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결승전 (2) >
결승전 시작 시간이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명은 이런 시각엔 급하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는 것 보다는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던가 컨디션 조절을 하며 쉬는 것을 더 선호했으므로, 팀 연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 대신 바람을 쐬며 긴장을 풀기 위해 팀원들과 잠깐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팀원들은 아이스크림을 각자 입에 문 채, 벤치에 앉았다.
“오, 저기 봐봐. 결승전 무대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잘 안 보이는데...”
저 멀리서 한창 무대를 점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해변에서 결승전을 치르니, 준비할 것이 더 많았기에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어? 저거 걔네들 아냐?
-뭐? 누구....어! 프로게이머!
해변가를 걷던 사람들이 일행을 보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기 시작했고, 정명또한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웃어보였다.
‘이런 게 다 하나하나 팬 서비스지. 그런데...덕분에 쉬긴 글렀군.’
인기를 얻는 건 좋은데, 이런 점은 조금 불편하다. 알아보는 사람 때문에 밖에서 편히 쉴 수가 없는 것.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 손을 흔들었던 여성 팬들이 팀원들 앞에 몰려왔고, 정명은괜히 피곤해질 것 같아 뒤로 빠지며 차석진을 앞으로 떠밀었다.
해수욕장 앞이라서 그런지 팬들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어머, 차석진 선수시죠? 이따 경기하시는...”
“쑥스러워 하는 것 좀 봐. 너무 귀엽다!”
“오빠! 오늘 경기 잘 해! 응원할게!”
‘저 분은 아무리 봐도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데 오빠라니...’
20살 초반으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석진의 옆으로 달라붙으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사진이라도 찍자는 것이었다.
“아, 예. 사진...괜찮습니다.”
석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으며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점점 몰리기 시작했으므로 정명은 팀원들을 모아 호텔 안으로 다시 들어와야만 했다.
“휴, 쉬러 갔다가 괜히 힘 뺀 느낌이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얼굴 까놓고 맘대로 못 돌아다니겠다는 거.”
“그래도 전 좋았어요. 기분전환 된 것 같아요.”
살짝 들떠있는 석진의 말에, 정명이 웃으며 물었다.
“석진아, 누나들이 응원해주니까 좋지?”
“네! 사실 아까 사진 찍으면서 가슴이 좀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형은 알죠? 그 엄청 부드러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가슴이 살짝 닿는 미묘한 느낌까지 알아 챈 석진이지만, 안타깝게도 팀의 여성 게이머들이 싸늘한 시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 하는 듯 했다.
석진의 영웅담을 듣고 있던 하니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에는 조이슬 조이슬 노래를 부르더니...”
“어? 아니 그게...”
하니의 말에 쿠론이 호응했다.
“그러게. 발정 났네, 발정 났어. 남자들은 다 저런다니까.”
결국 석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을 하기 시작했고, 정명은 푸하하 웃고 말았다.
약간의 소동이 있은 후, 마침내 경기 시간이 다가왔다.
경기장의 스태프들은 선수들을 배려해 주려는지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
때문에 스태프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본 정명은 스태프가 꽤 중요한 일을 알려주려나 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정명씨! 지금 부스터 왔어요! 구경 안 해요?”
“네? 부스터요?”
“아이, 왜 모르는 척 하세요? 요즘 메롱차트 1위 싹쓸이 하고 있는 그 그룹 있잖아요!”
정명은 스태프의 권유로 팀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무대 뒤편에서 무대를 슬쩍 보니, 강렬한 음악과 함께 누군가가 공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걸그룹의 정체는 지난번, 소속사 건물에서 마주쳤었던 부스터라는 그룹이었다.
“석진아, 누나들 공연하는 모습 보니까 좋지?”
“아 형, 봐주세요. 저 아까 진심으로 식은 땀 났어요.”
정명이 킥킥 웃으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명의 옆에서 송하니는 팔짱을 낀 채, 무대 위의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처럼 뭐 실수라도 안 하나 평가하는 모양새였다.
“어떻습니까 심사위원님. 저 정도면 합격입니까?”
“응, 뭐 그럭저럭. 괜찮게 하네.”
“흐흐, 그거 다행이네. 그나저나 오늘 경기만 아니었어도 네 공연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정명의 말에, 송하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게임리그 전담 아이돌인가? 일 있을 때마다 부르게.”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근데 내 공연 보고 싶었어? 진작 말 하지. 표 따로 빼줄 수 있는데...”
노래가 끝나자 부스터 멤버들이 무대 뒤편으로 퇴장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을 입은 걸그룹의 모습에, 스태프와 해설들은 물론이고 KAO쪽 사람들까지 목을 쭉 빼고 우와, 하고 감탄했다.
“팬이에요! 사진 좀 같이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아, 잠시만요.”
하지만 부스터는 그러한 시선들을 전부 무시한 채, NHG의 대기실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지난 번 소속사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꾸벅, 90도로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부스터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공연 잘 봤어요.”
“경기 잘 하세요. 응원 할게요!”
공연을 마친 부스터는 경기를 구경하다 갈 예정이라고 한다. 경기를 관람하는 걸그룹. 뭐 이런 식으로 사진을 찍어 기사를 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하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1경기까지만 보고 들어가요. 딱 봐도 행사 뛰느라 피곤해 보이는데.”
“네? 하지만...”
부스터의 리더가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리자, 하니가 타겟을 옮겼다.
“경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굳이 피곤한 멤버들을 앉혀놓을 필요가 있나요?”
“예? 하지만 일정이...”
