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27화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혹시나 경기 날까지 회복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수혁의 회복 속도는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산불 퀘스트를 완료하며 레벨이 두 개나 오른 덕분인지, 이전보다도 훨씬 빠르게 회복했다.
그간 마음 졸였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3주간의 입원 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빠르게 회복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병원에서 해를 넘기고 말았다.
그동안 구조 3대의 동료들은 몇 번이나 문병을 왔다.
그 결과 조금은 친근해진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아직까지 어색한 사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수혁을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오죽하면 수혁에게 가장 큰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박정우마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젠 어느 정도 수혁이 구조 3대에 섞여 들어간 듯했다.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김강식 역시 수혁을 찾아왔었다.
발목이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치료가 가능했다.
이전 생처럼 부상으로 인한 은퇴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김강식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와 수혁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김강식의 딸은 깜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수혁에게 아빠를 구해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꾸벅했다.
누가 봐도 김강식이 시킨 일이 분명했다.
인사를 하자마자 아빠의 뒤로 숨어버렸으니까.
그 귀여운 모습에 수혁은 아빠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 외에도 조연서의 이강현과 다른 두 명의 구조대원도 왔었다.
고승우가 소문을 낸 덕분에 놀라서 달려온 친구들까지 합친다면 꽤 많은 숫자가 수혁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바로 구조 3대의 대장인 고한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맡고 있는 구조대의 막내가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물론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수혁에게 있어 고한선은 선배나 동료가 아닌, 그냥 직장상사에 불과했다.
소방관이 아닌, 공무원.
그랬기에 섭섭함이나 서운함이 아닌, 부상당한 자신의 부하를 한 번도 보러오지 않는다는 것이 어이없었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수혁은 퇴원했다.
마중을 나온 사람들은 없었다.
구조 3대는 근무 중이었고, 친구들 역시 출근한 뒤 죽어라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으니까.
수혁은 괜히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택시를 잡아탔다.
“신일동 XX 마트요.”
서로 갈까 했지만 지금 그가 가봐야 할 일도 없었기에, 수혁은 일단 고시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택시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던 수혁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바로 고승우가 전해준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은 지 2주가 지났지만, 수혁은 아직 명함의 주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쳐서 입원한 상태에서 연락하는 것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연락해 볼까……?’
고승우 앞에서는 내키지 않은 척을 했지만, 사실 만나볼 생각은 있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왠지 쑥스러웠다.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도 소개팅이란 걸 몇 번이나 해봤음에도 그랬다.
명함을 보며 한참 동안 고민하던 수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 명함을 다시 집어넣었다.
“나중에 하자, 나중에.”
일단은 5일 후에 있을 소방 기술 경연 대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수혁이 우승을 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괜히 방심했다가 어이없이 탈락할 수도 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연락은 그 후에 하면 되겠지.”
애써 자신을 납득시킨 수혁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렸다.
꼬박 3주 만에 돌아온 고시원에는 나갈 때와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먼지가 조금 쌓여 있다는 것뿐.
수혁은 짐을 대충 구석에 던져 놓고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곤 자신이 출전할 최강 소방관 대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스는 네 개고…….”
1단계 코스는 헬멧과 방화복 상의, 호흡기 세트를 착용하고 소방 호스를 끄는, 호스 끌기 종목이었다.
출발선에서부터 소방차까지의 10m 거리를 달려 호스를 펌프에 연결하는 것이 첫 번째.
그 뒤 관창을 들고 소방 호스를 도착지점까지 전개해야 하며, 그 이후 20m 떨어진 소방 호스를 말아서 박스에 수납하고 결승점에 있는 초시계를 터치하는 것까지.
설명은 복잡해 보였지만, 사실 이 일련의 과정은 모두 실제 화재 진압시 거치는 절차였다.
평소에도 반복되는 훈련으로 인해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숙달된 행동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얕볼 순 없었다.
시간을 측정하는 대회이기에 대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긴장감으로 잦은 실수가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호스 끌기에 대한 정보를 대충 훑어본 수혁이 두 번째 코스인 장애물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띠리리리링-!
갑자기 스마트폰의 화면이 바뀌며 벨이 울렸다.
“응?”
액정에 뜬 전화번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스팸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대출과 인터넷 개통이었다.
그 두 가지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오곤 했으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그것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혁은 잠시 고민을 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김수혁 씨 핸드폰 맞나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생각했던 것처럼 스팸 전화는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수혁의 이름을 대는 것보다, 자신들의 소개를 먼저 했을 테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최은송이라고 합니다.]
