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위기를 기회로 (2) >
다음 날.
정명은 아침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연습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똥씹은 표정의 정명이 등장하자마자 팀 에이스의 컨디션을 누구보다 잘 살피고 있는 ATX의 코치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너 표정이 아침부터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요?”
“어. 아주 한 놈만 걸리면 작살내주겠다는 표정이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신체검사 받으라고 통지서가 날아왔거든요.”
“언제?”
“후....바로 어제요. 따끈따끈 하죠.”
그다지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말에 코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래? 당장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난 무슨 애인 임신이라도 시킨 줄 알았지.”
“하아....그건 아니지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군대 간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회귀 한 기념으로 군대 한 번 더 가기.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여유를 갖고 임한 정명이었으나, 병무청에서 온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격한 분노로 인하여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와 나 진짜...다른 건 참아도 이건 못 참겠다. 군대를 한 번 더 가라고? 미친 거 아냐 진짜?’
그리고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선수들은 자기도 군대 오라는 편지를 받았다며 큭큭 웃었다.
“야, 괜찮아 괜찮아. 그거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면 돼.”
“맞아. 프로게이머 하면 얼마나 한다고. 한 스물다섯 살 넘어서 가면 되지. 군대 갔다 오면 폼 확 떨어지니까.”
“그래. 가기 전에 돈만 최대한 벌어놓고 가면 되지 뭐.”
팀 내에는 남자가 대부분인 탓에, 군대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남자들이 정명에게 각자 조언을 건넸다.
물론 18살에 군필자인 정명으로써는 별 필요 없는 조언이 대부분이었고, 결국 정명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쩝, 알겠습니다. 잘 생각 해 볼게요.”
군대 문제를 그냥 빠르게 해결하느냐, 코치의 말대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느냐.
그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되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우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 몇 개월이 지났다.
정명은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고, 명실상부한 팀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혔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결승전 뿐이었다.
.........
결승 경기 전.
경기를 해설하는 해설자들이 윈터 시즌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작년 월챔에서도 유정명 선수가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렇죠. 저 피지컬이라면 북미의 내로라하는 탑 라이너도 제압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저희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ATX가 무조건 이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 게임은 팀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설자가 질질 시간을 끌어 준지 30분 째.
드디어 결승전 시간이 다가왔다. 정명은 굳은 표정으로 무대를 향해 올라갔다.
“부담 갖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알았지?”
“네.”
감독은 부스로 올라가는 선수들과 한명한명 악수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과 평범하게 악수를 나누던 감독은 정명의 차례가 되자 과장스럽게 정명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갓명아! 너만 믿는다!”
“갓명이요? 아 정말. 이렇게 부담 주실 겁니까?”
“부담은 무슨. 내 너 만한 강심장을 본 적이 없는데. 자, 여기까지 왔으니 솔직히 말 해봐. 너 이번에 데뷔했다는 거 뻥이지? 경력 5년쯤 되는 프로게이머지?”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걸 알아채신 건 감독님밖에 없어요.”
둘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다 긴장을 푸는 방법이다.
시간이 되자 정명은 픽 웃으며 부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분 뒤. 모든 사람들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밴픽이 시작되었다.
“형, 알죠? 운영 싸움으로 가면 우리가 유리해요. 라인전에서 변수만 안 주면.....”
“OK OK. 나만 믿어.”
상대 탑 라이너는 무척이나 단단한 캐릭터인 타이탄을 골랐는데, 큰 덩치에 걸맞게 바코드처럼 보이는 체력과 황당할 정도로 차는 실드량이 장점인 캐릭터였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는 정명의 캐릭터는 펜싱여왕.
타이탄의 실드를 뚫어버릴 정도의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이건 역시 갓 핸드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는 없는 플레이네요.
-아자토스 선수가 피지컬이 거의 정점에 도달한 선수라는 평을 받는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정명의 실력이 압도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틈만 나면 솔로킬을 내고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도 프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명은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이득을 취했다.
정신없이 싸웠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과를 보면 꼭 한 두 대씩 더 때렸다.
그리고 싸우는 와중에도 CS는 빠짐없이 먹고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경기 좀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저 녀석 실력 좀 좋은데?’ 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한 플레이였다.
‘그래도 피지컬이 10 이상 차이나면 프로고 뭐고 다 썰어버리기는 했지만...이 녀석은 그렇게까지는 안 되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자 CS격차가 상당히 나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판정 승. 펜싱여왕으로 타이탄을 찍어 눌렀다고 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리고 라인전을 우세하게 가져감에 따라, 정명이 가장 먼저 1차 타워를 깼다.
[적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좋아, 이제 다른 라인에서 버텨주기만 하면....’
그런데 그 때, 밑쪽 라인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나왔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적 트리플 킬!]
“어? 뭐예요?”
“미안, 실수했다....”
경기 전에는 믿으라고 하더니 중요할 때 실수가 나온다.
정명은 팀이 깨지고 있는데도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탑 라인의 처지를 비관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오, NHG 애들이었으면 어떻게든 버텨줬을 텐데!’
아쉬워해봤자 소용없다.
바텀 라인에서 든든하게 버텨줬던 쿠론과 석진 듀오. 그들은 지금 든든하기는커녕 하나하나 다 챙겨 줘야 하는 코흘리개 꼬꼬마들이었다.
정명은 속으로는 짜증을 내면서도 겉으로는 리더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멘탈 잡아요. 아직 게임 안 끝났습니다.”
“어, 그래. 그렇지.”
“좋아. 역전 가자!”
이 정도로 무너질 거였다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 했다.
