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만남 (1) >
정명이 솔로킬을 따던 그 때, 연습실에 한 남자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1군 팀을 맡고 있는 다른 코치였다.
“감독님! 지금 TBM에서 연락 왔습니다. 게임 바로 할 수 있다는데요.”
“어, 그래? 그럼 이 연습게임은 여기까지 하자. 하도 약속을 어기는 애들이니까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경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1군 선수들은 북미팀과의 연습을 위해 방에서 나가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2군 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정명은 여기서 더있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충 분위기 파악은 됐다. 포인트도 어느 정도 모았고, 이 구질구질한 곳에 더 있을 필요 없겠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정명은 곧바로 감독과의 면담을 신청했고 곧바로 감독과 함께 감독의 방으로 들어갔다.
닭장과도 같은 연습생의 숙소와는 달리, 감독의 방은 꽤 컸다.
“뭐? 팀에서 나가겠다고?”
“예. 아무리 제가 배우는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월급도 못 받고 팀에 있는 건 조금 구시대적인 것 같아서요.”
정명이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자 감독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감독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서랍에서 종이 한 뭉텅이를 꺼냈다. 정명이 슬쩍 보니 팀에 들어오고자 하는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의 이력서 뭉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이력서네요. 그런데 요즘도 이력서를 종이로 받나요?”
“그건 자네가 알 거 없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 말고도 들어올 사람은 많다는 거야.”
정명이 이력서로 슬쩍 눈을 돌렸다. 이력서에는 뽑아만 주신다면 팀을 우승으로 이끌겠습니다와 같은 포부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정명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프로게이머를 하겠다고 지원하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사람은 극소수의 사람뿐이죠.”
“푸핫, 그리고 네가 그 사람이라는 거냐?”
“예. 아까 경기 보셨으면 대충 아실 것 같은데요. 그 이력서를 다 뒤져보셔도 저만한 사람 찾기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감독과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감독은 한숨을 후 내뱉으며 이력서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 네 말대로 방금처럼만 해 준다면야 멤버 교체 없이 계속 레드 팀에 있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거기서 더 잘한다면 블루 팀으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이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어요.”
“너무 자만하는구나. 누가 보면 월챔 나가서 3번쯤 우승한 선수인 줄 알겠어!”
감독이 정명을 비난했지만 정명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감독도, 정명도.
결국 감독은 정명에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그래, 가라 가. 안 잡는다. 너에게는 무척 실망했다.”
계약서도 안 쓰고 활동했으니 계약해지를 하고 뭐고 할 것도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정명은 곧바로 짐을 챙겨 팀을 나왔고 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뭐? 팀을 나간다고? 새 팀원 들어와서 짤리는거야?”
“짤리는 거 아니야. 그냥 돈도 못 받고 이러는 게 짜증나서.”
“그건 어쩔 수 없잖아. 팀의 사정도 넉넉지 않다고 하는데...”
“알 게 뭐야. 그 정도 돈도 없으면 애초부터 팀을 만들지 말던가.”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정명은 팀에서 나왔다.
‘잘 있어라. 난 더 좋은 곳으로 간다. 내 실력을 인정해주는 곳으로.’
......
팀에서 나온 다음 날.
이제는 더 이상 연습실에 나가지 않기에 정명은 늦잠을 잘 수 있었고,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난 정명은 일어나자마자 팬티바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기 때문이었다.
[읽지 않은 메일 8개]
‘4개는 씹혔네. 내가 메일 12개쯤 보낸 것 같은데.’
북미 팀에 들어가려면 또다시 2부 리그 팀에 들어가야한다.
그것이 조금 자존심 상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으므로 정명은 마음을 굳게 먹고 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담당자가 부재중입니다.]
[자동 응답 메일입니다.]
[지원 감사합니다. 하지만....]
메일을 3개 정도 열어봤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다.
정명이 처음 들어갔던 OMA라는 2부 리그 구단 또한 지금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정명은 찝찝한 기분으로 메일을 계속 열었다.
[죄송하지만 새로 선수를 뽑을 계획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경력을 좀 더 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
정명은 눈을 크게 뜬 채, 메일을 끝까지 열었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습니다.]
‘......망했다.’
메일을 끝까지 읽었음에도, 받아주겠다는 팀이 단 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정명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정명은 터덜터덜 PC방으로 향했다.
.......
그 후, 며칠이 지났다.
PC방으로 가던 정명은 단톡방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명아. 프로게이머 생활 어때?
-뭘 물어봐. 개 빡세겠지. 그보다 TV에는 언제 나와? 슬슬 나올 때 되지 않았나?
35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의 멤버는 정명이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친한 척 말을 걸었지만, 정명으로써는 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친하다는 듯 말을 거니 정말로 어색했다.
-근데 내일 학교 나오냐?
“학교?”
-맨날 빠지더니 이젠 안 나오는 거야?
‘아직 학교도 자퇴 안 했다니, 이런...’
지금 정명의 나이는 고3.
팀에서 나온 지금 학교를 갈수도 있었지만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고3이야 입시준비를 위해 올인 하는 상황이고 자신이 가봐야 잠 자는 것 외에는 별 다르게 할 게 없으니까.
때문에 정명은 학교를 가는 대신 PC방으로 출근했다.
‘며칠 째 PC방 출근이라니, 백수가 따로 없구만.’
정명이 팀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모님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침에 안 나가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일부러 나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PC방. 사실 다른 데 갈 곳이 없기는 했다.
그리고 오후 2시쯤 되면 정명의 옆에는 언제나 꼬마소녀가 옆에 앉아 있었다.
“오빠 솔직히 말해바라. 일 없제? 빠나나우유 하나 사주까?”