‘최은송?’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 수혁이 ‘아!’ 하고 소리쳤다.
[제가 누군지 아시나 봐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자신을 최은송이라 소개한 여자는 왠지 퉁명한 말투로 물었다.
“아, 예. 승우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예향정이라는 한식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여자.
바로 고승우가 건네준 명함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연락을 안 하셨네요?]
“하하…….”
수혁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쭉- 하고 흐르는 느낌이었다.
[승우 씨한테 김수혁 씨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3주나 된 것 같은데.]
최은송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소개를 받은 남자에게서 3주가 지날 시간 동안 그 흔한 톡 한 번 날라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괜한 자존심에 버티고 버티다, 결국 먼저 연락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좀 있어서.”
수혁은 미안함을 가득 담아 사과를 했다.
계속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최은송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상황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연락했어야 했다.
수혁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것일까?
최은송은 많이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 언제 볼까요?]
“예?”
[아, 저랑 보실 생각이 없던 거였어요?]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수혁은 당황하며 쩔쩔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최은송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농담이었어요. 내일 시간 되시면 점심이나 같이해요.]
출근은 모레부터이니 내일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는 대회가 끝난 후에야 그녀를 만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내일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내일 만나는 걸로 하죠.”
수혁과 최은송은 내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뒤, 통화를 끝냈다.
“어후-”
갑작스러운 전개에 수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전 생에서도 몇 번의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자신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여성은 최은송이 처음이었다.
수혁은 그것이 너무도 낯선 느낌이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 수혁은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십대의 젊은 청년.
차마 잘생겼다고까지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구만.”
괜한 쑥스러움에 허허- 웃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설렘은 감추지 못했다.
다음 날.
수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실로 오랜만에 여자를 만난다는 것 때문인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빠르게 샤워하고 머리를 만진 뒤,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골라두었던 옷까지 입고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곤 좌절했다.
“너무 빨리 일어났어.”
이제 고작 아침 8시 30분.
약속 시간까지 세 시간이나 남은 상태였다.
“무슨 첫 데이트 나가는 중딩도 아니고…….”
하지만 옷을 벗고 다시 자리에 눕기에는 들인 공이 아까웠다.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쉰 수혁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입원한 상태였기에 병원 주변을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그전에는 비번 날에도 고시원에 박혀 휴식을 취하기 바빴고.
이렇게 된 이상 약속 시간까지 오랜만에 동네 구경도 좀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도 좀 부리기로 했다.
“어머, 소방관 총각. 오늘 무슨 데이트 나가?”
고시원 주인 할머니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수혁을 보고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 뭐.”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꾸민 모습이었기에 수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됐네. 안 그래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었는데. 너무 고생만 하지 말고, 젊을 때 그렇게 여자도 만나고 해야지.”
은근한 표정으로 말을 하던 할머니는 조심히 다녀오라는 듯 손짓하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수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아침 햇살이었다.
햇살이 포근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지금은 1월.
따뜻하기는커녕,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찬바람이 수혁을 감싸 안았다.
“그래도 뜨거운 것보단 낫지.”
산불 속에서 얼굴이 벌겋게 익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이 추위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디로 갈까나…….”
일단은 지하철역 쪽으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약속 장소도 역 근처에 있는 카페였으니, 그쪽에서 시간을 보내다 만나면 될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역까지 간 수혁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시간.
점심 정도만 되도 북적거릴 거리가 아직은 한산했다.
“문을 연 곳이 별로 없네.”
드문드문 보이는 해장국 집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평일 아침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주변을 둘러보다 간신히 문을 연 조그만 카페를 하나 찾은 수혁은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수혁은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는 자리에 앉아 어제 보다만 대회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흠…….”
경기는 4일 후.
장소는 근처의 레포츠 공원이었다.
일반인의 관람도 가능했고, 무슨 대회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 같았다.
“의용 소방대 분들도 출전하는구나.”
의용 소방대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대형 화재 같은 특별한 화재의 경우가 발생했을 시에 지원 개념으로 출동하는 분들이었다.
이번 산불에서도 의용 소방대가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불의 한가운데 갇혀 있던 수혁은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생각보단 즐기는 분위기인 것 같네.”
대회라는 이름이 붙어 괜히 딱딱하게 경직되고 긴장감이 팽배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것과는 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