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위기를 기회로 (4) >
정명이 나오자마자 감독이 손을 흔들며 친한 척을 한다. 휴가를 앞두고 감독 또한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어, 그래. 우리 에이스! 휴가 계획은 세워놨어?”
“아뇨, 그게 아니라 실은 계약 문제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프로게이머들은 보통 1년 단위로 계약을 했으므로, 정명 또한 벌써 재계약을 해야 하는 날짜가 되었다.
그런데 계약 이야기를 들은 감독의 표정이 조금 애매하다.
감독은 정명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연습실 내에서 조용한 곳으로 정명을 이끌었다.
“정명아 이거 우리끼리만 하는 말인데...”
“예. 말씀하세요.”
“사실 ATX 본사에서 연락이 있었어. 김한솔 팀장님이 네 재계약 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하시나봐.”
“...쩝, 또요?”
김한솔은 ATX 이스포츠 부분을 담당하는 총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런 막중한 직책에 맞지 않게 정명이 회식 때마다 빠지는 것을 무척이나 달갑지 않아하는 속 좁은 사람이기도 했다.
“네 연봉 인상률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냥 딴지거는 것 같아. 그 왜, 네가 회식 많이 빠져서 팀장님한테 밉보였잖아.”
“쯧쯧,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사람이 총 책임자라니. ATX도 참.”
잘 나가는 선수라고 해 봐야 돈 주는 사람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다.
김한솔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꼰대 상사였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를 상대했던 모든 선수와 감독들이 실제로 그의 비위를 맞추려 많이 애쓰고는 했다.
딱 한 명, 정명을 제외하고는.
원래 군대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떠나기 전. 정명은 가기 전에 폭탄을 하나 떨어트리기로 했다.
“저 그냥 안 합니다.”
“뭐?”
“ATX랑 재계약 안 해요. 그 인간 짜증나서.”
“아니아니 잠깐만, 정명아.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
“제 재계약건은 그럼 논리적으로 접근한 일인가요? 됐습니다. 때려 치고 군대나 갈랍니다. 말리지 마십쇼.”
그리고 그런 정명의 이야기는 커뮤니티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점에 서 있는 프로게이머. 군대로 가다.]
[은퇴는 아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일 뿐.]
-게임판 루머는 어째 틀리는 일이 없는 것 같네. 프런트가 연봉 인상을 반대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게이머를 저따위로 대우하나?
-그냥 해외로 떠라. 여기는 답이 없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ATX 본사에서는 연봉 인상을 포함하여 완만한 수습을 시도했으나 정명의 태도는 완고했다. 어차피 군대는 갈 것이었고, 너희들 한 번 엿먹어봐라 하는 생각에서 벌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김한솔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이번 일 때문에 휴가도 못 갔던 감독은 담배를 태우며 정명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얘기 들었어? 김한솔 걔, 어디 지방으로 배치 받을 거라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알아서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지. 그래도 정명이 너, 결심 바꿀 생각 없지?”
“예. 솔직히 말해서 원래 군대 가려고 했는데 꼬장 한 번 부려본 거예요.”
“큭큭, 새끼. 그럴 줄 알았다. 뭐 그래도 네가 한 건 해준 덕분에 프런트에서는 간섭을 거의 안 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으니 장기적으로는 좋은 일이 되었지.”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요.”
“나중에 전역하면 연락 해. 밥 한 번 먹자.”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감독님.”
이제 정말로 군입대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명은 친분이 있던 여러 사람들과 한명한명 일일이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동료 선수들, 한창 뜨고 있는 아역배우가 된 송하니,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척들, 그리고....
‘그리고...더 연락 할 사람이 없네. 쩝. 친구가 많이 없어졌어.’
몇 번 전화를 돌리던 정명은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켰다. 에리와의 영상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번거롭기에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놓았었는데, 이제 슬슬 해치워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명의 모니터 화면에 무표정한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보세요? 나야 정명이. 누나 지금 통화 돼?”
“무슨 일이야?”
“나 조만간 군대 가게 됐거든. 그거 알려주려고 연락 했어.”
“뭐? 그거 그냥 하는 말 아니었어? 분명 농담이었다고....”
“사실 농담이었다고 말 한 게 농담이었어. 하하. 놀랐어? 이게 바로 내 고오급 유머...”
“이런 ㄱ새끼가 빡치게...말 똑바로 안 할래?”
에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명은 순간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에리는 딱 한 마디를 더 말 하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좋아. 지금 한국 갈게 기다려.”
그로부터 며칠 뒤, 에리와 쿠론은 정말 한국으로 왔다.
시즌이 막 끝났을 때이기에 스케줄이 한가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걱정 돼서 뛰어오는 것을 본 정명은 솔직히 꽤나 감동을 받았다.
“와, 진짜 왔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도 왔어!”
