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새로운 게이머 >
프로게이머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반인은 수천 판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는 마스터, 챌린저 리그도 수백 판 내에 올라가버리는 그런 천재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딱히 빡센 연습을 하지 않아도 두각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프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프로들 중에서도 또다시 서열이 나뉜다.
연습실에서 잠을 줄여가며 연습을 해도 1군, 2군, 그리고 하위권, 중위권, 상위권 등으로 또다시 나뉘게 된다.
같은 시간을 써도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아웃풋을 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천재 게이머라고 할 수 있었다.
“와, 쟤네 누구야? 엄청 잘 하잖아!”
“바보야, AP 게이밍이잖아. 중국 1위 팀.”
에리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핀잔을 넣었지만, 정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AP게이밍이란 이름을 기억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왜 난 몰랐지?”
“사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팀이긴 해. 작년에 만들어진 팀이거든.”
“작년에 만들어졌는데 저렇게 잘 한다고?”
AP게이밍이 꺾은 SKS는 한국의 자부심과도 같은 팀이었다.
언제나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마의 1만 골드 차이가 나도 ‘SKS라면 혹시...’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설자와 관객들이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에리와 정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채널을 돌렸다.
“한 판 정도야 질 수도 있지.”
“그래. 아직 겨우 조별리그인데 뭐.”
한판 졌다고 세상 무너질 듯 반응하는 건, 게이머 입장에선 솔직히 너무하다 느끼는 일 중 하나였다.
몇 백판 하다 보면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인데, 커뮤니티의 팬들은 벌써부터 누굴 방출시켜야 한다느니 밴픽이 잘못되었다느니 하며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다음은 북미 대 태국인가? 음, 별로 보고 싶진 않네. 난 그만 가 볼게.”
“어디를?”
“새 팀원 만나러. 오늘 만나기로 했거든.”
그 말을 끝으로 정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팀의 구경은 할 만큼 했으므로, 이제 자신의 일을 할 차례였다.
........
다른 사람들이 월챔에 시선이 쏠려있는 동안, 정명은 팀의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2부 리그에서 게이머로 활동하던 메테오는 정명의 제안에 재미있을 것 같다며 팀합류를 수락했고, 심하게 망설였던 하니 또한 며칠을 고민한 끝에 조건부로 허락했다.
“이거 진짜 잘 되는 거 맞나? 엄청 불안한데. 엄마가 알면 분명 난리 날 거다...”
다시 만난 하니는 그동안 안 쓰던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었고, 정명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느꼈다.
”괜찮다니까. 흔해빠진 아이돌이 아닌, 개성 있는 아이돌이 되어보자고.”
“으으....이젠 나도 모르겠다. 알겠다. 함 해보지 뭐.”
드디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겠다는 최종 결정이 나왔다.
정명은 팀 입단을 환영한다는 듯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지만, 하니는 캭 소리를 내며 손을 쳐냈다.
“머리 한 거 다 풀어진다!”
“좋아, 내 팀에 온 걸 환영해. 그럼 당분간 솔로랭크 열심히 돌리고 있어. 예선 준비해야 하니까.”
“푸히히. 알았어! 게임 하면서 돈 번다니, 솔직히 말해서 되게 신 나! 뒷 일은 장담 못 하겠지만...”
정명은 마치 만화에 나오는 용 구슬을 모으는 것처럼 한명한명 팀원을 모았고, 마침내 정명의 팀은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석진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예선 마감 신청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젠장.’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봐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수첩에도 별다른 말이 없다.
예선 신청 마감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석진이라는 서포터를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정명은 할 수 없이 일단 다른 사람으로 팀을 메꿔보기로 했다.
‘일단 무조건 이번 리그에는 나가야 돼.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 팀 자체가 흐지부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결심한 정명은 곧장 에리에게로 달려갔다. 에리가 갖고 있는 데이터망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을 뽑겠다고? 네가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며?”
“어. 원래는 내정된 사람이 있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시간이 없으니 일단 다른 사람으로 채워 넣으려고.”
“음, 그래?”
“그래. 그러니까 예전에 보여줬던 데이터 좀 보여 줘봐.”
지금 정명이 보여 달라는 것은 외부유출 절대 금지인 내부 데이터였다.
에리는 저 당당한 모습에 살짝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노트북 내에 있던 데이터베이스를 열어주었다.
“으음, 그래. 한 번 괜찮은 서포터로 찾아보자.”
