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결승전 (3) >
‘와, 저 형이 진짜 나긴 난 사람이다. 어떻게 저렇게 라인전을 터트리지?’
미드라인의 치열한 교전을 틈틈이 훔쳐보던 차석진이 연신 감탄을 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보통 게이머도 아니고 3년 내내 세체미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는 김지훈이다.
하지만 팀의 리더인 정명은 그 자리를 내가 계승하겠다는 듯 김지훈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게 올해 28살 먹은 선수의 피지컬 맞나요?
-어려보이는 것도 그렇고...경기 끝나면 민증 검사 한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설자들은 농담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같은 팀에 있는 석진은 가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정명이라는 사람은 그 나이대의 사람과 비교가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석진이 보기에도 정명은 28살 먹은 것 치고는 꽤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속였다고 하기에는 그동안 보여준 리더십이나 지식, 연륜 등을 설명할 수 없다.
해설자들은 한 20살쯤 되는 사람이 28살인 것 아니냐는 농담을 했지만, 오히려 석진은 40살쯤 먹은 사람이 28살인 척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교전이 벌어졌다.
-뱀술사가 궁극기를 맞추느냐 못 맞추느냐, 이게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방랑 마법사와 뱀술사의 라인전 구도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뱀술사의 궁극기를 정면에서 맞으면 그대로 두드려 맞다 죽는 것이고, 피하여 스턴에 걸리지 않는다면 역관광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정명은 뱀술사의 궁극기 타이밍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석화, 피했습니다!
-고개를 살짝! 돌려버리네요. 간단해보이지만 어렵거든요!
결국 뱀술사가 뒤로 슬슬 빼며 도망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이 스킬을 다 쏟아 넣었지만 뱀술사는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았고, 결국 점멸을 사용하여 겨우겨우 도망가는 듯 보였다.
“어딜 도망가!”
정명이 점멸을 사용하여 도망가는 뱀술사를 똑같이 점멸로 따라붙어 평타 한 방을 넣자,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두 번째 솔로 킬. 완벽하게 세체미라는 타이틀을 뺏어오는 순간이었다.
방음 부스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을 텐데도 석진은 부스 안에서도 왠지 팬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진 않았지만, 이것으로 무척 힘들어졌네요. 뱀술사가 완전히 말려버렸어요.
-김지훈 선수도 운이 진짜 안 좋네요. 아까부터 한 틱 차이로 잡히고 있거든요?
아슬아슬한 차이로 죽는 것을 보고 해설들은 단순히 운이 안 좋았다 평가했지만, 석진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에야 운이라고 하지만, 그런 상황이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그것을 노린 플레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설마 저걸 다 계산하고 플레이 하시는 건가? 진짜 아슬아슬 하게 잡긴 하는데...’
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기계도 아니고 그걸 계산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슈퍼플레이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순간, 석진의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지금 어디 한눈팔고 있냐? 부시에 와드나 좀 지워봐.”
“엇, 미안.”
‘이번에야말로 나도...’
팀원의 슈퍼 플레이에 기대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정신 차린 석진은 다시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정명은 새로 생긴 두 개의 특성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기적의 딜 교환이라는 특성은 피지컬을 높여준다거나 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완벽한 타이밍.
언제 싸우고 언제 빠져야 할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이득을보게 해주는 특성이었던 것이다.
-정글러가 와 보지만...빠집니다.
-정글러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요? 정말 귀신같이 알고 빠지네요.
있는 것을 들켰음에도 KAO의 정글러, 난폭한 사자는 미드라인에서 빠지지 않고 미니언을 치기 시작했다.
라인 같이 밀어주고 뱀술사를 집 보내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2번의 솔로 킬을 당했기에 타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뱀술사가 그제야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미니언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은 그 때를 노렸다.
-어어? 여기서 달려드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요?
-점멸까지 사용하여...뱀술사를 잡습니다!
-하지만 2:1은 무리죠. 결국 방랑 마법사도 킬을 내주고 맙니다.
“어라? 정명. 방금 건 무리였던 거 아냐?”
“미안미안. 앞으로 제대로 할 게.”
“그래. 어차피 네가 뱀술사 손발 거의 잘라놨으니까. 최소한 20분간은 0.5인분 밖에는 못 할 거야.”
확실히 이번에는 조금 손해를 봤다.
