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큰 그림 (2) >
베이징에 도착하자, 뿌연 안개가 일행을 맞아주기 시작한다.
정명은 아무리 맡아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공기를 마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경기장에는 산소마스크라도 쓰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심하다 심해.”
“헷. 그 정도 까지는....콜록. 콜록.”
폐가 좋지 않았던 에리는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조금씩 콜록거리고 있었고, 쿠론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걱정된다는 듯 에리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괜찮아? 병원 갈래?”
“아냐. 괜찮아.”
쿠론은 에리의 자그마한 기침에도 마음이 찢어진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저 자상함의 1/10만이라도 석진이에게 갔다면 이 팀이 좀 더 화기애애한 팀이 되었을 거라 확신했다.
‘흠, 근데 확실히 거지같긴 해. 차라리 그 아이템을 지금 사용하는 게 좋을 것도 같은데.’
정명은 중국에서 월챔을 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빌며, 아껴두었던 아이템을 사용했다.
[별부름]
*A등급 아이템
*일주일 동안 모든 팀원의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로 유지됩니다.
별부름이란 아이템은 단 하나 남아있던 A등급 선물상자를 열었을 때 나온 아이템이었다.
사실 정명은 상자를 열며 전력에 보탬이 되는 아이템을 기대했었지만 막상 열고 보니 A등급 아이템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아이템이 나왔기에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름 쓸만한 아이템인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건강이 최고라는 말도 있고.’
[아이템을 사용합니다.]
[팀원들의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로 유지됩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자마자 에리의 기침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코치인 에리 또한 ‘한 팀원’ 으로써 인정받았는지,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팀원들은 호텔에 곧바로 들어갔지만, 정명은 혼자 다른 길로 샜다. 카페이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들 먼저 들어 가. 난 일이 있어서...”
“일?”
“얼마 안 걸려. 10분이면 돼.”
그리고 카페에 들어선 정명은 카페 안쪽에서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소년을 찾을 수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이 소년은 몇 년 전. 정명이 중국 팀 XTC에서 활동할 때 같은 팀에있었던 게이머인 사오미였다.
“안녕! 형은 여전하네!”
“오랜만이다, 사오미. 요즘 뭐 하면서 지내? 다른 애들은 인터넷방송 BJ한다고 하던데.”
“나도 인터넷방송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근데 BJ는 아니고 관리직을 맡고 있지.”
“와, 진짜? 그 나이에 대단하네. 그거 경쟁률 진짜 엄청나다고 하던데. 비결이 뭐냐?”
그 말에, 사오미가 쑥스럽게 웃었다.
“뭐 비결이랄 것 까지는 없어. 회사 사장님의 애인이 되니까 입사는 물론이고 초고속으로 승진이 되더라고.”
“헉...”
왠지 몰랐으면 좋았을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사오미 또한 머쓱했는지 곧장 화제를 돌렸다.
“이번 결승전은 대단히 크게 열릴 거라고 하더라.”
“그래, 그런다고 들었다.”
“축하 이벤트에 인기 가수 샤미두도 나오고.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샤미두 알지? 중국에서 요즘 인기인 가수.”
“몰라. 우리나라 가수도 잘 몰라. 송하니랑 부스터 정도는 알지.”
정명의 말에, 사오미가 킥킥 웃었다.
“부스터를 안다니 그거 다행이네. 내가 회장님한테 이번 결승전 오프닝에서 부스터 공연 보고 싶다고 졸랐는데.”
“뭐야, 부스터를 섭외한 흑막이 너였다고? 그게 가능 해?”
“그 정도야 되지. 우리 회사가 월챔 메인 스폰서 중 하나인데. 그리고 뭐 따로 필요한 거 있으면 말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들어줄게.”
그 말을 들은 정명은 ‘역시 중국에서는 인맥이 최고인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감탄했다. 중국에서 악명 높은 꽌시 문화이지만, 이용해 먹을 때는 이보다 더 좋을 게 없는 것이다.
“그거 고맙네. 근데 기왕 부를 거면 송하니도 행사에 불러 줘. 이 녀석 휴일이면 빈둥빈둥 집에만 있거든.”
정명이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사오미는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 안 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번 리그 끝나면 음...우리 플랫폼에서 두 시간 정도만 방송 해줘. 송하니 단독 방송까지 들어가면 계약금으로 차 한대 뽑아 줄 수 있을걸?”
“이게 자기 마음대로 그게 되는 것처럼 말하네. 네가 회장님이냐?”
“누나한테 애교부리면서 조르면 다 되거든? 아, 근데 이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건 아니고.”