“쿠론도 왔구나? 고마워!”
“헤헷.”
쿠론과의 좋은 분위기와는 달리, 에리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정명의 멱살을 잡았다.
“어 어? 이거 놓고 말합시다 선생님.”
“야, 너 군대 간다는 거 진짜야?”
“진짜지 그럼.”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도 진짜겠네? 2년 있어야 한다거나 한 달에 겨우 200달러받는다거나...”
“어. 그것도 진짜야.”
“하아....그래. 그렇군. 군대라...”
에리는 한숨을 쉬며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무척 자애로운 표정으로 정명을 대하기 시작했다. 1분 전까지 멱살을 잡았던 사람이 방긋방긋 웃으며 태세전환을 하니, 정명으로써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너 뭐 해야 할 일 있어?”
“아니? 없는데. 당분간 백수야.”
“그럼 우리 같이 축제나 놀러갈까? 물론 네가 가이드를 해 줘야겠지만...”
에리가 할 거 없으면 놀이공원이나 축제라도 가자고 제안했다. 곧 군대 끌려갈 사람, 위로라도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축제에 도착한 에리는 정명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자기들끼리 놀기에 바빴다.
“엄마, 나 저거 먹고 싶어! 아이스크림 사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래, 알았어.”
이내 큼지막한 아이스크림을 든 쿠론은 함박 미소를 지었다.
“엄마도 한 입 먹어!”
“우와, 우리 딸. 엄마한테도 주는 거야?”
“응!”
‘나한테는 쌍욕을 퍼붓더니. 진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른 거 아냐?’
그리고 엄마와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쿠론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정명에게오도도 달려왔다.
“아저씨! 이거요!”
“응? 뭐?”
“아이스크림 드세요!”
“나 한입 주겠다고?”
“네! 맛있어요!”
정명이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으로 고개를 내렸다.
쿠론이 한 입, 에리가 한 입.
두 개의 이빨 자국이 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아, 난 됐어. 이따 밥 먹을 거거든.”
“이거 맛있는데......”
쿠론이 시무룩해하자 에리가 눈을 치켜 올리며 빨리 한 입 처먹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기 시작한다.
정명은 결국 쿠론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배어 물으며 과장스럽게 엄지를 치켜 올렸다.
“맛있다!”
“그쵸! 헤헤. 딸기맛이에요.”
“이렇게 착한 아이가 나중에는 왜 그런 양아치가 되었을까. 엄마한테 배워서 그런가?”
“응? 뭐라고요?”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한국말로 말했으므로 쿠론은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으라고 한 소리였기에 굳이 해석해주지는 않았지만, 에리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영어로 좀 말해줄래? 우리 욕한 거 같은데.”
“아니거든? 습관적으로 나왔을 뿐이거든?”
지역 축제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했던 축제는 별 거 없기는 했다.
하지만 재미란 같이 간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극명하게 차이나는 것이었으므로, 셋은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쿠론은 오래 돌아다녔기에 무척 피곤했는지,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쿠론이 많이 피곤해 해.”
“그래, 그러자.”
세 사람은 근처에 잡아두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방은 두 개를 잡았지만, 자기엔 아직 시간이 이르다.
때문에 정명은 에리와 쿠론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축제 시즌에 술판이 빠지면 무척이나 섭섭했으니까.
쿠론을 재워놓은 에리와 정명은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며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쿠론이 널 많이 따르더라.”
“그건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 여전히 되게 귀엽던데?”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많이 못 써준 것 때문이야. 정말 미안해 쿠론...”
“애를 혼자 키우는 게 그리 만만치 않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최근에 새로 들어온 팀원 실력이 상당히 괜찮아. 네가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보일지 몰라도 우리 팀에서는 에이스라고 할 수 있지...”
“그래? 잘 되고 있다니 그거 다행이네. 그런데 우리 서로 대화하고 있는 거 맞지?”
“어, 어? 뭐라고?”
에리가 정명의 말을 되물으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방바닥에는 이미 빈 맥주캔과 와인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저기,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어떨지...”
“나 술 세거든? 이 정도는 끄떡없어.”
‘끄떡없는 거 치곤 했던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계시는데요.’
예전의 술 세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맥주 몇 캔 마셨다고 벌써 인사불성이다.
정명은 나중에 뒷정리는 자신이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옆에 있던 와인을 들이켰다.
...........
-가라 전기 쥐!
-피카퓌!
‘아 머리 아파....’
다음 날 아침.
밖에서 들리는 TV 소리에 정명이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이거 또 뻗었네.’
정명과 정명의 팀원들은 우승을 한 날이면 이렇게 자신의 주량을 한계까지 시험하고는 했다. 그리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정명은 얇은 이불을 덮은 채,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에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 일어나 봐요. 우리 바닥에서 잤어요. 에리....”