하지만 정명이 조금 무리한 이유는 단 하나, 3연속 솔로 킬을 이뤄내어 세체미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회색 화면을 바라보던 정명은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 창을 살펴보았다.
[세체미 퀘스트를 모두 달성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세체미라는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정상을 차지하는 것보다 정상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배로 힘들다는 것을.
*A등급 선물상자가 1개 지급되었습니다.
‘좋아, 이걸로 세체미 퀘스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했어. 이번에는 나도 조금 쫄렸지만.’
정명이 1킬을 내줬음에도 상황은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애초에 꽤나 차이가 벌어진 상태였기에 무리한 플레이를 시도한 것이니까. 비등비등한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퀘스트 보상이 탐나도 욕심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차이는 계속해서 유지되어, 금방 경기가 끝났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2:0이 되었다.
대기실로 들어오자, 무척 신이 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에리가 선수들을 맞아주었다.
“KAO를 이렇게 몰아넣은 건 우리가 처음이래! 너희가 무척 자랑스러워.”
“하하, 운도 좀 따라주긴 했지만요.”
하지만 그 운이 계속 가지는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정명은 KAO에게 한 방 맞고 말았고, 스코어는 다시 2;1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
-완벽한 운영입니다!
-정말 NHG의 장기전 운영능력은 알아줘야 합니다. 집중력이 계속 유지가 돼요!
4경기는 꽤나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확실한 승리를 원했던 정명과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는 KAO의 태도가 합쳐진 결과였다.
아무리 프로라지만 선수들도 슬슬 지칠 시각.
혼자 말똥말똥한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던 정명이 결단을 내렸다.
“싸우면 우리가 이길 것 같긴 한데...슬슬 한 번 붙어볼까? 두꺼비 이리 와서 백작 근처에 와드 좀 깔아볼래?”
그 말을 들은 석진이 백작 오브젝트의 근처의 와드를 지우며 시야를 점령했고, 동시에 팀원들이 그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너희들 이래도 안 와? 그럼 이거 우리가 먹는다? 하며 시위를 하는 것이다.
백작 근처에 NHG 선수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KAO 선수들 또한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하드 탱커인 타이탄이 먼저 고개를 들이민 순간, 너나할 것 없이외쳤다.
“싸워!”
-지금 유정명 선수의 방랑 마법사, 완전히 대장군이거든요? 탱 딜 둘 다 됩니다!
-어그로 핑퐁이 예술이네요! 죽을 때 쯤, 점멸로 빠져나갑니다!
곧이어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딜러라인을 대신하여 스킬을 대신 맞는 석진과 궁을 켜고 들어가는 송하니의 나무 정령, 그리고 원딜러에게 정확히 속박을 꽃아 넣은 메테오의 여왕거미까지.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남은 시간 70초! 서리여왕, 사망했습니다!
-아이고, 이거 망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무리.]
“와, 이 괴물 같은 놈들. 어떻게 저러냐? 난 하마터면 지는 줄 알았어.”
“그래도 서리여왕이 나로호 발사해준 덕분에 살았어요. 슬로우 맞고 허우적 거릴때는 이거 엿 됐다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됐으니까 괜찮아.”
마무리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정명과 팀원들은 캐릭터 위에 팀 아이콘을 슥, 띄웠다. 승리의 쐐기를 박는 퍼포먼스였다.
“이걸로...끝났군.”
-NHG가 KAO를 3:1로 잡아내며 경기 마무리됩니다!
경기가 끝났다.
한국 리그에서의 우승. 모두가 꿈꾸지만 막상 달성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그것.
정명은 울먹이고 있는 팀원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나가자, 이제. 나가서 인사 해야지.”
밖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정명에게만 보이는 메시지가 주르륵 뜨기 시작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명은 메시지를 무시한 채,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가 이겼다!”
“그래, 우리가 이겼다!”
정명이 소리쳤지만 호응해주는 사람은 메테오 뿐이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몇 명은 이미 질질 짜고 있었다.
“흑흑...이겼어...”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선수들이 한명한명 나와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인터뷰를 시작한 정명은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짧게 마무리했다.
석진은 조 아나운서에게서 마이크를 받을 때 살짝 손이 맞닿자 볼을 붉게 물들였고, 송하니는 현직 아이돌답게 긴장한 기색 없이 익숙하다는 듯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외국인들 차례가 되었다.