그 후, 정명은 데이터베이스를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승진
-현 2부 리그 팀, AD 캐리의 서포터-성격 문제없음, -예상 연봉 : 2500만원
‘기억난다. 얘는 프로 게임씬에서 얼마 못 버티고 금방 은퇴한 애잖아. 김준수 얘도 손목 부상이니 뭐니 하던 애고. DB가 썩 정확하진 않은 것 같네.’
눈이 높아져서일까?
데이터베이스를 아무리 뒤져봐도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좀 쓸 만하다 싶으면 이곳으로 올 이유가 없을 것 같고, 올 만하다 싶으면 발전의 여지가 안 보인다.
물론 이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현실이 코앞에 닥치니 그 막막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에리는 심지어 해외 선수로까지 눈을 돌려 선수를 찾아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쪽은 더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때문에 정명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딱 한 가지. 좋은 팀원을 찾는 방법이 남아 있긴 하지. 어지간해선 쓰고 싶지는 않지만...’
정명에게는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긴 했다.
500만 포인트 짜리스킬, 기도.
정명은 이 스킬 덕분에 초월이라는 최상위급의 스킬을 하나 얻을 수 있었지만, 정명이 이 스킬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이유는 꽤나 명확했다.
‘이거 쓰면 머리 너무 아픈데...어쩌지?’
처음 쓸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겁이 나서 사용하지 못 했다.
머리 아픈 것을 떠나서, 그 스킬을 사용한 후에는 뭔가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 정명은 이 스킬은 자신이 감히 건드릴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역시 이건 아니야. 차라리 조금 눈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나 데려와서 머릿수를 채우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 때, 옆에서 메신저를 골똘히 들여다보던 에리가 기쁘다는 듯 소리쳤다.
“명아! 하겠다는 사람을 찾았어!”
“어? 정말? 누구?”
“우리 팀에 있던 은퇴한 선수인데, 그쪽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어. 내가 꼭 잡을게!”
“아니, 잠깐만. 아무리 사람이 급해도 그렇지, 누군지 알고 받아? 실력이라도 봐야 하는 거 아냐?”
“실력은 걱정할 거 없어. 걔는 우리 팀의 에이스였으니까. 분명 네 마음에도 꼭 들 거야!”
.........
그로부터 며칠 후.
에리가 한 허름한 연습실로 새 팀원을 데려왔다.
팀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람은 한때 에리와 한 팀에 있었던 메리라는 게이머였다.
“한국까지 직접 오실 줄이야...반갑습니다. 유정명입니다.”
“난 송하니야!”
“안녕하세요.”
검은 머리에 파란 눈.
외모로만 보자면 어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가 아닐까 싶은 여자였다.
‘메리 5호를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이야.’
예쁜 외모고 자시고, 정명은 허겁지겁 스탯부터 띄웠다.
[메리]
피지컬 (82/82)
정신력 (88/88)
오더 (80/80)
판단력 (90/90)
‘어라,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스탯이 높긴 높다. 북미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더니, 확실히 한국 1부 리그에 집어넣어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그런 스탯이었다.
하지만 모든 스탯이 한계스탯까지 차 올라있다.
정명은 지금까지 수백 명의 게이머를 봐왔지만, 이런 스탯은 본 적이 없었다.
‘쯧쯧, 안 됐네. 노력은 많이 한 것 같은데 한계가 빨리 왔어. 슬럼프를 겪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그런 정명의 걱정과는 달리, 옆에서 면접을 구경하던 하니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있었다.
“우아아, 저 언니 너무너무 예쁘다! 울 소속사에 성형 많이 한 언니 있는데, 그 언니보다 더 예뻐! 우리 저 언니 뽑자. 응?”
“넌 그냥......가만히 있어. 제발.”
면접을 구경하겠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더니, 옆에서 방해만 하고 있다.
정명은 하니의 볼을 쭈욱 늘리며 잔소리를 했고, 그 모습을 보던 메리는 큭큭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팀원이네요.”
“어라, 한국말 할 줄 아세요?”
“네. 독학했어요.”
그 말에 조용히 있던 에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메리와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녀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지금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정명은 그저 잘 됐거니, 생각하며 면접을 이어나갔다.
“와, 그거 좋네요. 그럼 몇 가지 물어볼게요. OMA에서는 미드라이너로 활동하셨다 들었는데, 혹시 선호하시는 포지션이 있으세요? 지금은 제가 미드라이너라서.”
“어느 곳이던 상관없습니다. 남는 곳에 갈게요.”
메리의 한국어 발음은 엄청나게 깔끔했다.
정명과 하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지간한 한국 사람보다 듣기 훨씬 좋은 억양을 갖고 있다 생각했다.
“실력 테스트는 안 하나요?”
