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TAC 코스프레 (2) >
북미 팀의 경기가 끝난 날의 저녁.
에리가 정명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문 밖을 가리켰다.
“정명, 손님이 찾아왔는데?”
“손님? 저한테요?”
“조 추첨식에서 너랑 이야기 했던 사람이라고 전하면 알 거라고 하더라.”
“아, 그 사람....”
“알아?”
“네. 그 때 처음 본 사람이지만요. 월챔에서 떨어지고 기분 엄청 더러워져 있을 텐데, 나한테는 무슨 일이지?”
북미 선수가 정명을 찾아온 목적은 딱히 별거 없었다.
그는 지난 번 NAV의 코치처럼 자기변명을 하거나 걔네들이 사실 엄청 강해서 놀랐다던가 그런 하소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그 팀이랑 연습 게임 해 봤거든요. 연습 게임에서 실력을 숨길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별 필요 없는 경기는 작전상 버릴 수도 있지만, 하루 종일 하는 연습 경기는 그러기 힘드니까요.”
뭐가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정명을 찾아온 선수는 참 말이 많았다.
정명이 어떻게 말을 끝낼까 타이밍을 잡던 차에 쿠론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뭔 소리를 하나 싶어 슬쩍 들어보니 쿠론은 디즈니랜드를 가니마니 하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저 녀석은 디즈니랜드 못 가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요즘 왜 이렇게 디즈니랜드 타령을 해대?’
말이 길어지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정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뭐래?”
“그냥 허무하게 져서 아쉽다던데요. 뭐랄까, NAV의 코치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요즘 제가 하소연 들어주는 사람이 된 기분인데요?”
정명의 투덜거림에 에리가 쿡쿡 웃었다.
“그 만큼 네가 편하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맥이 끊겼잖아. 어디보지, TAC가 무슨 팀이라고 했더라...’
방으로 들어온 정명은 다시 자신의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타이완 어쌔신 크리드라는 팀에 대해서 적어 놓았던 것을 찾기 시작했다.
[TAC 코스프레?]
*TAC가 허접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 진짜 못 했던 건지, 다른 팀을 방심하게 만들 속임수였는지는 일반인인 나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다른 팀들을 모두 꺾고, 월챔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팬들 또한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았는지 최상위권에 있던 팀이 갑자기 실력이 떨어지면 ‘실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TAC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다.’ 라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그 이후로 한국 팀이 절치부심하여 그들에게 설욕전을 하기를 벼르고 있었지만,TAC는 월챔에서 우승하자마자 귀신같이 해체했다.
‘흠. 예컨대, 이번 한 번만 나온다는 거군.’
수첩을 보니 확실히 기억났다. 그들은 월챔에서 우승하여 주가를 확 올린 후, 그대로 은퇴해버렸다는 것을.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TAC에게 설욕전 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했는데, 다음 월챔을 앞두고 은퇴 발표가 나오자 맥이 다 빠져버렸다고.
‘한국 팀을 꺾고 우승한 유일한 팀....뭐 이렇게 기록되어 버리니까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했었지. 사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팀원들은 맛집을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희희낙락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쿠론과 쑥덕대던 석진은 정명에게 다가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형, TAC면 맛집 맞죠? 흐흐, 오랜만에 20분 서렌 받아내면 좋겠네요.”
“아니, 방심하지 마. 네 생각만큼 약한 팀이 아니다.”
“앗, 넵...”
정명이 정색하며 팀원들의 멘탈을 잡았다.
농담으로라도 ‘하하, 그렇지?’ 따위 소리를 하면 석진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것 같았으니까.
.....
그리고 다음 날.
팀원들과 함께 잠깐 외출했던 정명은 다음 번 상대인 TAC 선수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TAC 선수들은 정명을 보자마자 굽신굽신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와, 세계 최고의 팀을 만나다니! 오늘은 최고의 날이네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우리 4강에서 만나죠? 아이고, 대진운이 좋아서 어찌어찌 올라올 수 있었는데, 우리의 운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스탠드라는 선수는 입에 침을 튀기며 정명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등한 선수라기보다는 조금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뭐 저렇게까지 하냐 생각하며 혀를 쯧쯧 찼지만, 정명만큼은 달랐다. 저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 속에 비수를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저도 경기 봤습니다. TAC의 실력도 대단하던데요?”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상대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연습경기에서는 그렇게 졌는데 말이죠.”
