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해외 진출 (3) >
월드챔피언십 개막전을 장식할 첫 타자는 작년시즌 우승팀인 KAO였다.
하지만 한가로이 TV나 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으므로, 경기의 분석은 에리에게 전적으로 맡겨놓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막 한 게임을 끝낸 정명은 에리를 슬쩍 보며 물었다.
“경기 시작 했어요?”
“아직.”
‘역시 좀 늦는군.’
그리고 잠시 후. 한 게임을 더 마무리한 정명이 또다시 물었다.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아직 시작 안 했어.”
그 후로 몇 번을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나왔다.
에리에게 따질 건 아니지만, 정명은 살짝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아니, 그거 5시 시작 아니었어요? 뭘 그렇게 질질 끈대요?”
“그렇긴 한데, 질질 끌리는 거야 너도 예상했던 일이잖아?”
에리의 말대로 국제대회는 항상 이랬다.
오후 5시에 시작한다고 하면, 6시 정도는 되어야 ‘슬슬 TV 틀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항상 늦는 게 일상이었다.
‘해설들만 고생이군. 토크쇼던 똥꼬쇼던 뭐라도 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하니까.’
그리고 7시쯤 되었을 때 겨우겨우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이제는 경기 중에 툭하면 퍼즈가 걸리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암걸리는 상황이었지만, 정명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우리가 첫 타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가뜩이나 긴장해 있는데 저렇게 시간을 질질 끌면 느끼는 피곤함이 엄청날 거예요.”
“응응.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하는 D조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그때쯤에는 분명 안정화가 되어있을 거야.”
그 후 3일이 지났고, 다행스럽게도 첫 날에 발생한 오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정명의 첫 번째 경기 날이 다가왔다.
모두들 긴장하여 침만 꿀꺽 넘기고 있던 시각. 의젓하게 앉아있는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석진은 다리를 달달달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으으, 형. 러시아 팀이면 쉬운 상대 맞죠?”
“그래, 그러니까 마음 편히 먹어.”
“쉬운 팀, 그냥 이기는 팀. 그러니까 1인 분만 하면....으아! 역시 안 되겠어요. 실수 할까봐 엄청 불안해요!”
조별리그 첫 상대는 리그가 열린지 얼마 안 된 지역인 러시아 지역의 팀이었다.
그들은 정명의 말대로 쉬운 상대 정도가 아니라 가장 쉬운 상대였고, 정명은 솔직히 한국 리그 10위 팀을 가져다 놔도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떨리긴 하네.’
애들 앞이기에 무덤덤한 척 했지만, 떨리는 건 정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그가 모의고사라면 이건 수능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월드챔피언십이 열리는 기간은 약 2개월.
꽤 장기 레이스였고, 한 곳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지역과 장소를 주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도착한 경기장은 중국이라는 스케일 치고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훨씬 크지만.’
경기장 밖에는 게임의 인기를 증명하는 듯,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선수들이 있는 대기실은 긴장 때문인지 무척이나 조용했다.
딱 10초전 까지는.
“형, 형! 혹시 복도 지나가면서 보셨어요? 바람의 요정이요!”
“바람의 요정? 서포터 말하는 거야?”
석진의 말에 메테오가 껄껄 웃었다. 정명은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메테오는 석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바람의 요정 코스프레한 미녀 말이지? 듣기로는 러시아에서 왔다고 하던데.”
“아, 보셨어요? 그분 정말 예쁘죠? 전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석진이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또다시 싸늘해지는 여성 게이머들의 시선은 전혀 못 느끼는 듯 했다.
“그래? 흠, 그래서 조 아나운서보다 예쁘던?”
“어...조이슬 누나요?”
석진은 조이슬과 썸을 타는 것 같더니, 이제는 또 잘 안 되는 듯 보였다.
정명은 곧바로 시무룩해지는 석진을 보고는 혀를 쯧쯧 차며 밖으로 나섰다.
“시무룩해 있지 말고 나와. 음료수 사 줄게.”
“...네.”
그런데 음료수를 사준다던 정명은 대기실에서 나오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어딘데?”
