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만남 (3) >
덜컥!
정명이 자판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음료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금발의 꼬마는 정명이 도와줬음에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저 아직 뭐 마실지 말 안 했는데요?”
“그랬나?”
정명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나온 음료수를 꼬마에게 건넸다.
“어차피 이거 마시려고 했잖아? 사과 맛 주스.”
“....네, 그렇긴 한데요....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마법사거든. 다 알아.”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꼬마는 별 미친놈 다 봤다는 표정을 지었으므로, 정명은 급하게 멘트를 수습했다.
“농담이고, 너 쿠론 맞지? 에리한테 이야기 자주 들었어.”
“어....네, 맞아요. 혹시 엄마 친구분이신가요?”
“응, 그렇지. 친구야.”
“으음...그런가요.”
정명의 대답에도 쿠론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낯선 사람하고 말 오래 섞지 말라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듯 했다.
“못 믿는 구나?”
“.....”
“자, 들어 봐. 에리는 사격장에서 총을 쏘는 취미가 있지. 그리고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고 또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찬 맥주 마시는 걸 하루의 낙으로 여기지. 어때?”
“음...네.”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잘 알아. 너는 퍼즐 맞추는 걸 좋아하잖아. 양파가 섞여 있는 고기반찬을 좋아하고 엄마 무릎에 앉아 있는 것을 제일 좋아해. 내 말이 맞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 정도면 대단히 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쿠론은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 에리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경계를 조금 풀었다.
“정말 엄마 친구분 맞으신가 보네요. 그 얘기가 다 맞아요! 딱 한 가지만 빼면요.”
“틀린 게 있다고? 그럴리가...뭔데?”
쿠론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는 애가 아니거든요. 다 컸어요. 어른과 같은 고등 사고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엄마 무릎에 앉는 건 이제 졸업 했어요.”
‘퍽이나 졸업했겠다.’
정명이 이곳으로 오기 전, 쿠론은 나이를 먹고도 엄마 무릎에 앉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에리가 징그럽다며 저리 좀 가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안했던 쿠론이었기에 정명은 이 꼬마가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아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엄마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있어?”
“엄마는 바빠요. 중요한 경기가 있대요.”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쿠론은 분위기가 무척 달라져 있었다.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는 전혀 없어지고 평범한 꼬마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정명은 이쪽으로 되돌아와 기존에 알고 있던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바뀐 것은 쿠론이 처음이었다.
‘흠,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 볼까? 쿠론이 관심 있어 할 만 한 것으로...’
정명은 쿠론이 좋아할만한 이야기 주제를 적당히 생각해냈고, 정명이 이야기를 리드하자 혼자 있어서 심심했던 쿠론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이야기 들었어. 퍼즐 맞추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 난 500개짜리도 엄청 어려워서 포기했는데.”
“저는 1000피스짜리도 여러 번 맞춰봤는걸요.”
“와, 정말? 대단하다!”
“흐흥, 그 정도야 뭐. 500피스 정도는 별 것 아니에요.”
이야기에 적당히 호응하며 비행기를 태워주자 쿠론의 경계가 더욱 풀렸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느낀 정명은 슬슬 ‘작업’에 들어갈 타이밍을 잡기 시작했다.
“요번에 엄마를 졸라서 2000피스짜리 퍼즐을 샀어요. 그런데 이건 조금 힘들어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러니? 그럼 내가 조금 도와줄 수 있는데.”
“네? 퍼즐 잘 못 하신다면서요?”
“내가 사실 마법사였거든. 네 머리를 조금 더 좋게 만들어 줄게.”
“하아...아직도 그 소리에요?”
쿠론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쌍욕이 튀어나왔을 텐데 한숨 정도로 끝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성격이 변하긴 변한 듯 했다.
“밑져야 본전이지. 자, 내 손을 잡아봐. 금방 끝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복도는 지금도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이상한 짓을 당할 걱정은 없다.
쿠론은 한숨을 쉬며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정명은 ‘이제 당신의 머리가 좀 더 좋아집니다...’ 따위의 헛소리를 하며 미분배 되어있던 스탯을 우다다다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이 제한 때문에 송하니처럼 더 이상 스탯을 올릴 수 없다는 말이 떴고, 정명은 맞잡은 손을 뗐다.
“끝이에요?”