그런데 에리의 이불을 들춘 정명은 0.1초 만에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에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정명은 본능적으로 급히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 맞아. 술기운에...서로 솔로로 지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건지 꽤나 자연스럽게...’
에리는 많이 피곤했는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정명은 그런 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좀 씻을까. 땀 흘려서 좀 찝찝하고.’
-난 나옹이다옹!
-나옹이! 넌 내꺼야!
거실로 나와 보니 정명을 깨웠던 TV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거실에는 술병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고, 쿠론이 TV 앞에 있는 소파에서 잠들어있었다. 정확하게는 잠들어 있는 척이었지만.
‘요 녀석 봐라. 자는 척을 하고 있네?’
TV에서는 애들이 보는 만화가 나오고 있었다. 쿠론은 한국말을 잘 몰랐으므로, 그냥 그림만 본 듯 했다.
‘내버려 두자. 깨워봤자 할 말도 없고.’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니 에리가 잠에서 깨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리는 멍한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명이 인기척을 내자, 정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났어?”
“....응.”
이내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정명 또한 할 말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입만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던 에리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더욱 강하게 여미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애인이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애인?”
“하긴, 이런 아줌마가 신경이나 쓰일까 모르겠지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 애인이라고?”
실제로 그동안 정명에게 대시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제법 잘생긴 얼굴에 천재 게이머라고 평가받는 정명은 이성으로써 상당한 매력이있었으니까.
개중에는 B급 연예인도 있었지만 정명이 전부 거절했다.
딱히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수도승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주변 사람들을 보며 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눈을 높인 주범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송하니 말이야. 너랑 사귄다는 유명 배우.”
“뭐? 내가 송하니랑 사귄다고?”
“잠깐. 너 혹시 귀에 ㅈ박았니? 아까부터 왜 자꾸 두 번씩 물어봐?”
“...미안.”
“아무튼, 오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상호 합의 하에 한 거니까 구질구질하게 책임지라는 소리 안 해.”
‘송하니랑 내가 사귄다고? 어디서 이딴 말도 안 되는 루머가 만들어진 건지...’
정명은 에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의 사진을 찾아 에리에게 들이밀었다.
“송하니라는 애는 이 녀석이야.”
“무슨 생각이야? 애인 자랑 하려고?”
에리는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눈을 돌려 정명이 꺼낸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누가 봐도 꼬마아이인 송하니가 웃는 모습으로 손가락 두개를 펼쳐 V자를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린 시절 사진?”
“일주일 전 사진. 참고로 쿠론하고 같은 나이야.”
“너 설마...”
“제발 거기까지 합시다. 응? 사람 한명 묻으려고?”
말을 꺼낸 에리 또한 그건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보다 자리 좀 비워줄래? 옷 입고 싶은데.”
“어, 응. 알았어.”
그 후, 에리와 정명은 사귀는 것도 아니고,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정명의 군입대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정명은 에리와 쿠론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정말 가는구나...”
“정말 가지.”
“갔다가 죽는 거 아냐?”
에리가 퉁명스럽게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짓궂은 농담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명 또한 웃으며 짓궂은 농담으로 응수했다.
“죽지는 않을 걸? 뭐...가끔 사고가 벌어져서 죽는 사람이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가지 마세요! 가면 죽을 거예요. 흐어어어엉...”
쿠론이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며 서럽게 울었다. 누가 보면 파병이라도 나가는 모습인 줄 알 것 같았다.
“안 죽어. 자, 코풀자. 흥!”
“흥!”
푸우우.
정명이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으로 버리며 둘을 안심시켰지만, 굳은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쟁 난 곳으로 파병 가는 게 아니....”
“군대 안 가면 어떻게 되는데?”
“감옥 가던가?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럼 차라리 감옥을 가면....”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시간 되면 면회나 와줘. 아님 나 휴가 나올 때 놀아줘도 되고.”
“면회라니, 무슨 감옥 가는 거 같네.”
“뭐 비슷하지. 아니, 그러니까 나는 딱히 전쟁하러 가는 게....”
에리는 정명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정명의 말을 끊었다.
“너 말이야.”
“응?”
“그때 일, 기억 잘 안 나지? 술에 많이 취해서.”
“어....뭐 그렇지.”
정명 스스로도 엄청나게 아쉬운 일 중 하나였다.
까먹을 일이 따로 있지 다른 일도 아니고 그 날의 일이 기억이 잘 안 난다니.
에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는 것처럼 연민 가득한 눈으로 정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더 하고 싶으면 꼭 살아 돌아와.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래.”
정명은 자신이 전쟁 난 지역에 파병 가는 것도 아니고, 수도권의 시설 좋은 부대에 배치 받을 ‘예정’ 이기에 걱정 할 필요 없다고 말 하려 했다.
하지만 저런 약속 까지 받은 상황에서 굳이 쓸 데 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짧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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