“네?”
“나도 구경이나 좀 해 보자.”
메테오까지 정말 예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정명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코스프레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저 분?”
“어....네. 그런 것 같은데...”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딱 보면 알았다. 그야 게임 캐릭터처럼 꽤나 벗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석진이가 노래를 불렀던 바람의 요정님은 팬들을 상대하느라 조금 지치신듯 했다.
그녀는 행사 스태프에게 오늘의 일당을 받으며 ‘아 시발, 돈 받아먹기 힘드네.’ 하는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바람의 요정님 길빵 중이신 것 같은데? 조금 매너가 안 좋으신 요정님인가 보다.”
......
경기 시간이 되자 일찌감치 무대에 올랐다.
정명은 중국에서 활동한지 꽤 오래되었기에 팬들이 자신을 까먹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명뿐만 아니라 팀원들 또한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실 팀 자체가 워낙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었기에, 존재감이 워낙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형, 중국어 아직 기억해요?”
“조금? 많이 까먹긴 했지.”
“우와. 전 다 까먹었는데. 근데 저거 뭐라는 거예요?”
-NHG 화이팅!
-돌아와 줘서 고마워!
팬들의 함성을 들은 정명이 석진에게 그대로 번역해줬다.
“우리한테 전 재산 걸었다, 잃으면 한강 갈 거다. 뭐 그런 말들이네. 신경 쓸 필요없어.”
“어...농담이시죠?”
정명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웃고 말았다.
이윽고 밴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월챔이라는 큰 대회인데도 불구하고, NHG는 특별한 것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준비했던 카드는 보여줄 필요 없다. 한국 리그에서 많이 보여줬던 거 위주로 하자.”
-질 확률이 거의 없죠?
-그렇죠. 시청자 분들께서는 편안~히 이기는 모습을 지켜봐주시면 되겠습니다.
해설들은 대놓고 편파해설을 하고 있었다.
국제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글 한 바퀴를 돈 메테오가 미니맵을 슬쩍 보며 말했다.
“하니, 탑 지원 갈까?”
“아녀. 지금 꽤 여유 있어서. 미드 가는 게 어때?”
“정명, 미드....”
“바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정글러가 그쪽으로 가고 있는 거 같거든.”
“네. 바텀 와 주세요. 곧 싸움 날 것 같거든요.”
석진의 말에, 메테오가 바텀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텀으로 가기 위하여 한 걸음 떼자마자 곧바로 전투가 열렸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메테오. 바텀 올 필요 없어. 탑이나 가 봐.”
“탑 올 필요 없다니까? 차라리 미드를...”
“???”
졸지에 메테오가 실업자가 되었다. 모든 라인에서 라인전을 압도해버리니, 정글러로써 딱히 할 게 없는 것이다.
“아냐, 그래도 라인을 한 번 찔러보는 게 좋겠어. 하니, 탑 갈게!”
[적을 처치했습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
[마무리.]
“? 뭐지?”
게임이 시작된지 10분.
한타를 했던 것도 아니고 라인전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마무리가 떴고, 러시아 팀의 스코어는 다섯 명 모두 다 0/2/0이 되었다.
솔로랭크였으면 탈주하기 딱 좋은 그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이거든요. 세계 최고라는 한국 리그. 거기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을 와일드카드 지역에서 어떻게 막겠습니까!
-네, 변수가 없어요. 안정적인 승차감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끝났다.
조별 예선은 단판 승부.
한 판의 경기를 끝으로 오늘의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정명은 월챔 첫 경기를 멋지게 승리로 장식했다.
[조별 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 보상으로 10000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음, 얼마 안 주네.’
사실 원래 조별리그 보상은 얼마 안 됐다.
정명이 몇 번 월챔을 뛰어 본 경험으로는 나중에 가면 갈수록 보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구조라고 예측이 되었다.
‘그나마 OMA 시절에 8강까지 간 게 최고 성적이었지만.’
