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175화 (175/226)

< 60. 만신전 (5) >

사막의 황제가 열리자, 해설자들이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카운터를 준비한 뒤 일부러 열어줬다는 예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KAO는 그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곧장 1픽으로 가져가버렸다.

“바로 골라버리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다니까. 어둠의 여제나 골라 줘.”

“그나마 좋은 선택이야. 저 비둘기 잡는 데에는 사거리 긴 캐릭터가 딱이지.”

어둠의 여제는 검은색 구체를 굴리며 싸우는 캐릭터였다.

사막의 황제와의 라인전에서 조금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는 캐릭터였는데, 이미 김지훈이 사막의 황제를 고를 것이라 예상하고 준비한 전략이었다.

“황제대 여제라. 캐릭터의 이름일 뿐이지만 뭔가 재밌지 않냐?”

“.....”

모두들 바짝 긴장했는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정명은 머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로딩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정명의 시야에 자그맣게 메시지가 보였다.

[주의하십시오. 플레이어 김지훈의 컨디션이 매우 좋은 상태입니다.]

-집중력 대폭 상승

-캐릭터 숙련도 lv7 상태입니다.

-능력치에서 우세하다하여 방심하다가는 한 순간에 잡힐 수 있습니다.

‘음...피지컬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인가?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랭크게임 그랜드 마스터를 찍었다고 해서 브론즈 리그의 스킬이 안 아픈 것은 아니다.

피지컬이 낮다고 해서 스킬이 더 느리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라인전의 승리를 결정짓는 데는 피지컬을 포함하여 캐릭터의 상성이나 컨디션, 심지어 운까지 말로 표현 못하는 수많은 요소가 들어가므로, 섣불리 방심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기, 시작합니다!

.....

경기는 무척이나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3레벨이 되어 모든 스킬을 배운 순간, 김지훈 특유의 과감한 견제가 발동되며 침묵이 깨졌다.

-잘 노렸네요! 미니언 먹느라 지금 어둠 여제의 스킬이 빠진 타이밍이거든요?

‘어딜 들이대려고?’

김지훈이 능숙한 운전솜씨로 순식간에 파고들어 면상을 들이대는 것과 동시에, 정명이 공을 굴려 사막의 황제를 쳐냈다.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은 상황.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캐릭터를 뒤로 물렸다.

-오오, 방금 보셨습니까? 치고 빠지는 타이밍이 완벽합니다.

-예. 무빙이 무척 매끄럽네요. 이번 경기는 기대해도 되겠어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박수가 난다고, 한 쪽만 잘해서는 명 경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해설자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 한 번의 딜교환을 보고는 명경기가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됐다. 이쪽으로 분위기를 끌어 왔어.’

처음에는 김지훈이 기세 좋게 덤비기는 했다.

하지만 상성 캐릭터가 괜히 상성이 아니라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김지훈이 겨우 CS를 받아먹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황제훈이라는 별명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기에, 카메라에 비친 김지훈의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플레이어 김지훈이 분노 상태가 되었습니다.]

-피지컬이 1 상승했습니다.

-판단력이 5 하락했습니다.

‘응?’

갑자기 각성하기라도 했는지, 김지훈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정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던 구도에서 다시 팽팽하게 바뀐 것이다.

“정명, 좀 도와줄까?”

“아니, 탑이나 한 번 더 봐줘. 나 혼자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정명은 메테오의 제안을 쿨하게 거절했다.

김지훈의 움직임이 좋아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도 메시지가 떴기 때문이다.

[영웅 급의 플레이어를 감지했습니다.]

-영웅학살자 스킬을 발동합니다.

-피지컬이 99로 상승합니다.

‘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피지컬 99.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캐릭터가 움직이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평범하게 움직이기만 해도 슈퍼플레이처럼 보이는 아우라 같은 것을 풍기기도 했다.

-김지훈 선수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네요. 이대로라면 CS손해가 점점 커지는데요.

-하지만 뭐랄까...들어가고 싶어도 틈이 없어요.

-예. 왠지 모르게 들어가면 곧장 죽을 듯한 느낌입니다. 저라면 정글을 불러서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김지훈은 해설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글러를 불렀다.

그런데 정명은 정글러를 피하기는커녕 앞으로 돌진해버렸다.

-이게 뭔가요! 앞 점멸은 좀 아닌 것....어어?