킥킥대며 웃던 사오미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해. 그 라이언이라는 사람, 진짜 천재야.”
“됐다. 여기에서 엄청 띄워주고 있는 것 같긴 하던데, 여기 사람들 허풍 심한 거 하루이틀 보냐?”
“아냐. 들리는 소문으로는 최근 연습경기 승률이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하더라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언제 졌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해. 모르긴몰라도 우리가 창단한 이래 지금이 제일 강할 거다.”
“......하. 그 소문에 외계인이 모인 팀이랑 괴물이 모인 팀, 두 팀이 붙는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그 소문이 진짜였던 거 같네. 아무튼 힘내. 응원할게.”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정명의 일정이 빡빡한 것을 알기에, 오래 잡아두지 않은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정명은 곧장 호텔로 돌아왔고, 그런 정명을 쿠론이 가장 먼저 맞아주었다.
그런데 쿠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방금 연습실로 들어온 정명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야, 너.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지 마. 그것도 성희롱이야.”
“흥, 성희롱은 네가 내 엉덩이 차고 다니는 게 성희롱이지. 그보다 너 바람피우고왔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 지금까지 비즈니스 하고 왔거든? 이게 다 다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야.”
“석진이가 다 불었어. 네가 카페에서 여자 만나고 있다고.”
‘차석진 이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급히 석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정명은 석진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걔가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여자는 아니다. 그보다 후원금 만들고 왔어. 이것도 다 리더로써의 일이지.”
“후원금?”
.........
베이징에 도착한지 며칠.
어느 새 결승전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팀원들은 결승전 대비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잠깐만, 다시 해 보자. 스킬 연계가 제대로 안 됐잖아.”
“응.”
연습실에서는 쿠론과 석진이 연습모드를 통해 스킬연계 반복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명은 그 모습을 보다가 잠시 연습실을 나왔다.
‘나도 이제 최종전을 준비해야겠군.’
지금 상황은 RPG게임으로 따지자면 보스룸 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스룸 전에서 플레이어는 마지막으로 들리는 상점에서 지금까지 모아놨던 골드를 다 쏟아 붓고 최상의 장비세팅으로 맞춰야 한다.
지금 정명이 처한 상황도 이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정명은 포인트고 뭐고 아끼지 말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모든 걸 다털어 넣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상급 상점에 입장합니다.]
리그에서 우승하면 상급 상점 입장권을 주고, 이걸 이용하여 상급 상점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었기에 그냥 써버렸다. 리그 우승이야, 이제는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점에 들어간 정명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쯧, 지금까지 번 돈 다 날리게 생겼군.’
[칼의 춤]
-10만 포인트
[호밍 미사일]
-30만 포인트
[너 내 동료가 돼라]
-25만 포인트
......
작정하고 버프 좀 받으려고 하니, 다들 하나같이 엄청나게 비싸다.
어찌나 비싼지 그동안 벌었던 포인트를 탈탈 털어 넣어도 부족할 듯 보였다.
그런데 정명은 그 중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오, 이건 오랜만에 보네.’
정명이 한 스킬을 발견하자마자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난 번 잘 써먹었던 스킬이었다.
[아레스의 창]
‘피지컬을 올려주는 스킬이지. 흠, 판단력 99을 피지컬 98로 대응한다? 뭐 그것도 나쁜 선택이 아닐 것 같기도...아니, 나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런데 스킬에 붙은 가격표를 보자마자 결심이 섰다. 이건 안 산다는 결심이.
*가격 : 40만 포인트
‘아 씨...이건 좀 아니잖아. 이렇게 비쌀 이유가 없는 스킬인데!’
무심코 욕이 나왔다. 기껏해야 한 번 쓰는 아이템인데 가격이 엄청났던 것이다.
‘맨 최상위에 있는 아이템답다고 해야 할지,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고 해야 할지.’
이건 이렇고 이건 저렇고, 어떤 것이 좋을지 엄격히 따지다보니 살 게 없었다.
기껏 포인트를 탕진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상점을 열고 보니 1포인트조차 쓰지 않게 되었고, 결국 정명은 아이템을 사서 포인트를 탕진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차라리 플랜 B로 가자. 지금 남은 포인트를 생각하면 20만 포인트 내에서 고르면 되겠어.’
이내 정명은 수많은 아이템 중 적당한 것을 하나 골랐다.
[보인다 보여]
*팀원의 숨겨진 실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숨겨진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가격 : 20만 포인트
‘이게 괜찮을 것 같다. 가격도 적당하고.’