“신입 채용이 아니라 경력 채용이잖아요. 그런 것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런가요? 그럼 계약서 주세요. 싸인 할게요.”
“잠깐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북미에서 꽤 괜찮은 커리어를 쌓으셨다고 들었는데, 굳이 우리 팀으로 오신 이유는 뭔가요?”
메리가 있던 북미 팀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정명의 팀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스타트업 회사.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받아들이지 않을 이직 조건이었다.
“아 오빠. 그런 걸 왜 물어봐!”
하니가 손바닥으로 정명의 입을 틀어막으며 성을 냈고, 신나서 계약서를 들고 오던 에리 또한 눈을 흘기며 정명을 툭툭 쳤다.
괜히 다 된밥에 재 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명으로써는 무척 중요한 질문이었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메리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이 썩 마음에 들었거든요.”
“네? 제가요?”
“예.”
메리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묵묵히 계약서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연습실에서 에리와 메리가 나가자마자 하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뭘 그렇게 웃어?”
“방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오빠가 너무 웃겼어.”
메리의 폭탄선언 후, 정명은 ‘저는 애인이 있습니다.’ 라거나 ‘죄송하지만 당신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따위의 변명을 해야만 했다. 에리에게 괜한 오해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킥킥킥, 오빠 연기 잘 하더라.”
“연기라니?”
“에리언니가 시무룩해 할까봐 메리한테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한 거잖아.”
“아, 그건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남자들은 예쁜 여자 보면 눈 돌아가는 거 난 다 안다구! 엣헴.”
‘쩝......’
정명은 대답 대신 메리가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빛이었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그런 공허한 눈빛이었다.
“그 여자 말이야. 무섭다고 해야 할까, 가끔 날 볼 때 뭔가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조금 지릴 뻔 했거든.”
“뭔 헛소리래? 예쁘기만 하던데.”
“그래. 내가 잘 못 봤나보다. 아무튼 내일부터는 연습해야 하니까 연습실에 일찍 나와. 알았지?”
“네에! 알겠습니다!”
..........
그 다음 날.
모든 팀원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였다.
아직 한국어를 잘 못하는 메테오는 한쪽 책상에서 한국어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머지 팀원들은 책상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송하니와 아이들로 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리그의 사무라이들이 좋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뜻인데?”
“응? 별 다른 뜻은 없고, 그냥 멋있을 거 같아서 지었어.”
이야기 주제는 팀 이름에 관해서였다.
사실 이름 따위야 뭐로 하던 상관은 없었지만, 민주주의적 절차로써 팀원의 의견을 들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메리 5호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말인가요?”
“네. 아까부터 조용히 계시길래...”
“그런데 메리 5호는 뭐죠?”
메리가 하도 많으니 메리 5호라고 부른다.
정명이 농담을 던졌지만, 메리의 입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름이라. 글쎄요, 시체 매니아들은 어떨까요?”
“전 시체 매니아가 아닌데요.”
“말도 안 돼. 전혀 안 귀여워! 그것보다는 미소녀 군단이 괜찮지 않을까?”
“난 미소녀가 아니야.”
조금 난항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팀명은 프레이 게이밍.
기도 후에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만든 이름이었다.
“오빠. 솔직히 이름 대충 지었지? 그런 티가 팍팍 나.”
“아니거든? 며칠을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거든?”
‘눈치 빠른 꼬마 같으니.’
정명은 말을 돌리려 TV로 눈을 돌렸다. TV에서는 SKS가 중국의 AP 게이밍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SKS가 중국 팀에게 질 줄이야. 진짜 강한 팀인데...”
“그러게. 중국 애들, 무슨 약이라도 한 거 아냐?”
정명이 팀을 만드는 동안, 월챔에 진출한 한국 팀은 줄줄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SKS, KTA, 그리고 SAMW까지.
한국 팀 맞나 싶을 정도로 추풍낙엽이었다.
‘지금은 SKS도 힘든데 그 녀석들을 꺾은 팀이라니. 우리는 이제 막 시작인데.’
하지만 조급해져봐야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정명은 착실히 팀의 첫 연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습을 하기 전, 메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네. 뭔가요?”
“처음에 SKS랑 붙으면 어떡하죠?”
“네? SKS 걱정을 왜 하시죠?”
“그야......아무리 중국 팀한테 졌다고 해도 SKS는 여전히 강한 팀이니까요. 아닌가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으로 말하는 모양새다.
괜히 머쓱해진 정명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메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PC방 리그부터 시작해야 하는데요? 바닥부터 기어가야 하는 거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