스탯 99는 일명 ‘입게임’을 그대로 실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앞점멸을 쓰는 듯 했지만 그것은 사막의 황제의 스킬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정명은 궁극기가 빠진 사막의 황제에게 풀 콤보를 넣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와, 리플레이를 보고 싶은 장면인데요? 겨우 3초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궁 각을 정확히 쟀네요. 마지막에 살짝 움직여서 음파를 피한 것도 무척 좋았습니다.

킬을 냈기 때문인지, 김지훈의 분노 모드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정명도 피지컬 99를 유지할 수 있었다.

-5킬 0데스...이건 길에서 누굴 마주치든 스킬 한 사이클에 보내버릴 수 있을 화력입니다.

-KAO 선수들이 어쩔 수 없이 마법 저항력 아이템을 두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딜이 안 나오거든요.

-이대로라면 게임이 무난하게 끝납니다. 이제 뭐라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요?

1경기는 무난하게 정명이 캐리하며 게임이 마무리되었다.

총 9킬 0데스.

KAO는 도박이라도 해볼 생각인지 무리하게 백작 싸움을 시작했고, 경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슈퍼플레이로 캐리가 가능하다니, 역시 스탯 99의 영역이란...’

정명은 피지컬 99의 위력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2경기에서 김지훈이 다시 한 번 사막의 전사를 꺼내들기를 바랬다. 그래야 피지컬 99를 다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2경기가 시작되었다.

“좋아, 풀자.”

이번에는 ‘정말로 괜찮겠어?’ 하는 우려 섞인 말이 들리지 않은 채로 마지막 밴이 끝났다.

-설마 또 풀리나요?

-풀리네요! 과연 이번에도 고를지?

“안 고르나?”

“글쎄. 자존심 생각하면 고르겠지만....개인적으로는 골라줬으면 좋겠는데.”

KAO는 마지막 3초까지 캐릭터를 고르지 못하다가 결국 태엽로봇을 올려놓았다.

사막의 전사는 자존심 같은 카드였는데,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높게 평가 해야지. 자기 자존심보다 팀의 승리를 우선했다는 건데.”

KAO는 1경기 만에 전략을 바꾼 듯 했다.

미드만 파는 게, 정말 집요하다 싶을 정도였다.

“아고, 역시 KAO는 아직 힘드네.”

“졌다. GG.”

“졌지만 잘 싸웠다.”

영웅 학살자 스킬이 해제되자, 정명은 특별한 변수를 만들어내지 못 하며 무난하게 2경기를 내주었다.

3경기는 더욱 심했다.

KAO는 미드 저격 3밴을 한 것도 모자라 정글러가 미드에 캠핑을 치고 곱게 놔주질 않았다.

정명이 그 와중에도 슈퍼플레이를 몇 번 만들어 냈으나, 혼자서 뭔가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

정명은 마지막 3경기에서 45분의 장기전을 치른 끝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힝...1경기에서 이기고 나서 혹시나 했는데 결국 졌네.”

“뭐, 그래도 세체미 타이틀은 가져왔으니까. 그렇죠 세체미님?”

에리의 말에, 정명이 피식 웃었다.

“됐어요, 손가락 오그라들게 세체미는 무슨. 집에나 갑시다.”

경기에서는 졌지만,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던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3경기 내내 정명이 김지훈을 이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정명은 1경기에서 사막의 전사를 든 김지훈을 압도했는데, 그것은 경기를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누가 보면 우리 팀이 이긴 줄 알겠네.’

정명은 방송국을 떠나며 승자 인터뷰를 진행하는 KAO 팀원들을 잠깐 봤었다.

승자 인터뷰를 하는 KAO 선수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그에 반해, NHG의 차 안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송하니는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오, 이것 봐. ‘지금이라도 올스타전에 유준상 보내자 김지훈으로는 불안하다’ 라네. 우리 오빠 올스타 각 인정? 세체미 각 인정? 어 인정!”

태세전환이 빠르기로 유명한 커뮤니티답게, 커뮤니티에서는 벌써 세체미가 바뀌어도 옛날에 바뀐 듯 한 분위기였다.

“시덥잖은 소리 말고, 올스타전에 정식으로 선발된 너나 잘 갔다 와.”

“우씨, 대만까지 가기 귀찮은데!”

“하니 네 이야기도 있네. ‘송하니 얼굴덕분에 올스타 갔다는 사람 다 어디 감? 오늘 보니 엄청 잘 하더만.’ 이라는데?”

