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큰 그림 (3) >
“프로에 입문한 계기가...바둑에서는 이미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라고요?”
“네. 이미 정점을 찍었는데 더 이상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죠. 저도 이 게임 엄청 재미있게 하고 있었거든요.”
무대에 오르기 전.
팀 오리엔탈의 오더, 라이언이 한국에서 온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인터뷰와 달리 리포터가 한국어밖에 못 하므로 통역과정을 거쳐야 하는 불편한 인터뷰였다. 그런데도 라이언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TV에서 본 것처럼 정말 미인이시네요. 감탄했습니다.”
“아....감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미인 리포터로 유명한 조이슬 리포터였으니까.
원래는 바쁘다며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인터뷰 요청을 뒤늦게 받아들인 이유가 조금 궁색하게도 조이슬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이유와는 달리, 인터뷰는 꽤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승률은...거의 80%정도 된다고 봅니다. 운 좋으면 3:0, 아니면 3:1 정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확신하시는 듯 말씀하시네요?”
“그렇죠. NHG의 오더, 유정명이 네 수 앞을 본다면 저는 다섯 수 앞을 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우승을 확신하는 이유죠.”
한국의 팀이 한 수 아래라고 단정 짓는 라이언의 말투에, 조은정이 조금 발끈했다.
“쉽지 않을 거예요. NHG는 그동안의 역대 팀과 비교해 봐도 최강이라 평가받는 팀이니까요.”
조은정은 오기가 생겼다는 듯 말했지만, 라이언은 별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압니다. 아주 잘 알죠. 그래서 제가 프로게이머 계에 들어온 겁니다.”
“네?”
“제가 천재라고 떠받들리는 사람을 보면 꼭 꺾어놔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시간이 없다는 코치의 신호를 끝으로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준비 해.”
“알았습니다.”
코치는 자잘한 뒤치다꺼리나 해줄 뿐, 전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라이언이 다 알아서 하니까.
학생 40명이 똘똘 뭉쳐봤자 전공지식에서 교수를 이길 수는 없듯, 코치가 밤새 전략을 고민 해봤자 라이언에게 쉽게 논파되고는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었음에도 코치가 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힘 내.”
그렇게 부스로 들어가자마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해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034년도 월드챔피언십 경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선수들이 인베이드 방지를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요한 경기이기 때문인지 서로 인베이드 경계만 할 뿐, 양쪽 모두 무리해서 들어오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천재 중의 천재? 푸하하, 그래. 얼마나 잘 두나 한 번 보자!’
그러나 아무리 운영의 천재인 라이언이라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NHG 선수들은 게임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피지컬이 무척이나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솔로킬을 내 주면 한 점 깔고 시작하는 것 정도. 잘 버티면 백을 잡고 시작하는 정도의 불리함이겠지.’
특히 미드라이너인 유정명은 거의 게이머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피지컬을 갖고 있었기에, 가장 경계해야할 게이머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라이언은 그것도 전부 고려해서 판을 짜 놨다.
“더 들어가지 마. 그냥 맞파밍 구도만 만들고 있어.”
“OK.”
팀 오리엔탈의 미드라이너는 나름대로 중국 최고의 미드라이너라고 불리는 에이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정명과 비교하자면 피지컬, 운영, 캐릭터 숙련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때문에 라이언은 그에게 초반에 강력한 캐릭터를 쥐여 줬다. 그냥 킬만 내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싸엘레사 피리비
-트롤 선수, 아이디랑은 다르게 무척 안정적인 라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네요. CS도 전혀 밀리지 않고요.
-이렇게 흘러가면 NHG에게 불리한데요! 오리엔탈에는 운영에서 인간계의 정점을 찍었다고 불리는 선수가 있거든요!
한국 해설들이 우려했지만 NHG는 라인전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다.
라인전을 무사히 넘기고 경기가 운영 싸움으로 흘러가자, 오리엔탈의 선수들도 무척이나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휴, 다행이다. 운영싸움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불리할 거 없지!”
“맞아. 바둑 세계챔피언인 리더가 있는데 뭐. 지금쯤이면 이미 넥서스 밀어버리는 수까지 읽지 않았을까?”
다른 팀원들이 킥킥댔지만, 막상 라이언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엄청 잘하네. 아니, 내 예상보다 더.’
과거의 영상을 봤을 때, 라이언은 정명의 운영이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막상 붙어보니 전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라이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라이언은 오히려 씩 웃었다.
‘바둑 결승전도 이것보다는 쉬웠던 것 같은데...좋아, 이렇게 되면 누가 먼저 실수하는가의 싸움이다.’
