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레벨 업 하는 프로게이머 (2) >
한 2부 리그 팀의 연습실.
리그가 끝난 비시즌이기에 어제까지는 조용했던 연습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시끌벅적했다.
자그마한 연습실에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님은 딱히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평범한 게임 팬인 차석진이라는소년이었다.
“오, 여기가 프로게이머들 사는 곳이구나! 더 좁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넓네?”
석진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석진을 초대한 2부 리그 팀의 스태프이자 동네 아는 형인 승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는 닭장처럼 비좁았다고 듣긴 했는데 요즘은 안 그러지. 투자도 많이 늘었고,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시설이 구리면 연습생으로도 안 들어가거든.”
“그렇구나. 근데 형. 다른 프로게이머들도 만나고 그래?”
“당연하지. 형 인맥 쩔어.”
“그럼 프레이 게이밍 사람들도 만났겠네? 나 그 팀 진짜 팬인데.”
정명이 속해 있는 프레이 게이밍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였다.
정상급의 실력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쇼맨십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므로 프레이 게이밍은 몇 년 전부터 한국 최고의 게임단이라는 이미지를 이미 굳혀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기도 했다.
“어...그 사람들은 잘 모르겠는데.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어. 아니, 한 번 봤나?”
“왜? 연습 게임 하면서 볼 수 있지 않아?”
“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랑 연습을 왜 해줘? 1부 리그 팀들도 그 팀이랑 연습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 상태인데.”
“그렇구나.”
그렇게 한창 연습실을 구경시켜주던 승환은 이내 방송국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리그가 끝난 시점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방송국에 들르는 프로게이머는 꽤나 많았으므로, 여러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좋아하던 조이슬 아나운서는 있을 걸? 그 사람은 방송국에 출퇴근하는 사람이잖아.”
“어, 정말? 그럼 콜! 무조건 간다!”
둘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방송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승환의 말대로 방송국은 꽤나 북적거리고 있었고, 방송국 로비에서 조금 서 있다 보면 유명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와, 형! 저기 이건형 선수 있어!”
“뭐? ‘콜드’ 이건형 선수? 어디어디?”
유명한 사람이 하나 둘 보이자, 게이머 인맥이 대단한 것처럼 행동하던 승환 또한신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애초에 그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하는 스태프 일이었다.
“저기, 카페 안에.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할까?”
“사람 많은데 되려나?”
“잠깐 줄 서면 되지. 다들 그러고 있네 뭐.”
이건형은 이미 수많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지간한 팬들이라면 곧장 알아보는 높은 인지도의 선수였기에 그런 듯 했다.
그리고 팬들은 그런 이건형과 한명한명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이내 석진과 승환의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사진 좀 같이 찍어주세요!”
선수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팬들을 대하고는 한다.
아예 팬은 무시하고 제 할일 하는 선수도 있고, 성심성의껏 팬서비스를 해 주는 선수도 있다. 그리고 여건이 되면 해주지만, 시간이 모자라면 칼 같이 끊는 선수도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선수인 정명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건형은 여자 팬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남자팬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그런 선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초점이...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요.”
“다음 분이요.”
이건형은 귀찮은 듯 손짓 했고, 결국 석진과 승환은 시무룩해하면서 떠났다.
선수에게는 수많은 팬들 중 한명일 뿐이지만 당사자는 평생에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는 순간이니까.
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왠지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흐릿한 사진 얻으려고 10분을 기다렸다니.”
“이제 보니까 콜드 표정 완전 귀찮아하고 있어. 우리만 웃고 있고. 쩝, 이건 그냥 지울까?”
“재수 없다. 지워버려. 어휴, 고추 달고 태어난 게 죄다, 죄야.”
“흥, 됐어. 저 사람 대리랭 문제도 있고 하여튼 지저분한 선수였어.”
둘은 방송에서의 모습은 사기였다느니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여자 밝힌다느니 하며 신나게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뒤에서 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야, 너희들. 방금 뭐라고 했어!”