“그래도 얼굴 예쁜 건 아나보네 흥흥.”

떠들썩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 정명에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현 세체미를 솔로킬 내며, 예전에 받은 퀘스트를 일부 달성한 것이다.

[세체미 퀘스트를 일부 달성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팬들은 당신이 진정한 세체미라며 우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식 대회에서 현 세체미에게 솔로 킬을 냄 (달성함)-B급 선물상자 3개를 습득했습니다.

‘뭐, 나쁘지 않네.’

...........

KAO와의 경기가 끝났지만, 아직 2위 팀, NAV와의 경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승점을 계산하면 정명의 팀은 이미 포스트 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였다.

일부 팬들은 심지어 NHG가 혹시 포스트 시즌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겼다.

KAO와의 경기를 끝낸 바로 다음 날, 정명이 끙끙 앓기 시작한 것이다.

“와, 미치겠다. 침대에서 못 일어나겠어.”

몸이 으스스 떨리며 온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연습은커녕 제대로 경기에 나갈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태.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싶었지만, 정명은 시스템 창을 보고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95/100)

정신력 (49/100)

오더 (89/100)

판단력 (90/100)

*과부하상태!

-힘을 과도하게 끌어다 쓴 여파로 몸이 과부하 된 상태입니다. 정신력이 일시적으로 대폭 하락했습니다.

어제의 경기를 끝으로, 막 [아레스의 창] 스킬의 사용기간이 다 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몸살이 심하게 나버렸다는 것이다.

‘아, 젠장. 이런 게 있다고는 말 한적 없잖아!’

정명이 어떻게든 몸을 이끌고 연습실에 도착하자, 초췌한 정명의 모습을 본 팀원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몰려들었다.

“괜찮아? 아니, 딱 봐도 안 괜찮네. 다음 경기에서는 그냥 수건 던지는 게 낫겠지?”

“응.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러다가 사람 잡겠어!”

“아니. 어떻게든 해 본다.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컨디션이 좋아도 이기기 힘든 판에, 다음 상대가 2위 팀, NAV다.

정명이 그것을 생각해내자마자, 또다시 익숙한 퀘스트가 떴다.

[하늘 위의 하늘]

세계랭킹 2위 팀을.....

‘젠장, 이번에야말로 이 빌어먹을 퀘스트를 꼭 치워버리고 싶었는데.’

정명은 결국 NAV 전에서 허무하게 게임을 내줬고, 겨우겨우 진출한 포스트 시즌에서도 몸이 아파 빌빌대다가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프링 리그가 끝이 났다.

결승전은 언제나 그랬듯이 KAO와 NAV의 대결이었다.

김지훈은 솔로킬 당한 굴욕을 씻어내겠다는 듯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었는데, 그 덕분에 세체미 타이틀은 다시 김지훈에게로 반환되었다.

‘커뮤니티 사람들의 태세전환이 이루어지는 데는 5초면 충분하다더니....정말 과장 하나 들어가 있지 않다니까.’

정명의 몸살은 리그에서 탈락하자마자 전부 깨끗하게 나았다. 이걸 노렸나 싶을 정도로 억울한 타이밍에 다 나은 것이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성적이지 뭐. 다음 시즌에 더 잘 하자고.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메테오의 표정은 무척이나 홀가분해보였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NHG 팀원 모두가 휴식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쿠론 너는 쉬는 시간에 뭐 할 거냐?”

“한국 여행.”

쿠론이 짤막하게 답하자, 하니가 옆에서 번쩍 손을 들었다.

“나도! 나한테도 물어봐!”

“넌 집에서 뒹굴면서 게임할 거잖아?”

“힝...오빠는 너무 나를 잘 알아....”

대청소를 끝으로, 다들 연습실을 오래 비워둘 준비를 마쳤다. 오랜만의 휴식에 모두들 들뜬 모양새였다.

그런데 잠깐 밖에 나갔던 에리가 종이를 펄럭이며 정명을 불렀다.

“정명아~편지 왔는데? 벼무처에서 왔대.”

“뭐요? 어디?”

“벼엉...무청에서 왔어! 어때? 내 발음 좋아졌지?”

그치, 그치? 하며 에리가 밝게 웃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좋지 못 했다.

“......석진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 해. 다 사줄게.”

송하니가 무척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차석진을 바라보았고, 차석진은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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