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6화
수혁은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하지만 사실상 산불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 수혁이 소방청의 높은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혁은 이제 막 배치를 받은 소방사.
소방사의 위치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수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첫 번째로 한 것은 레벨을 올리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는 강철 같은 체력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그렇게 레벨을 올린다고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생각해 냈다.
산불에서 희생된 이들 중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한 것은 캠핑장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연기를 피하지 못하고 질식사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다른 곳으로 대피한다면?
처음에는 단순히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이강현은 눈을 부릅뜨고는 정면을 쳐다봤다.
평지였다.
불길이 옮겨붙은 나무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산불의 장작이 되어줄 나무들이 모조리 베어나가 커다란 원형의 평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박종훈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기론 이곳은 나무가 무성해야 했다.
때문에 수혁의 말에 반대했던 것이었고.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불길이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했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라면 불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수혁이 공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이강현은 그런 수혁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이런 구조라면 이쪽으로 불이 번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대체 이런 곳이 어떻게 존재하냐는 것.
누가 봐도 인위적인 공간이었다.
마치 산불에 대비해 미리 대피 장소를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이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수혁을 쳐다봤다.
이곳으로 안내한 사람은 수혁이었으니, 이곳을 만든 것도 수혁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설마 이거 그쪽이……? 아니, 어떻게 알고?”
박종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수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새로운 등산로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여기는 그 경로 중 하나고, 휴게시설이 예정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수혁이 이런 장소를 찾아낸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산불이 일어나기 전에 조연산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참고로 이런 장소가 조연산 내에 세 개는 더 있었다.
만약 수혁이 그토록 조연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며 쓰게 웃은 수혁은 요구조자들을 공터 한쪽으로 모았다.
주변을 살피며 놀라워하던 이강현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혁에게 다가갔다.
“불은 피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연기는 막지 못할 텐데?”
이강현이 택했던 대피 장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불을 막아도 연기가 침투한다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혁은 그에 대한 방비도 이미 해둔 상태였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수혁은 이강현과 박종훈, 그리고 남은 대원 한 명을 데리고 한쪽으로 향했다.
“삽?”
수혁이 그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에는 삽 몇 자루가 꽂혀 있었다.
“여기를 좀 파야 합니다.”
말을 끝낸 수혁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팠다.
대원들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일단 수혁의 말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
“이건!”
땅을 조금 파기 시작하자, 그 안에서 나온 것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물건들이었다.
“산소통!”
“등짐 펌프도 있습니다!”
수혁은 대피 장소를 만든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연기를 막아줄 산소통과 마스크, 그리고 등짐 펌프들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던 것이다.
그 숫자는 이곳에 있는 요구조자들에게 모두 돌아가고도 남을 정도.
사비를 털어서 산 것이기 때문에 통장이 거덜나긴 했지만, 수혁은 아깝지 않았다.
돈을 써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전 재산을 털어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앞으로를 생각하면 조금, 아주 조금 고달프긴 했지만.
“이걸 다 준비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장소도 그렇지만, 이런 장비들을 미리 구비해 놨다는 것은 미리 산불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안단 말인가?
이강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수혁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이강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혁은 장비들을 꺼내 대원들에게 넘겼다.
“이 정도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박종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비들이라면 내일 아침까지 버틸 수도 있는 양이었다.
준비해 둔 장비들을 모두 꺼내 든 수혁은 등짐 펌프를 하나 짊어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수혁을 지켜보고 있던 이강현이 따라붙었다.
“그건 왜?”
등짐 펌프는 산불 진화를 위한 장비다.
하지만 불은 아직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황.
심지어 불길이 침범하지도 못하는 공간이었으니, 등짐 펌프는 지금 쓸 일이 없었다.
“이곳은 맡기겠습니다.”
수혁은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구조대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가장 많은 숫자의 요구조자들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산속에는 아직도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반드시 구해야 하는 한 명.
오늘 일어난 산불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은퇴하게 될 김강식까지.
가만있기에는 구조해야 할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강현은 수혁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박종훈, 여기서 주혁이랑 사람들 챙겨.”
“선배?”
장비들을 정리하던 박종훈이 갑작스러운 이강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 녀석 따라간다.”
이강현은 수혁과 마찬가지로 등짐 펌프를 들쳐 맸다.
“괜찮겠지?”
이강현의 행동에 수혁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계획은 혼자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해 봐야 짐이 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강현의 얼굴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수혁을 따라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말로 설득해 봐야 통하지 않을 것이다.
수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못 따라오시면 두고 갈 겁니다.”
“허!”
이강현은 조연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단련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새파란 수혁의 말이 가소롭게까지 느껴졌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어이가 없어 하는 이강현의 태도에 수혁이 씨익-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가시죠.”
“얌전히 여기서 구조대 기다리고 있어.”
멍하니 자신들을 쳐다보는 박종훈에게 말을 한 이강현이 수혁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화염 속이었다.
* * *
“팀 구성은 아직 멀었습니까?”
박상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김철중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김철중은 골치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라고 구조대를 보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산불은 너무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현재 가용 가능한 펌프차로는 도저히 진화가 불가능할 지경.
소방헬기라도 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어두워진 지금으로선 헬기를 사용하는 것도 위험했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수혁뿐만이 아니었다.
고립된 것이 분명한 캠핑장의 요구조자들과 먼저 출발한 구조대원들.
그 인원이 수십이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인원이 없습니다.”
화재를 진압할 인원이 부족한 탓에 구조대원들까지 진화에 투입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구조대를 편성해 가까스로 운용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심각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했다.
“그럼 저희만이라도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구조 3팀의 대원들은 이미 화재 진압에 투입된 상태.
박상태의 입장에서는 산불을 제압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30여 명의 사람을 구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김철중은 잠시 고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을 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쪽에서도 지원이 오는 즉시 구조팀을 편성해서 후속 조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박상태는 김철중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구조 3팀을 집결시켰다.
호스를 잡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박상태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구조 시작한다.”
박상태는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브리핑했다.
캠핑장의 요구조자들과 연락이 두절된 구조대원들, 그리고 수혁까지.
대원들의 표정에 심각하게 변했다.
수혁도 수혁이었지만, 요구조자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선 한 사람당 최소한 세 명분의 장비를 챙겨야 한다는 소리.
그것을 가지고 산을 헤매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심지어 하늘까지 닿을 듯한 산불을 헤쳐야 하니 더욱 그러했다.
“예상 대피 지점이다.”
박상태는 지도를 펼치고는 구조대원들이 향했을 만한 장소들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산불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진 탓에 대피할 만한 장소가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래쪽에서부터 이곳들을 모두 확인하면서 위로 올라간다. 장비들 챙겨.”
박상태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괜찮을까요?”
아무리 장비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 요구조자들을 찾는 것은 힘들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들 역시 산불에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안 괜찮으면? 여기서 놀까?”
자신들은 구조대다.
아무리 위험하고 무서운 현장이라 할지라도, 들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구조대였다.
김강식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서 자신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괜히 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생일인데…….’
집에서 자신과 생일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딸을 생각하며, 김강식은 애써 불안한 기분을 떨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