스탠드의 말에, 정명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단판제라면 운으로 이길 수 있죠. 하지만 다전제에서는 운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력 좋으신 것 잘 알고 있으니.”
그 말에, 스탠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SNS에 자랑해야겠네요! 세계 최고의 미드라이너, 유정명 선수가 우리를 높게 평가해줬다고. 하하!”
정명은 그들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스탠드]
피지컬 (95/95)
판단력 (93/9#)
오더 (90/92)
정신력 (94/94)
‘와, 이게 뭐야. 능력치가 거의 송하니급....이런 새끼들이 약한 척을 하고 있었다고?’
그들의 실체를 본 정명은 어이가 없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실력을 숨기고 있는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정명은 연습실로 돌아오며 에리에게 슬쩍 물었다.
“우리한테도 쟤네가 연습 제안이 보내왔었죠?”
“응, 근데 당연히 깠지. 쟤네들 북미 팀한테도 승률이 반반 나온다는데.”
“잘 했어요. 저 녀석들, 연습 게임에서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으니까. 했다면 시간낭비였을 겁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팀원들이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쿠론은 배가 부른지 밥을 먹자마자 바닥에 뒹굴 거리고 있었고, 정명은 새우처럼 누워있는 쿠론의 엉덩이를 발로 퍽 차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장 반응이 왔다.
“이게 진짜! 죽을래, 너!”
‘이런, 진짜 화났나 보네. 하긴 내가 요즘 많이 건드리긴 했지.’
장난이었지만 저렇게 짜증을 내는 것을 보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정명은 쿠론이 요즘 디즈니랜드 타령을 하던 것을 떠올렸다.
“아 맞다. 오늘 내가 높으신 분한테 물어보니까 디즈니랜드 티켓 주는 거 진짜라더라. 너 디즈니랜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이번 시즌 끝나고 갈래? 물론 우승 하고서 말이지.”
정명은 쿠론을 꼬신다기보다는 자녀가 하도 졸라대서 마지못해 끌려가는 아빠의 느낌으로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쿠론은 뭐라 중얼중얼 대더니, 엄마랑 같이 가면 괜찮다는 소리를 했다.
‘쯧쯧, 이 녀석은 결혼해서도 지 엄마랑 같이 살자고 할 녀석이라니까.’
.....
어느새 TAC와의 4강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4강전이 다가올수록 경기의 프리뷰와 예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 인터뷰에서 TAC 선수들은 ‘우리가 질 확률이 높겠지만 최선을 다 하겠다’며엄살을 피우고 있었다.
‘꾀병 부리는 건 여전 하네. 얄미운 녀석들 같으니.’
몰랐다면 모를까, 안 이상 저런 얄팍한 수에 당할 수는 없다.
정명은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이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쌓아 둔 보상들이 꽤 많은데...’
정명이 시스템 창을 열어, 그동안 쌓아둔 아이템을 확인했다.
-천리안
-분노의 철권
-5초 영웅 (파티용)
.....
‘뭐가 이리 많냐. 아이템 8개...잡동사니 한 가득이군.’
아이템 목록을 보니 정명이 쓰지 않은 각종 아이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선물 상자를 까기는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효과가 나지 않기에 대충 쌓아 둔 아이템들이었다.
‘여기 중에서 하나 써 볼까? 근데 이거 써 봐야 거기서 거긴데...’
괜히 잡동사니처럼 쌓아두고 있던 게 아니다. 경기에서 써 봐야 어차피 별 효과 못 볼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정명은 결국 아이템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잡동사니처럼 쌓여있던 아이템 8개 전부 다.
[아이템 천리안을 사용하였습니다.]
[아이템 분노의 철권을 사용하였습니다.]
.......
######
‘쯧쯧, 월챔에서 떨어졌으면 얌전히 집에나 갈 것이지. 뭐 주워 먹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와?’
쿠론은 정명을 찾아온 북미 선수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딱 봐도 정명이라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방으로 돌아온 쿠론은 석진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야, 유정명한테 오늘 연습은 쉽게쉽게 가자고 네가 말 좀 해봐.”
“어...그러다간 혼날 거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쟤가 뭐라고 하면 내가 대신 나설게. 너도 빡빡하게 연습하느라힘들잖아.”
“음...그럴까? 하긴, 이번 상대는 TAC니까.”