결국 정명은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이템 구입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스탯을 올려버리기로.
[현재 능력치]
피지컬 (95/100)
정신력 (91/100)
오더 (91/100)
판단력 (95/100)
‘피지컬 아니면 판단력 중 하나를 99까지 올려야 하는데...’
피지컬은 조금 꺼려졌다.
피지컬로 이득을 보려면 라인전에서 찍어 누르거나 한타에서 슈퍼플레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건데, 그건 확률이 좀 낮으니까.
그에 반해 판단력을 올리면 일단 대등한 운영싸움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습게임으로 포인트 좀 벌면, 99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찍을 수 있겠네.’
아이템 구입을 마쳤으니 이제 상점에는 볼일이 없다.
하지만 상점에서 나가기 전, 정명은 상점 맨 아래에 있는 아이템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맨 아래에 있는 아이템은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 중 가장 비싼 아이템이었다.
[기도]
*아이템 설명 : ???
*효과 : ???
*가격 : 500만 포인트
‘대체 뭘까? 이건...’
상점에서 제일 비싼, 무려 500만 포인트짜리 아이템이었다.
정명은 이걸 사게 되는 순간은 있을까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500만 포인트면 시바, 내가 지금껏 번 포인트를 하나도 안 쓰고 모았어도 500만은 안 되겠다. 사라고 올려놓은 거 맞아?’
정명은 작게 불평하며 상점을 닫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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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챔피언십 결승전]
적을 쓰러트리십시오.
*보상 : 100만 포인트
‘간단하군. 하긴, 여기까지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다.’
결승전 당일.
엄청나게 큰 무대에서 팬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큰 무대임에도 빈 좌석이 거의 없이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시작하려면 멀었겠죠?”
“당연하지. 명색이 결승전인데 경기만 딱 하고 사람들 집에 보내겠어?”
결승전 오프닝 무대는 길다.
그리고 그 첫 타자는 중국의 인기 걸그룹 샤미두의 무대였는데, 선수들 또한 대기실의 TV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춤 잘 추네. 근데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냐?”
“음, 굳이 말하자면 주피터라는 한국 그룹 짝퉁 같아요.”
관중석의 팬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중국의 인기 그룹이라더니 그 말이 진짜인 듯 보였다.
샤미두는 두 곡 정도를 부른 뒤 무대에서 내려갔고, 곧이어 샤미두 다음으로 무대에 설 가수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올라온 그룹은 뭔가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올라온 그룹은 송하니와 같은 소속사에 있는 걸그룹, 부스터였기 때문이다.
부스터라는 그룹은 상당히 빛났다.
방금 올라왔던 샤미두라는 이상한 중국 걸그룹보다 훨씬 더.
하지만 중국에서의 인지도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샤미두보다는 조금 낮은 호응도를 보였다.
“저 녀석들, 중국사람 아니라고 저렇게 호응 안 해주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진짜 화날 것 같은데.”
“뭐, 중국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룹이니까...”
노래가 클라이막스로 가기 시작했음에도 팬들은 호응은커녕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다.
그런데 그 때, 무대 뒤편에서 특별 게스트가 등장했다.
-이봐요, 그렇게 계속 자리에 앉아 있을 거예요?
송하니를 알아본 팬들이 벌떡 일어섰다. 송하니는 중국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킨 주역 중 한명이었기에, 못 알아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송하니가 등장하자 쿠론이 심드렁한 척 하면서도 눈을 빛냈다.
“후배 위하는 마음도 좋은데, 저기서 힘 너무 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아서 잘 하겠지.”
“흥, 경기에서 헤롱헤롱하면 한 대 때려줄 거야.”
노래가 클라이막스로 들어가자 시상식 보는 것처럼 멀뚱멀뚱 있던 팬들 또한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노래, 퍼포먼스, 무대 장악력. 모든 면에서 샤미두와는 비교조차 미안한 압도적인 무대였다.
‘그냥 귀여운 얼굴로 뜬 건 아니었군. 확실히 잘하긴 잘 해.’
이내 무대에서 부스터를 도와주던 송하니는 금방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돌아왔다.
에리는 헉헉거리고 있는 하니에게 다가가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하니 노래 잘 부르더라. 엘프가 노래 부르는 줄 알았어.”
“헷, 이 정도야 뭐. 듣고 싶으면 말 해! 언니한테는 특별히 천원 받고 노래 한곡 불러줄 테니까.”
“무슨 코인 노래방이냐?”
긴장해있던 선수들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자. 여기에서 이기면 우리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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