라인전이면 라인전, 운영이면 운영.
정명은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해냈고, 그에 대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긴 시간이필요하지 않았다.
-트리플 킬! 쿼드라 킬! 그리고 우물로 도망치는 보안관!
-아, 삭스 선수! 펜타킬 매너 없나요! 없네요.
-그래도 게임은 끝났습니다. 넥서스가 깨지며....GG.
“드디어 끝났다!”
“정명이 이 녀석, 진짜 대견한 녀석이라니까!”
“그래! 조금 싸가지 없으면 좀 어때! 이렇게 잘 하는데!”
결승전 결과는 3:0.
경기가 끝나자마자 코치와 팀원들이 정명에게로 달려와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3경기 내내 게임을 캐리한 주역이었으니 정명에게 몰려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후...드디어 하나 끝났네.’
윈터리그 우승 덕분에 포인트가 순식간에 차오른다.
그리고 우승 퀘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퀘스트 완료 메시지 또한 정신없이 뜨기 시작했다.
[로열로더]
*데뷔 한 김에 우승까지!
*데뷔한 리그에서 우승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이 일은 프로게이머로써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습니다.
-30만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자유 포인트 1개를 얻었습니다.
-당신의 인지도와 위상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이제 코치, 감독, 심지어 팀 메인 스폰서의 고위 관계자까지 당신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와, 나 진짜. 이 녀석들 데리고 캐리하는 거 엄청나게 빡세다. 원딜이라는 놈도 자꾸 짤리기나 하고. 쿠론이었다면 포지션 잡는 건 기가 막히게 했을 텐데.’
팀에서 활동할수록, 리그를 진행할수록 자꾸만 비교하게 되었다.
현재의 팀인 ATX와 과거에 자신이 몸담고 있던 팀인 NHG.
물론 NHG애들도 처음부터 잘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명은 그때의 그 팀을 꽤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아니야.”
멍하니 있던 정명은 옆 선수의 말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웃는 표정으로 부스에서 나왔다.
자신의 심정이 어쨌건, 팬들에게는 웃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
“야, 정명아! 3차 가자 3차...진짜 좋은 데 데려다 줄 테니까.”
그날 밤.
고급 일식집에서 우승 기념 팀 회식이 열렸다.
정명과 다른 팀원들은 솔직히 회식에서 빠지고 싶었으나, 스폰서의 고위 관계자가 왔다는 말에 강제로 참석해야만 했다.
그리고 2차 맥주집까지 돌고 난 지금.
슬슬 제정신인 사람이 드물어지고 있었다.
“정명이는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해요. 이제 막 성인이 된 애인데.”
“야야, 정명이 피지컬 쩌는 거 알아 몰라? 쟤가 마우스 움직이는 거 봤어 못 봤어?”
“알죠. 모르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 임마 어? 거기서도 컨트롤 쩔 거 아냠 마! 그러니까 우리 막내 실력 좀 보자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넌?”
‘쯧쯧, 저거 완전히 맛탱이가 갔군. 아무리 스폰서 관계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진짜진상이네 저거...’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 정명은 자신의 팀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리고 언제나 선수를 가장 먼저 생각해주는 그런팀을 갖고 싶었으니까.
정명이 팀을 만들었던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 있는데, 옆에 있던 팀 동료가 정명의 팔을 툭툭 쳤다.
‘야야, 지금 송 팀장님이 가자는 노래방 갈 거냐?’
‘피곤해. 안 가. 형이나 가.’
‘안 가면 되게 지랄할 것 같은데...’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난 딴 팀 가도 상관없으니까.’
‘어, 야 야! 진짜 튀려고?’
보나마나 여자 끼고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정명으로써는 여자고 뭐고 그냥쉬고 싶었다.
정명은 어디 가냐는 스폰서 관계자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술집 골목과 달리, 정명의 오피스텔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휴...진상 스폰서 때문에 두 배로 힘들다. 이 짓거리도 1년만 하고 내가 팀을 꾸리던가 해야지 원.’
이쪽으로 돌아온 이후, 정명은 약간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 이룩했던 것들을 다시 이루고 싶어 했고, 과거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하루에 14시간씩 얼굴을 맞대며 희로애락을 공유했던 팀원들과 다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우승을 한 날이라서 그런가. 오늘따라 예전 애들 생각이 많이 나네.’
정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내 핸드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유정명.”
“....무슨 일인데?”
“어? 그냥 심심해서 전화 해 봤어.”
“아이 씨, 이게 진짜 아침부터...너 때문에 30분 일찍 일어났잖아!”
정명의 전화를 받은 것은 에리였다.
예전에는 친한 친구 이상의 사이였지만, 이제는 조금 어색한 관계가 된 애 딸린 유부녀.
정명은 과거에서 쿠론과 조금 어색하고 에리와 무척 친했는데,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정명이야? 나도 정명이랑 통화하고 싶어. 핸드폰 나 줘, 나 줘!’
‘엄마 바쁘니까 저리 가 있어.’
핸드폰 너머에서 쿠론의 칭얼대는 목소리가 들리며 연결이 끊어졌다.
정명은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화만 돋울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어. 혼자서는 너무 공허하다. 개라도 키워야 하나...’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종종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애완동물을 키우거나 하기도 한다.
때문에 정명은 고양이를 키울까 개를 키울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차라리 인형을 산다던가...”
술이 알딸딸하게 취한 정명은 그냥 나오는대로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저 아줌마나 꼬셔봐야겠다.”
혼자 중얼거리던 정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실에서 잠들었고, 덕분에 그 다음 날.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또다시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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