쿠론에게 설득당한 석진이 정명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쉬엄쉬엄 하기는커녕 연습 똑바로 하자며 혼났다. 정색하며 까였다.
석진은 빨리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쿠론을 바라봤지만, 쿠론은 쿨하게 무시했다. 어지간하면 대신 싸웠겠는데, 정명이 저렇게 정색을 하고 있을 때는 건드리기 좀 뭐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어깨가 축 처진 석진이 돌아왔다.
“너 때문에 혼났어...”
“와, 유정명 정말 독한 녀석이다. 저렇게 쉬운 팀이 상대면 좀 쉽게 해도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싶은가?”
“그게 아니라 성실한 거지. 사실 형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안일했어.”
쿠론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유정명 부하 1호에게 말 해봐야 입만 아팠으니까.
‘저 녀석, 엄마 앞에서는 내숭 떨고 있긴 한데 진짜 성격 더러운 거 맞다니까? 어휴, 답답해.’
그런 생각에 확신을 들게 한 것은 TAC 선수들을 우연히 만났을 때였다.
정명은 TAC의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그들을 열심히 까대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TAC 선수들은 더욱 머리를 낮게 조아려야만 했다.
‘와, 저렇게 비굴하게까지 구는데 가차 없이 까대네. 정말 나조차 혀를 내두를만한 인성...’
그렇게 TAC와 헤어진 팀원들은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쉬는 시간이었기에, 쿠론은 방에 누워 기분 좋게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엉덩이를 퍽 차고 지나가기 전 까지.
‘아이씨, 송하니 이게 진짜...’
“이게 진짜! 죽을래, 너!”
송하니인줄 알고 덤볐는데 정명이었다.
쿠론이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는데, 정명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혹시 디즈니월드 가고 싶니? 이번 시즌 끝나면 갈래?”
“뭐어? 네가? 나랑?”
사실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얘기는 많이 들었고,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쿠론에게 이런 말은 이제 지겹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명이 이런 말을 하자, 조금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유정명 이 자식...또 지난번처럼 나 또 부려먹으려고!’
쿠론은 어떻게 하면 정명의 괴롭힘을 피해갈 수 있을지 맹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고민한 끝에, 속으로 박수를 칠 만한 묘수를 짜냈다.
“너랑 둘이 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싫어.”
“무슨 짓이라니...그보다 둘이 간 다고 말 한 적은...”
“그러니까 엄마도 같이 가.”
‘엄마 앞에선 착한 척 하는 녀석이니까, 엄마랑 같이 가면 괴롭히지 못 하겠지. 흐흐.’
정명은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하자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쿠론의 작전은 일단 성공한 듯 보였다.
사실 쿠론이 정명에게 아무 말 못하고 있는 이유가 또 있었다.
프로는 실력으로 말하니까.
정명은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괴물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뭐하나라도 배우고자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미친, 저게 사람이냐?’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트리플 킬!
잠시 후 시작된 연습에서 정명은 그 어느 때보다 월등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쿠론이 보기에 정명은 정말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역시 이 녀석 곁에 있으면 얻어먹을 수 있는 게 많아.’
연습 게임이 끝난 후, 쿠론은 솔로 랭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솔로랭크에서 만난 한 선수는 쿠론을 알아봤는지, 계속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와, 쿠론. 그새 실력이 느신 것 같아요! 진짜 대단합니다.”
“ㄱㅅㄱㅅ”
“비결이 뭐예요? 역시 세체미에게 직접 배우고 있기 때문인가?”
“ㅇㅇ 그런 듯.”
“으....나도 NHG로 이적하고 싶다. 거기 새로운 사람 뽑을 생각 없대요? 듣자하니 식스맨도 안 뽑는 것 같던데.”
“몰라. 리더한테 직접 물어봐.”
메테오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나갈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쿠론에게 말을 걸었던 북미 선수는 눈치가 없는 건지 포기를 모르는 건지 계속 작업을 걸었다.
“혹시 시즌 끝나고 디즈니랜드 가실 생각 있으세요? 탈락한 팀한테 디즈니랜드 가냐고 물어보신다던데, 생각 있으시면....”
‘찌질이가 끝까지 귀찮게 하네.’
[IV_drips님을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4강전 날이 밝았다.
쿠론은 TAC고 뭐고 누가 상대던지 간에 전혀 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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