“끝이야”
“에이, 뭐야.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이제 산타 믿을 나이는 지났어요.”
“진짜거든? 바로 가서 살펴봐. 머리가 좀 더 빨리 돌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대신 오늘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그러면 능력이 사라지거든.”
“네, 네. 알았어요. 한 번만 속아 줄게요. 그럼 저 가봐야 해서.”
“응, 그래. 안녕!”
쿠론과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던 정명은 잠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쿠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에리가 나오자마자 쿠론은 쪼르르 달려가서 에리에게 안겼다.
‘엄마에게서 졸업했다고 하더니 역시 아직 애군.’
그렇게 쿠론과의 첫 만남이 끝났다.
..........
“으아, 다음 경기는 어떡하지? 다른 팀도 아니고 중국 팀이 상대인데!”
“어차피 이번 경기에서 져도 2위로 조별리그 통과잖아. 마음 편하게 먹어.”
월드 챔피언십이 시작된 뒤로 몇 주가 지났다.
정명이 있는 팀인 ATX는 다른 사람들의 예상보다 꽤 잘하고 있었다.
4승 1패로 조별리그 통과를 일찌감치 확정지은 것이다.
때문에 팀원들은 다음 경기가 걱정된다 징징거리면서도 한층 여유를 갖고 다른 팀들의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BIT가 올라오겠지? 그동안 보여줬던 게 있는데.”
“그렇겠지. 솔직히 ETH는 월챔 올라온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돼. 그 실력으로 8강은 좀 무리지.”
일찌감치 조별리그 진출자가 정해진 다른 조와는 달리, D조는 8강 진출을 위하여엎치락뒤치락하며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팀원들이 말하는 BIT는 유럽의 1위 팀이었다.
시차적응이 잘 안 되었는지 초반에는 연패를 거듭하더니 컨디션을 되찾자마자 연승행진을 벌이고 있는 그런 팀이었고, 그와 순위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ETH는 북미에서 3위로 겨우 진출한 팀이자 에리가 속해있는 그런 팀이었다.
“정명아, 네 생각은 어때?”
“응? 나?”
“어, 지금까지 네가 예측한 건 적중률 100% 였잖아. 이번에는 어떨까 해서.”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든다.
정명은 참시 고민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난 ETH가 이길 거 같아.”
“에이, 여자만 있는 팀이라고 너무 점수를 후하게 주는 거 아냐? 정명이 이제 보니 완전히 바람둥이였네.”
“하하, 아냐. 진짜로 실력만 보고 말 하는 거야.”
“근거는?”
“내 머리.”
“좋아, 그럼 내기할까? 5만원빵 어때?”
정명은 ETH가 이긴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팀원들이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에리가 있는 팀은 여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게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실력은 평범했으니까.
때문에 수많은 전문가들은 BIT가 ETH를 꺾고 8강에 진출할 것으로 내다보고는 했다.
‘확실히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줘야....’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쉽다.
정명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정명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정명! 너 찾아온 사람이 있어!”
“응? 나?”
“엄청 미인이더라. 이야, 우리 연습하고 있을 때 빨빨거리면서 열심히 돌아다니더니 벌써 한명 꼬셨구나?”
그 말에 팀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심지어 솔랭을 돌리던 팀원들까지 슬쩍슬쩍 시선을 던졌다.
“뭐? 정말? 미인이라고?”
“어. 그것도 금발 미인이야.”
“이런 미친, 진짜? 와, 나 오늘부터 영어 배운다.”
“쯧쯧, 네 경우에는 영어가 문제가 아니잖아?”
팀원들이 정명의 어깨를 격하게 치며 부러움을 표현 했지만 정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누군지 알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미인이긴 하지. 별로 의미는 없지만.’
정명은 생각하며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연습실의 입구에서는 한 꼬마가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안녕. 또 만났네?”
웃으며 인사했지만 쿠론은 정명을 보자마자 정명의 손을 잡았다.
“저기요, 마법사님!”
“응? 마법사?”
“우리 엄마한테도 마법을 걸어주세요!”
.....
잠시 뒤.
정명은 쿠론과 함께 근처의 한 건물로 들어갔다.
ETH의 연습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쿠론은 연습실로 가는 동안 조잘조잘 열심히 떠들었다.
“저 그 이후로 퍼즐 엄청 쉽게 맞췄어요. 학교에서도 평소보다 시험을 엄청 잘 쳤고요. 정말 머리가 좋아진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그냥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마법사셨네요?”
