 구조 3팀 대원들과 이야기를 해보긴 했지만, 내심 강릉 쪽으로 결정해 두었던 수혁이다.
돈 문제도 그렇고, 사실 조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여권이 있어야 되나? 태국 갈 때 여권 필요한 거 맞지?’
무슨 초딩들이나 할 법한 고민을 하며,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태국 좋지.”
마치 열 번은 다녀온 것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허세를 부렸다.
“수혁 씨는 바쁠 테니까, 계획은 제가 다 짜놓을게요. 숙소나 일정 같은 것들은 다 저한테 맡겨요.”
최은송은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많이 가보셨나 봐요?”
“많이는 아니고, 가족들이랑 같이 어릴 때 몇 번 가봤어요. 그땐 정말 재밌었는데.”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뻤다.
“사실 수혁 씨가 시간만 되면 유럽 쪽을 가고 싶었는데…….”
“유, 유럽?”
그곳이 정말 실재한단 말인가?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네, 한 달 정도 여유롭게 일주를 하고 싶지만, 수혁 씨가 바쁘니까. 그건 다음에 해요.”
수혁은 왠지 딴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다음이면 언제쯤?”
“……신혼여행으로?”
최은송이 아하하-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둘은 그것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제 둘은 실제로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영자에게 허락을 받은 이후부터는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휴가 그만큼 안 빼주면 제가 상태 형 멱살이라도 잡을게요.”
진심이었다.
“그런데 날짜는 언제로 하면 될까요?”
“저는 아무 때나 수혁 씨 일정에 맞출 수 있어요.”
“어? 정말요? 식당에서 뭐라고 안 해요?”
그저 식당이라고 칭하기에는 최은송이 일하는 예향정은 꽤나 고급스러운 한식 레스토랑이었지만, 최은송은 개의치 않았다.
“아, 내가 말 안 했구나.”
“뭐를요?”
“그 식당, 저희 어머니가 하시는 거거든요.”
수혁의 표정에 놀람이 서렸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꽤 큰 식당이라고 들었는데…….
최은송의 차를 보면 집안이 꽤 잘사는 것 같긴 했지만, 그만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근무에서 자유로워요. 선배들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어쩌겠어? 내가 사장 딸인데.”
최은송이 혀를 베- 하고 내밀었다.
“어, 그래도 다른 분들한테 폐를 끼치는 건 좀…….”
수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 최은송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그렇게 개념이 없는 여자는 아닌데. 휴가 기간 동안 일 도와줄 사람도 벌써 찾아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 말에 수혁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행동을 보고 있으면, 최은송의 생각은 참 깊었다.
오히려 나이가 훨씬 많은 자신의 생각이 더 어린 것 같았다.
“그럼 태국으로 결정?”
잔뜩 들뜬 최은송의 표정을 보며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