매니저와 얘기해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는지, 송하니는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한테 방금 허락 받았어요. 1경기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서 좀 쉬어도 된대요.”
“네? 정말요?”
“그럼요. 그 대신, 제가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요.”
부스터 멤버들은 후배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선배님...’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동생이라는 것은 이미 잊어버린 듯 했다.
그리고 하니는 부스터 멤버들에게 살짝 윙크하며 하며 이미지 메이킹의 화룡정점을 찍었다.
‘으이구. 늬들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저거 연습실만 가면 완전 떼쟁이에 초딩이라고!’
내부 평판이 무척 좋다고 하더니, 그 비법을 조금 알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드디어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선수가 한명한명 무대로 나와서 인사를 하고 결승전에 대한 각오를 밝혔다.
시청자들은 집어 치우고 게임이나 빨리 하라는 채팅을 쏟아냈지만, 사실 이것도 다 필요한 절차였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준비 많이 했어요. 좋은 모습 보여드릴게요.”
장황하기까지 한 오프닝 무대가 끝나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럼 경기를 시자아아악! 하겠습니다!
..........
팀의 조합에는 어떤 컨셉이 있어야 한다.
포킹조합, 한타조합 등등.
그리고 정명은 조합에 의료닌자, 방랑 마법사를 선택함으로써, 소위 글로벌 궁극기를 가진 캐릭터들로 조합을 구성했다.
“김지훈은 역시나 태엽로봇이네?”
“역시나지 뭐. 쟤는 꼭 쫄리면 저거 하더라.”
태엽로봇은 공방 모두 안정감이 있는 선택이었기에, 큰 대회에서 자주 나오고는 하는 픽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정명은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모든 게 예상대로다.’
1경기가 시작되자 열 명의 선수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라인에 선 정명은 딱히 상대 선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님에도, 상대가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떠오르는 신흥 강자, 거기다가 NAV를 3:0으로 꺾고 온 팀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긴장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니까 1경기는 손을 푼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해야겠다.’
-잠깐만요. 유정명 선수 혹시 13웨이브 동안 미니언을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은 건가요?
-와, 역시 클래스가...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더니, 뭔가 다르긴 다르네요.
정명은 지금까지 얻은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사용하고 있는 특성은 농부 특성. 꽤 예전에 얻은 능력이었다.
[수확하는 농부(C랭크)]
*미니언을 차곡차곡 수확하여 아이템을 빨리 뽑을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피지컬이 높아질수록 미니언을 놓치는 실수를 할 확률이 줄어듭니다.
‘C랭크 스킬이고 A랭크 스킬이고 지금 당장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이 가장 좋은 스킬 아니겠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요긴하게 쓰이는 특성이었다.
-중요한 경기이기 때문일까요? 양측 모두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평온하게 라인전이 끝난 후, 타워가 하나 둘 철거되는 것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운영 싸움이 시작되었다.
“너희들 그거 피할 수 있지?”
“당연!”
“그 정도야...”
태엽 로봇은 밸런스가 무척이나 좋은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안정적인 라인전과 광역 궁극기.
하지만 정명은 그 평가가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태엽 로봇이 공을 날려 궁극기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었다.
-공기팡!
-점멸 두 명 뺐습니다!
“나 점멸 빠짐!”
“저도요!”
“괜찮아, 아끼다가 똥 된다. 잘 했어.”
처음에는 밸런스 좋은 캐릭터라고 평가받았지만, 선수들의 피지컬과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짐에 따라 어지간한 프로선수라면 궁극기를 쉽게 반응하여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태엽 로봇은 프로레벨에선 조금 아쉬운 캐릭터가 되었던 것이다.
“저거 궁 없다. 이번에 싸움 걸자!”
미드라이너의 궁극기가 거의 무용지물이 되니 싸움에서 조금씩 이득을 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스노우볼이 점점 굴러가기 시작했다.
-GG! NHG, 무난하게 첫 경기를 얻어 갑니다!
-정말 특별한 일 없이 골드 격차가 꾸준하게 벌어지네요. NAV도 딱 이렇게 패배했었죠.
“휴, 일단 하나 잡았고...”
선수들은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화장실을 가거나 묵묵히 물을 마실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곧바로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사막의 황제 풀었는데 역시 안 하네.”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가 아니긴 하니까. 아마 연습도 안 했을 걸?”
2경기에서 정명은 또다시 무난한 캐릭터인 방랑 마법사를 골랐고, 그를 상대하는김지훈은 마찬가지로 무난한 캐릭터인 뱀술사를 잡았다.
‘좋아, 이제 스킬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좀 온다. 손도 풀렸고 슬슬 해볼까...’
정명이 이번 결승전을 위해 준비한 것은 농부 특성만이 아니었다.
기적의 딜 교환 스킬과 킬 각.
두 개의 A랭크 스킬을 조합해서 쓰는 콤비네이션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글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 정명은 먼저 기적의 딜 교환 특성을 활용해 교전을 유도했다.
-마법사, 엄청 앞으로 들어가는데요!
-캐릭터 자체가 인파이터라서 저렇게 싸우는 게 맞는 방법이긴 합니다.
-스킬 적중률이 대단하네요. 이득 보고 빠집니다!
‘1대 맞을 때 2방치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이득 봤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모두들 교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정명이 타이밍을 잡았다.
[퍼스트 블러드]
뜻밖의 킬에 놀란 것은 해설뿐만 아니라 같이 게임하고 있는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엥? 솔로킬?”
“우와, 진짜로?”
“와와! 신난다! 우리 팀에 세체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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