-차석진 선수, 너무 무리하게 시야장악 하다가 끊기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지금 송하니의 텔레포트도 60초가량 남았거든요?
-맞습니다. 방랑 마법사도 아직 덜 컸고, 지금 한타 열리면 무조건 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상대측에서 빈틈을 내보였다. NHG의 서포터가 드래곤 근처의 시야를 얻고자 무리하게 페이스체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라이언의 눈이 빛났다.
“저거 잡는다. 어떻게든 따 내고, 드래곤까지 접수한다.”
결국 오리엔탈의 탑 라이너까지 텔레포트를 써서 내려온 끝에, 차석진의 지옥 간수가 허무하게 잡혔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경기에서는 한 번의 슈퍼플레이보다 한 번의 작은 실수가 경기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서포터를 잡아낸 오리엔탈은 곧이어 드래곤 사냥을 시작했다.
-아, 이건 아깝네요. 이번에 하필 또 레드 드래곤인데요.
-그런데 수도승 대신 다른 사람이 좀 맞아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정글러 피가 너무 없는데요.
그리고 그 순간, 시야의 사각에서 탐험가의 궁극기가 날아왔다.
[레드 팀이 드래곤을 처치했습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아니 이게 뭔가요! 드래곤 스틸!
-쿠론 선수가 한 건 해냅니다!
죽 쒀서 개 준 상황을 맞은 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
“오, 진짜네. 네가 말한 타이밍에 궁 날리니까 딱 됐어. 운 좋았다.”
“운이라니? 석진이한테 무리하게 시야장악 시킨 것부터 궁 날린 것까지, 전부 설계였거든?”
“개소리.”
“오빠. 그건 내가 봐도 좀 무리수인듯.”
그 이후로 라이언은 멘탈이 조금 흔들렸는지 실수가 잦아졌고, 정명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악어 이리 와봐! 나랑 궁 타고 뒤로 들어가자!”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라이언 저거, 운영은 잘 해도 피지컬은 별로인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그게 우리가 질 수 없는 이유지!”
한국 선수들의 활약에, 해설들은 대놓고 편파해설을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승입니다! 역시 한국 팀!
-남은 시간 30초! 곧바로 달리면 넥서스 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끝났습니다! 한국의 1위 팀이 중국의 1위 팀에게 첫 패배를 안겨줍니다!
전승으로 올라온 팀vs전승으로 올라온 팀의 첫 대결은 NHG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오리엔탈이 패승승승으로 우승한다 해도, 전승 우승기록은 일단 물 건너간 기록이 된 것이다.
경기가 끝나자, NHG의 선수들은 1경기를 마친 소감을 짧게 말했다.
“역시 대단하네. 여기까지 올라온 팀 다워.”
“응. 생각보다 잘 해.”
첫 경기에 승리했지만 다들 침착하다. 한 번의 승리에 일희일비 할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정명은 뒤늦게 부스로 들어온 에리와 눈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덕분에 쉽게 이겼습니다.”
“헷, 너희들이 잘 한 거지. 나는 응원밖에 할 게 없네. 다음 경기도 힘 내!”
에리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명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번 경기를 이기는 데는 에리의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미어스 에리]
판단력 (95/95)
*전설의 코치
-모든 팀원들의 스탯이 +1 상승합니다. 단, 사용자의 경우에는 판단력만 +1 상승합니다.
전설의 코치로 승급한 에리 덕분에 판단력이 +1 상승했다.
판단력이 99인 라이언보다 한 단계 높은 수치인 것이다.
‘확실히 달라. 99랑 100은...’
99와 100.
딱 1 차이지만, 정명은 갑자기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나게 상승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경기에서도 라이언은 탁월한 운영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그림을 아주 잘 보고 있어요.
-바둑으로 말하자면 정말 묘수입니다!
-라이언의 말버릇대로, 플레이를 하는 걸 보면 정말 다섯 수 앞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이언은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플레이어였다. 바둑에서 1인자를 달성하고 와서 그런지, 전체적인 그림을 잘 보고 특히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의 말버릇대로, 5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판단력 100을 달성한 정명은 5.5수. 많으면 6수 이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10 수 이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가 존재했다.
-NHG, 백작 근처의 핑키와드를 지우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게 거의 10분 넘게 지워지지 않고 있거든요?
-정명선수 답지 않게 주도권을 너무 내줬어요. 도저히 지우러 갈 틈이 안 나옵니다.
-아 제발 저걸 빨리 지웠으면 좋겠는데요. 덕분에 오리엔탈에서 시야체크를 너무원활하게 하고 있어요!