그러한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정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 나, 방금 전까지 기분 좋았는데 OMA 생각하니까 또 기분 더러워지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정명은 러시아 팀을 이긴 후, 대만 팀까지 손쉽게 물리침으로써 순식간에 2연승을 달성했다. 조별리그 1위 통과가 무척 낙관적인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쉽게쉽게 가려 했건만, 오늘의 경기는 조금 빡세게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한 선수 때문에 한국 커뮤니티가 불이 났으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뒤늦게 안 석진이 핸드폰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상대에 인종차별로 징계 받은 선수가 있다고?”
“응. 배너라는 녀석인데, 꽤 어려. 너희랑 같은 나이일걸? 몰랐냐?”
다음 상대는 팀 KS. 유럽에서 3위로 올라온 팀이었는데, 그 중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탑 라이너인 배너였다. 실력은 좋은데 인성은 그에 반비례한다는 유럽의 악동이었다.
오랜만에 유럽 쪽 얘기가 나오자, 메테오가 아는 체를 했다.
“아, 배너? 유명하지. 유럽에서 오랜만에 물건이 나왔다고 하던데 걔가 걔였어?”
“응. 근데 실력이야 어쨌건, 중국인 외모 비하사건 때문에 징계도 크게 먹었지. 리그 3개월 출전 금지에 벌금 5천 달러. 뭐, 5000달러야 연봉에 비하면 얼마 안 되긴 하지만.”
“형, 저 질문이 있는데요, 벌금 안내면 어떻게 되요?”
“글쎄. 게임사 자체 벌금이니만큼 빨간딱지 붙여서 추징하거나 그러진 않겠지만,프로게이머 업계에서 영영 퇴출인 거 아닐까? 잘 모르겠네. 아직 벌금 안내겠다고 배짱 튕긴 전례가 없어서.”
이내 석진이 신기하다는 듯,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지금 KS와의 경기 날 치킨을 시켜 먹으며 구경하겠다느니, 배너 입에 김치를 쑤셔 넣어주자 느니 하며 부담감을 팍팍 주고 있었다.
정명은 엮이고 싶지 않은 녀석들과 엮이게 되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프로게이머들 인성이야 말해서 뭐해? 입만 아프지.”
“오빠도 프로게이머인데?”
“맞아. 사실 나도 아주아주 나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방심하다간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
“프히히, 오빠가? 오빠, 나 지금 엄청 방심하고 있는데.”
하니의 말에, 에리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완전 무방비 상태인데 정명아?”
두 사람 다 네가 어쩔 거냐는 듯, 실실 웃고만 있다. 정명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명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경기는 조금 빡빡하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송하니. 배너라는 녀석은 탑 라이너라고 하니까 네가 힘 좀 써보렴.”
“응응! 나한테 맡겨!”
배너는 사건 당시, 중국계 사람인 한 선수에게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월챔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다.
때문에 소문이 선수인 배너가 무대로 등장하자마자, 경기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져갔다.
“와, 사람 한 명 죽일 분위기인데요.”
“응...별루다 이런 거.”
“형, 저기 중국 팬들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엄청 흥분해 있는 것 같은데.”
“뭘 물어보냐 석진아. 당연히 욕이지. 패드립 번역해서 들을래?”
당연히 KS측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KS 선수들은 인종차별은커녕 다른 사람들과 말을 잘 섞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조별리그 3번째 경기인 팀 KS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화면이 회색 화면으로 물들었다.
‘아나, 또 이 지랄이네 이제는 다 고쳤다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경기가 시작 된지 5초 만에 오류로 게임이 일시정지 되었다.
이럴 경우, 팀원 간의 이야기가 금지된다. 일이 해결될 때 까지 무척 심심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정명은 경기에 대해서 생각하다던가 시스템 창을 띄워서 아이템을 구경한다던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분 뒤. 경기가 재시작 되었다.
그런데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또다시 화면이 회색 화면으로 물든다.
“이번에는 또 뭐에요?”
정명이 짜증스레 묻자, 심판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KS측에서 공식적인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게임이 일시정지 되어 있는 동안 유정명 선수가 KS측 미니맵을 훔쳐봤다는 항의가요.”
그 말에, 모든 시선이 정명에게로 모였다.
“엥? 내가 눈맵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