화난 것 같은 목소리에 승환과 석진은 속으로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돌렸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형 성격 별로라고? 맞아. 완전 재수 없는 녀석이야.”
“헉, 아자토스!”
“유정명 선수다!”
이건형과는 달리, 유정명이라는 게이머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이건형이 무척이나 불친절했다는 둘의 응석도 받아주었고, 사진도 여러 장 찍어줬다.
거기다가 게임에서 친추 하라고, 같이 게임 하자는 얘기까지 듣자 석진의 광대는 하늘로 승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과 헤어졌지만, 석진과 승환은 웃음기가 가실 줄 몰랐다.
“와, 아자토스랑 친추하자는 말을 듣다니. 진짜, 진짜 너무 영광이야. 동네방네 자랑해야겠어!”
“그거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거든? 너 친추하면 한 달 안에 삭제 당한다.”
“아, 왜! 형도 엄청 좋아했잖아.”
이내 방송국 구경을 마친 둘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의 시선에 한 카페가 보였다. 아까 이건형과 사진을 찍었던 그 카페였따.
“여전히 사람 많네.”
“그러게.”
“석진아. 쟤 조금 골려줄까?”
“응? 어떻게?”
잠시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일부러 카페 쪽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카페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야, 콜드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할까?”
승환의 말에, 석진은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괜찮아. 아자토스랑 사진 찍었는데 뭐. 별로 관심 없어.”
그 말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람들에는 이건형과 꺅꺅거리며 대화하던 여성 팬들 또한 당연히 포함이었다.
“어디요? 아자토스가 어디 있어요?”
“아까 편의점에서 봤어요. 지금은 없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에 혹시나 하는 팬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이내 건형의 옆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건형이 멍하니 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승환은 석진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야, 미션 클리어다 이제 가자.’
‘어, 킥킥.’
그 후, 석진은 완전히 정명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열리는 프레이 게이밍의 월드챔피언십을 응원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
3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동안 정명은 월드챔피언십에 나가지 못 했고, 그 대신 한국 대표로 나간 SKS는두들겨 맞기 바빴다.
모두 유일환이라는 에이스가 유명한 중국 팀에 합류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팬들은 처음으로 월챔에 진출하는 프레이 게이밍에 대해 무척이나 큰 기대감을 드러냈고, 그것은 유명 연예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정명은 언벤 화제글에 박제된 한 유명 영화배우의 SNS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 선수들이 월챔 나가서 다 잡는 모습 빨리 보고 싶네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아니, 혜나씨도 월챔 보세요?
-그럼요. 되게 팬이에요 ^^
‘후, 잘 해야 될 텐데. 이러다가 1패 하기라도 하면 폭동 각이다...’
사람들은 정명의 팀에게 무척이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정명은 잘 알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과한 기대는 조금 부담이 될 정도였지만, 정명은 자신의 능력치를 살피며 마음을 다잡았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99/100)
정신력 (99/100)
오더 (99/100)
판단력 (99/100)
‘이 스탯으로 우승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 그래, 지난번에는 이 스탯으로 3연속 우승까지 했다고.’
이번 월챔의 개최지는 중국. 정명에게는 꽤나 친숙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한 팀원들은 그다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 했다.
중국에 도착한 에리는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콜록, 콜록...먼지 좀 봐. 빨리 여기 공기 나쁘네. 호텔로 빨리 들어가자.”
중국은 여전히 공기도 나쁘고 먼지도 많이 나는 동네였다.
다만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유일환이라는 게이머의 모습이 꽤나 자주 보였다는 것이다.
“와. 유일환 중국 진출하더니 돈 많이 벌었겠네. 부럽다.”
정명의 말에 쿠론이 킥킥 웃었다.
“같은 유씨면 가족 아냐? 돈 좀 달라고 해봐.”
“아니거든? 전혀 모르는 남남이거든?”
“엥? 그럼 친척인 거 아니야?”
“한국의 수많은 김씨가 다 친척인 건 아니란다.”
그렇게 정명은 팀원들과 함께 중국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드챔피언십이 시작되었다.