해설자들이 안타까워하지만, 당연하게도 선수들에게 들릴 리 없다.
하지만 운 좋게도 와드를 지우러 갈 타이밍이 나왔다.
“형, 지금 와드 지우면 될 것 같은데요?”
“그냥 두지 뭐. 무리해서 지우러 갈 필요 없어.”
“네? 그냥 둔다고요?”
“어. 지우러 가다가 짤리면 손해니까.”
사실 정명 본인도 조금 의아한 판단이었지만, 막연하게 그려지는 큰 그림이 있었기에 그냥 밀어붙였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지만, 와드는 여전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와드 시야 밖에서 송하니의 가로등 도둑과 메테오의 붕대괴물이 벽을 넘었고, 쿠론의 보안관이 벽 뒤에서 지원사격을 했다.
3인 백작 시도였다.
-3인 백작! 들키지만 않으면 가능할 듯 보입니다!
-백작 앞에 오리엔탈이 박아 넣은 핑키와드가 있거든요. 근데 이걸로는 볼 수가 없죠! 벽을 넘어 갔는데!
와드가 없었다면 사람이 비어있는 것을 본 오리엔탈에서 바로 백작 체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리엔탈에선 백작 앞에 박혀있는 와드가 있기 때문에, NHG가 어디 부시에서 낚시를 하고 있나 보다 지레잠작하며 오히려 더 몸을 사렸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잘못된 정보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블루 팀에서 백작 오브젝트를 처치했습니다.]
-핑와를 안 지운 게 오히려 득이 됐어요!
-설마 이것까지 설계인 것은 아니겠죠?
-큭큭, 설마요.
“오, 역시 정명 오빠야! 설계 대단하다!”
“설계는 무슨. 운 좋게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거지.”
“운이라니, 진짜 설계 맞거든?”
“하, 이러다가 아까 네가 스킬 전부 못 맞춘 것도 설계라고 하겠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 됐잖아. 원딜러 살리려고 달려온 정글러까지 더블 킬 냈으니.”
“그거야 그렇지만...”
쿠론의 말을 자연스레 받아쳤지만, 사실 정명은 뜨끔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정명 본인도 자신의 실수가 이렇게 좋은 쪽으로 되돌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으음, 혹시 스킬 덕분인가?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 설계였나...’
정명은 판단력 100을 찍고 나온 스킬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의 한 수]
*사용 효과 : 경기 중, ####의 ####가 보입니다.
*발동 조건 : ####가 ####일 시.
*사용자가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을 온전히 읽을 수 없습니다.
‘대체 뭔 소리인지...설명이 다 지워져 있네.’
스킬의 설명도, 그 스킬이 적용되는 매커니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는 것 같기는 했다.
사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인 10수, 심지어 100수 앞을 내다보는 것이.
이것은 라이언처럼 큰 그림을 설계한다기보다는 미래 예지의 능력에 가까웠다.
-악수라고 판단했던 것이 묘수가 되었어요!
-기가 막힙니다! 운이 정말 따라주네요!
이상하다고 생각한 플레이도 결과적으로 보면 좋다.
때문에 라이언은 정명이 무언가 실수를 할 때마다 혹시 이것도 설계인가 하는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2경기 또한 NHG의 승리로 끝났고, 중국 팀이 허무하게 패배하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조용하네요. 도서관인 줄 알겠어요.”
“으으 짜증나. 내가 분위기 엄청 띄워놨는데. 저 분위기는 너무한 거 아냐?”
정명을 응원하는 소수의 팬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중국 팀의 패배에 언짢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툴툴대는 팀원들과 달리, 정명은 피식 웃었다.
“난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데?”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국 커뮤니티인 언벤에 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유정명입니다.]
현지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지만, 한국에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힘이 나네요.
꼭 우승하여 우승 트로피를 한국으로 가져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부스에서 앉아있는 인증샷을 찍어 올리자, 곧바로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 ???이거 진짜임?
? 사진 보면 진짠 거 같은데...지금 부스에서 이 글 올린 거? 미쳤다 진짴ㅋㅋㅋ? 이 세상의 정신력이 아니다...
? 미친, 공지로 올라감 ㅋㅋㅋㅋ정명이 올린 글은 언벤의 공지로 올라갔고 순식간에 조회수가 1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해설 또한 엄청나게 웃어댔다.
-정말 엄청난 여유네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쇼맨십이 참...이래서 인기 있구나 싶기도 하네요.
10분 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가 시작되었다.
3경기는 생각보다 팽팽했고, 상당한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경기는 모든 팬들의 기억에 오래 각인될, 최상급의 명 경기였다.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