편의를 위해 영어로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통역은 필요 없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메테오는 애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그리고 쿠론은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선수들의 인터뷰가 끝나는 듯 했지만, 정명이 에리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코치님도 한 말씀 하셔야죠?”
“앗, 저요?”
에리가 얼떨결에 조이슬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잡았고, 정명 또한 통역을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처음에는 망설이더니 이내 울먹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도 잘 안 통해서 정말 고생하고, 인터넷에서는 너희들이 한국 가서 뭘 하겠느냐 그런 소리도 많이 들어서 엄청 서러웠는데...”
에리는 뭔가가 북받쳐 올랐는지, 정명도 몰랐던 속상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 빠르고 발음을 뭉개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리고 에리의 말이 끝났고, 잠깐 말을 가다듬던 정명은 요약해서 번역했다.
“어....이겨서 기쁘다고 하네요.”
“?”
다른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명을 쳐다봤다.
에리는 한 20초는 말을 했는데 한 마디로 통역해버리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에리도 울먹거리는 것을 멈추고 정명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아니, 내가 마랄께...”
에리는 다시 말하려는 정명을 제지하며 한국말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응원, 주셔서 고마워요. 더 열시미 하께요...”
외국에서 온 배우들은 영화 광고를 할 때, 한국 쏼랑해여 불고기 맛잇어여 등을 한국어로 짧게 말하고는 한다.
그런 모습을 한국 사람들이 좋아 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인사도 크게 호응을 얻는데, 누가 봐도 서양인인 에리가 꽤 정확한 발음으로 인사를 하자 분위기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와아아아아!
-언니! 사랑해! 결혼하자!
팬들의 응원을 들은 에리가 다시 눈물을 글썽이자, 정명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응원 해 주셔서 고맙다고 하네요.”
“?”
그렇게 한국에서의 두 번째 리그가 끝났다.
...........
리그가 끝났지만 아직 푹 쉬기에는 일렀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팀들이 모이는, 한국 리그보다 훨씬 중요한 월드챔피언십 리그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명은 조금 넉넉하게 휴일을 잡았다.
아무리 월드챔피언십이 가장 중요한 대회라지만, 휴식을 통한 재충전은 꼭 필요하니까.
‘그래도 이건...풀어져도 너무 풀어진 것 같은데...’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정명이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연습실에는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땅바닥에서 잤기에 허리가 조금 뻐근했다. 어제 진탕 술을 마시고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자...’
그런데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정명은 5초 정도 강력한 스턴에 걸렸다.
‘어라...?’
연습실에는 팀원들뿐만 아니라 항상 묵직하게 있던 송하니의 매니저까지 술에 떡이 되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어제 너무 달렸던 것의 여파였다.
그리고 그 어른들의 뒤처리를 하는 건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는 꼬맹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꼬맹이 중 하나가 왜 여기에...’
송하니가 정명의 옆에 딱 붙어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위기감이 든 정명은 어제의 일을 필사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필름은 안 끊겼고...좋아, 별 일 없었다. 아오, 이게 깜짝 놀라게 하고 있어!’
정명은 옆에서 자고 있는 송하니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웅냨”
자고 있는 송하니를 옆으로 밀어내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진다.
하니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자고 있었는데, 아이돌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어휴, 부스터인지 뭔지 하는 애들이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정명은 휴지를 몇 장 뽑아 하니의 침을 닦아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오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어라? 일어났네?”
“와, 에리 당신 정말 술 세네요. 똑같이 마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네.”
“그런가? 후후.”
“오, 아침은 샌드위치에요?”
“응. 잠깐 기다려. 네 것도 줄게.”
에리는 이내 토스트와 녹차를 가져왔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하고 컴퓨터 앞에 앉는 정신없는 하루가 아닌, 정말 오랜만에 갖는 아침의 여유였다.
“그런데...우리 쉬지?”
“네. 쉽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이번에는 진짜로 쉴 거니까.”
섬머 리그에서 우승한 NHG는 물론이고, 스프링 리그와 섬머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KAO까지는 월드챔피언십 직행이다.
하지만 나머지 팀들은 다르다.
나머지 팀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월드챔피언십 티켓 한 장을 위하여 쉴 틈 없이 치고 박고 싸워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아참, 아까부터 정명 네 핸드폰 엄청 울리더라. 연락이 많이 오는 것 같아.”
“핸드폰요?”
‘요즘 핸드폰을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보고 있었는데...’
정명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보니 수많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