“이게 진짜. 백수 아니거든? 잠깐 쉬고 있는 거거든?”
“근데 왜 맨날 여기 있는데?”
“너도 맨날 여기 있잖아. 그럼 너도 백수냐?”
“어,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정명의 궤변에도 하니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렸다.
정명은 그런 하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하니를 옆에 앉히며 솔로랭크를 돌리기시작했고, 또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명이 프로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며 일주일 만에 PC방의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커뮤니티 언벤에 그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정명은 이미 커뮤니티에서도 유명해져있었다.
[야 지금 아자토스 관전 떴다. 보러가자 ㄱㄱㄱㄱ]
?그게 누군데?
?모름? 요즘 뜨는 아마 고수 있잖음. 이미 프로도 엿 발렸음.
?아마면 ATX에서 영입했으면 좋겠다. 요즘 탑 라이너 상태가 시원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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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정명은 오늘 학교를 자퇴하기 위해 학교에 들렀고, 그 때문에 PC방에 출근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그런데 PC방에 도착하니 하니가 아이스크림 와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와플은 PC방에서 파는 제일 비싼 간식이었다.
그리고 하니는 정명을 발견하자마자 오도도 달려왔다.
“오빠야, 아까 이쁜이 언니가 오빠 찾았었다!”
“이쁜이 언니? 그게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나한테 오빠 아냐고 물어보든데?”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나랑 엄청 친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거 사주드라.”
송하니는 그렇게 말하며 와플을 와작와작 씹었다. 아무리 봐도 이쁜이 언니라는 사람이 뇌물로 사준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명은 금방 이쁜이 언니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아 여기 계셨군요! 찾아다녔습니다. 아자토스라는 아이디를 쓰시는 분 맞으시죠?”
“네. 그런데 누구신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명함을 건넸다.
[ATX 이스포츠 이예은 대리]
‘화장이 짙네. 이래서 송하니가 이쁜이 언니라고 한 건가?’
곧바로 피시방에서 팀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팀에서는 미인계랍시고 젊은 여자를 보냈지만 다른 고등학생과 달리 정명은 눈 꿈쩍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저희 구단은 업계에서 손꼽힐 만큼의 지원과....”
“아니, 잠깐. 잠깐만요.”
“네?”
“서론은 됐어요. 이미 많이 들었으니까. 예은씨가 오기 전에 이미 3팀이나 다녀간 거 알아요?”
그 말에 이예은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 벌써 3팀이나요? 대체 어떤 팀들이....”
“그러니까 조건을 먼저 꺼내 봐요. 알 만한 사람끼리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
그리고 10분 후, 정명을 열심히 설득하던 이예은이 떠났다.
슬쩍 눈치를 보던 송하니는 예은이 떠나자마자 정명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머야, 저 언니 갠차나 보이던데 찼나?”
“차긴 뭘 차. 처음 보는 사람인데.”
“에엥? 저 이쁜이 언니 오빠야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 아니었나?”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이쁜이 언니도 아니다. 그보다 대체 뭔 말을 하는 거냐? 이게 발랑 까져가지고.”
며칠 뒤.
정명은 이쁜이 언니가 있는 팀인, ATX에 합류하게 되었다.
조건은 연봉 6천에 출전 보장. 컨택이 들어온 팀 중에 조건이 가장 좋았다.
다만 지금은 리그가 이미 시작되었기에 경기를 뛸 수는 없고, 다음 시즌에 현 탑 라이너의 계약이 만료되면 그 때부터 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대망의 첫 출근 날.
정명은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침부터 연습실이 조금 소란스럽다.
“시바 이게 대체 머라는 거여 양키새끼들 진짜...”
“야, 너 토익 985점이라며. 네가 대신 말 해보면 안 돼?”
“아...제가 듣기는 잘 하는데 스피킹은 잘 안 돼서요.”
뭐가 그리 바쁜지 정명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했다.
정명은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며 곧장 감독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유정명입니다.”
“어, 그래. 너 왔구나. 지금 애들이 정신 없어서 그런데 일만 끝내고 금방 인사 시켜줄게.”
“무슨 일 있나요? 연습실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아, 그게 우리도 슬슬 북미 팀이랑 연습 해 보려고 하거든.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서. 말이야.”
게임의 초창기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사실 처음에는 한국 팀의 실력보다 북미 팀의 실력이 월등히 좋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한국 팀이 북미 팀에게 연습 좀 해달라고 구걸하고 있을 시기였는데, 한국 팀들은 북미 팀의 거만한 태도 때문에 많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잘 안 되나요? 북미 팀이 또 꼬장부리고 있나보죠?”
“그게...그것보다는 말이 잘 안 통해서. 본사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애쓰고 있긴 한데 말이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다고 하네.”
“그럼 제가 한번 말해 볼까요? 제가 영어 좀 하는데.”
“정명이 네가? 너 지금 고3이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 북미팀 사람하고 말하고 있는 직원이 S대 나왔다던데.”
“미국에 사는 초등학생도 나이는 어리지만 영어 잘 합니다.”
“어....그래. 맞는 말이네. 미국에 좀 살았었나봐? 영어 잘하는 사람이 수고 좀 해주면 우리야 고맙지.”
감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명을 한쪽 구석으로 안내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S대 나왔다는 고학력자 직원이 쩔쩔 매며 모니터 너머의 상대와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전에 봤던 이쁜이 언니네. 여기 있는 거 보니 앞으로 자주 볼 지도 모르겠어.’
정명은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장 스킬이 높아서 예뻐 보이는 이예은과 달리, 모니터 너머에 있는 사람은 ‘진짜 이쁜이 언니’였다.
‘이거 참...반갑습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젊어지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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