정명의 첫 경기 상대는 유럽 팀이었고, 모두의 예상대로 정명은 별 어려움 없이 1승을 챙겨갈 수 있었다.
-역시 한국 리그에서 3년 연속 우승한 클래스가 어디 가지 않네요. 정말 입이 벌어지는 컨트롤입니다!
-맞습니다. 유일환 선수도 보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조별 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 보상으로 10000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휴, 이것으로 첫 1승!”
하니가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이마를 닦았지만, 그다지 땀이 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애썼다는 오버액션이었다.
“오빠,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응? 아...드디어 거의 다 됐거든.”
“돼? 뭐가 됐다는 거야?”
“오빠가 드디어 만렙 찍었다는 소리야.”
하니는 뭔 개소리야 하면서 자리를 떴지만, 정명은 여전히 흐뭇한 표정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조별리그 승리로 받은 포인트는 1만 포인트.
지금의 정명에겐 별 것 아닌 포인트 수치였지만, 이번만큼은 의미 있는 수치였다.
[잔여 포인트 : 1000320]
‘드디어 됐다. 이걸로 스탯 100을 찍을 수 있어...’
스탯 100은 지난번에는 달성하지 못 했던 영역이다.
정명은 30살이 되기 전에 모든 스탯을 100으로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우며 숙소로 돌아왔고, 곧바로 시스템 창을 다시 띄웠다.
여기까지 와서 포인트를 아끼니 뭐니 하며 사양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평소에 스탯을 올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떴다.
[스탯 총합 398 이상의 수치는 인간의 신체가 버틸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네 가지의 스탯 중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소모되는 포인트는 100만 포인트입니다.]
‘엥? 뭐라고?’
잠시 멍 했지만, 시스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100으로 올리고 싶은 스탯을 선택해라. 단, 딱 한 가지만.
예컨대 모든 능력치 100을 찍은 만능 캐릭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정명은 멍하니 스탯 설명에 눈을 돌렸다.
이번에도 역시 평소와는 다른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
[피지컬]
-사용자의 신체능력을 인간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립니다.
당신의 컨트롤은 마치 불법 프로그램을 돌려서 컨트롤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해질 것입니다.
[정신력]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낄 정도의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라인전을 하면서도 팀원들에게 세세한 오더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오더]
-황제와도 같은 카리스마를 갖게 됩니다.
이를 이용하여 팀원들을 수월하게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방송 출연 등을 통하여 순식간에 탑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판단력]
-10수 앞을 내다보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몇몇 사람들은 당신이 미래 예지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앞으로는 누구도 당신을 속일 수 없게 됩니다.
목록을 천천히 읽어본 정명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런. 내 고질병인 선택장애가 또 도지려고 하네. 왜 선택지를 네 가지나 주고 선택하게 하는 거야?’
정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론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 TV를 보고 있던 쿠론이 정명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다음 경기 안 봐요?”
“다음 경기? 누구랑 누군데?”
“AP게이밍이랑 SKS요. 어떤 애들은 미리보는 결승전이라고까지 하던데요.”
“그래? 그럼 잠깐만 볼까?”
재방송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될지 호기심이 컸기에 정명은 두 팀의 대결을잠깐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밴픽이 진행될수록 하니와 쿠론은 입을 헤 하고 벌리며 무척이나 놀랐다.
“설마...설마 아니겠지?”
“맞는 거 같은데. 그거.”
SKS는 평소의 느낌대로 밴픽을 진행했지만, 문제는 유일환이 있는 팀. AP 게이밍의 밴 목록이었다.
그리고 AP게이밍의 밴이 끝나자, 쿠론과 하니를 포함한 모든 팀 선수가 헉, 소리를 냈다.
“킥킥킥, 월챔에서 저런 짓을 하다니. 여러 가지 의미로 진짜 대단하다.”
“우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SKS를 상대로 저런 여유를 부리나?”
“쇼맨십이 좋다더니 그 말이 진짜인가 봐.”
AP게이밍이 밴 한 것은 일명 가갈갱이었다.
밴픽을 대충했다는 대명사 격의 밴 목록이었다.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