“그거 잘 됐구나.”
“그래서 말인데 엄마한테도 마법을 좀 걸어주셨음 해요. 요즘 ETH의 성적이 되게 안 좋거든요. 엄마가 이번에도 떨어지면 더 좁은 집으로 가야할지도 모른댔어요.”
“엄마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고?”
“아뇨, 그건 아닌데 술먹고 혼자 주절거리는 거 들었어요. 요즘 힘들대요.”
“아 그래.”
쿠론은 자주 이곳에 오는지 길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연습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비밀번호를 틱틱틱 누르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도와줄 사람도 데려왔어요!”
그 말에 연습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입구 쪽으로 쏠렸다.
북미에서 3위로 진출한 팀 ETH.
그 팀은 다섯 명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되어있는 팀이었다.
“안녕하세요. 영상통화에서 종종 뵈었죠?”
“이게 누구야, 정명씨!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기 월챔 우승 후보가 있다고 해서 정찰 왔어요.”
“아하하하!”
정명은 에리 외에 다른 팀원들과도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동안 영상통화를 하며 ETH의 다른 팀원들과도 조금씩 얘기를 나눴으니까.
중요한 경기 전에 손님이 찾아왔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진행했던 연습경기에서 정명이 워낙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명이 별다른 커리어가 없음에도 ETH 사람들은 정명을 엄청난 천재라 생각하고 있었고 이번 경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물었다.
“이번 픽밴이 진짜 고민인데....숨겨놓은 캐릭터 뭐 없어?”
“숨겨놓은 캐릭터는 아닌데 다음 경기에서는 2:1을 버틸 수 있는 캐릭터를 조금 익혀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쪽에서 라인스왑을 걸 가능성이 정말로 높거든요.”
“어, 정말? 아으...큰일났네...”
특히 정명에게 솔로킬을 여러 번 당한 경험이 있는 ETH의 탑 라이너 이브는 어떻게든 팁이라도 하나 얻어 보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그렇게 시끌벅적한 가운데서도 묵묵히 입을 닫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에리! 정명이 원래 미드라이너였다는데 물어볼 거 없어?”
“난 됐으니까 너희들 끼리 놀아.”
반응이 냉랭하다.
이브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신 사과했다.
“저 녀석 성격이 조금 까칠해서. 이해 좀 해줘.”
“괜찮아요. 경기 전에는 모두 날카로워지는 법이니까요.”
그 후, 정명은 전략에 대해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천천히 연습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대로라면 BIT에게 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차이가 이정도로 나면 진짜 힘들겠는데. 그래도 눈빛은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때, 누군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쿠론이 입을 벙긋거리며 정명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입모양을 읽어보니 ‘마법은?’ 하면서 졸라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명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에리의 의자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리를 포함한 타 팀은 다른 팀과 연습경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 여기에서 말인데요.”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아 네.”
말을 걸자마자 가시 돋친 듯 짜증을 낸다.
그것은 마치 쿠론의 전성기시절 모습을 보는 듯 했는데, 정명은 쿠론이 누굴 보고그렇게 컸는지 그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훈수 두는 건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정명은 에리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로 했다.
“지금 라인을 좀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지금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면 딱 정글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내 플레이는 내가 알아서 해.”
에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대포 미니언을 먹기 위해 카드맨을 이동시켰다. 라인 절반을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부시에서 상대방의 수도승이 튀어나왔다.
-이쿠!
“이런 개 같은!”
점멸을 사용했지만 상대방도 점멸을 사용하여 카드맨을 뒤로 차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태엽 로봇의 궁극기에 에리는 깔끔하게 킬을 내줬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거봐요.”
“이런 씨... 방해되니까 입 좀 닫아줄래?”
“이번에는 바로 라인에 복귀하지 말고 궁극기를 써서 탑 라인을 노려봐요. 분명 킬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에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정명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닌, 갱킹에서 실패하면 패드립이라도 쳐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흥.”
며칠 후.
그 후로도 할일이 없었던 정명은 ETH의 연습실에 꽤 자주 놀러왔다.
그리고 헤어질 때면 꼭 에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내일 경기 잘 하세요. 응원할게요.”
“....그래.”
그리고 다음 날.
조별리그의 마지막 경기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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