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프로게이머 147화-----------------
프로 게이머들에게 휴일은 없다고들 말한다.
굳이 말하자면 휴일은 ‘경기 다음 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도 조금 설렁설렁하긴 하지만 연습을 하긴 한다. 프로 게이머는 참 고달픈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경기 다음 날이 아님에도 모두가 쉬는 날이 있었다.
“오늘은 왜 쉬냐고요? 당연히 쉬죠. 크리스마스에 연습하자고 하면 분명 폭동 일어나요”
크리스마스 전날, 정명은 개인 방송을 틀어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딱히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잡담이나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하는 정도.
정명의 채팅창은 마치 한국의 ‘유어 리틀 텔레비전’을 방송하는 것처럼, 채팅 로그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요? 연습실이 조용한 것 같은데, 애인이랑 놀러 갔나요?
“아마 가족이랑 보낼 겁니다.”
-아, 역시 리더는 팀원들의 사생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나 보네요?
그 채팅에, 정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 사람들 사생활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아무리 팀의 리더라지만, 지킬 건 지킵니다.”
-…그러면 가족이랑 보내는지, 애인이랑 보내는지, 님이 어떻게 앎?
“몰라. 걔네들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가족이랑 보낼 거야.”
‘그러지 않으면 억울하잖아. 나는 석진이랑 단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할 판인데.’
다른 팀원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려고 이미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집으로 갈 수 없는 정명은 연습실에 남아 개인 방송을 열었다.
며칠 휴가가 주어졌다고 해서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물론 한국에 가려면 갈 수야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스케줄에 맞추려면 한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명은 짧았던 개인 방송을 마무리 지은 뒤, 옆쪽에서 솔로 랭크를 돌리고 있던 차석진에게 다가갔다.
“야, 무슨 크리스마스까지 솔로 랭크를 돌리고 있어. 좀 쉬는 게 낫지 않아?”
“어… 조금만 더 하고요.”
크리스마스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차석진은 무척이나 평범한 게이머였다.
집안도 평범, 얼굴도 평범, 실력도 평범.
평범 그 자체인 사람이었지만 노력만은 평범 그 이상인 근면한 게이머이기도 했다.
‘차석진이라. 한국에서 데려왔을 때, 그렇게 잘나가던 게이머는 아니었지.’
정명은 그런 차석진의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차석진]
피지컬 (80/94)
정신력 (79/94)
오더 (35/65)
판단력 (72/91)
‘차석진이 포텐셜은 있는데……. 뭔가 애매해. 능력치가 전혀 안 올라.’
사실 이만한 포텐셜을 가진 사람은 정말 드물다. 맥시멈 능력치로만 따지면 최정상급 선수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차석진이 오랫동안 무명이었던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포텐셜은 포텐셜일 뿐, 그것을 전혀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력이 정체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쉬는 날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진아, 조급해서 그래? 그러다가 몸 상한다.”
정명이 직접적으로 말했다.
석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 팀에 도움도 안 되는 것 같고, 연습해도 실력도 잘 안 오르고……. 슬럼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답답해서요.”
“흠… 좋아. 그만 궁상 떨고 나갈 준비나 해라. 케이크라도 사러 가자.”
“케이크요?”
“남자 둘밖에는 없지만 크리스마스 기분은 내야지. 안 그래?”
*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요.”
“기분 탓이야. 신경 쓰지 마.”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섰다.
정명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것에 꽤 익숙해졌지만, 차석진은 그렇지 않았는지 영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들른 곳은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이었다.
“전 저거요. 겨울 제국 아이스크림 케이크.”
“추워 죽겠는데 무슨 아이스크림 케이크야.”
“장난감 주잖아요, 멜사 피규어.”
그런데 케이크를 고른 뒤, 케이크를 계산하는 정명에게 직원이 말을 걸었다.
“어? 프로 게이머 유정명 씨 아니세요?”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직원은 남자 둘이 케이크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는 살짝 웃었다.
“크리스마스를 둘이서 보내시나 봐요. 호호, 애인 없으세요? 아까 크리티컬 선수는 애인이랑 같이 왔던데.”
‘이런 씨… 어쩌라고.’
정명은 속마음을 숨기며,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제 옆에 있는 이 사람도 아세요?”
“음… 매니저인가? 아, 맞다, 석진. 차석진 아니에요? 서포터. 알죠, 저 방송 맨날 챙겨 보는데.”
그러자 정명은 석진을 바라보며 방끗 웃었다.
“석진아, 잘됐네. 널 알아보는 사람이 꽤 늘어났어. 처음에는 아무도 몰라봤는데 말이야.”
“그거야 그렇죠…….”
“실력이 올라가는 것도 똑같아. 무척 천천히 올라가서 스스로는 체감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런데 내가 볼 때, 넌 중국에서 하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실력 많이 올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요?”
“정말이지.”
차석진은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예. 우울한 게 조금은 나아진 것 같네요. 그럼 연습실 들어가서 케이크나 먹죠.”
그런데 둘이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화려하게 화장한 여자가 정명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춥지도 않은지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 방금 듣기로는 프로 게이머 정명이라고… 맞아요?”
“예. 안녕하세요.”
“오오, 신기하다. 저 유명한 사람 좋아하는데!”
“아, 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혹시 저희랑 클럽 가실래요? 오늘 밤새도록 달릴 생각인데.”
“미안합니다. 시끄러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정명은 여자의 제안을 바로 쳐냈다.
사실 이런 유혹은 하도 많이 당해 봤기에, 거절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자 여자는 타깃을 바꾸었다. 옆에 있던 차석진으로.
“어머, 귀여운 애기네. 오늘 누나가 밤에 노는 법 좀 알려 줄까?”
“아니, 그게…….”
어버버거리는 차석진 대신, 정명이 나섰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조용히 쉬고 싶어서.”
“그래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잘 가요!”
가게를 나온 뒤, 석진과 함께 차에 탄 정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귀찮게도 구네.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 케이크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아, 여기 네가 말하던 장난감도 들어 있다. 봐 봐.”
하지만 석진은 그토록 갖고 싶다고 하던 피겨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방금 나왔던 가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는 법… 알고 싶었는데…….”
*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났다.
다른 직종에선 아직도 쉬는 사람이 있기도 했으나 프로 게이머들은 그럴 수 없다.
지금부터는 막판 스퍼트를 올려서 최대한 실력을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팀원들이 분주하게 연습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연습실에 새 얼굴이 등장했다.
화려한 금발에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는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활기차게 외쳤다.
“이 몸, 등장!”
“어, 뭐야. 엄마가 여긴 왜 와?”
연습실에 들어온 것은 에리였다.
쿠론의 엄마이자, 전 OMA 팀원, 그리고 이제는 소설 작가를 해 보겠다며 글을 쓰고 있는 에리가 연습실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불렀어. 우리 팀도 이제 코치나 매니저를 둘 때도 됐으니까.”
“뭐야? 엄마를 스태프로 쓰겠다고?”
“그래. 우리도 이제 서포트해 줄 사람은 있어야지. 나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운전하는 거 힘들단 말이야.”
정명은 슬슬 자신의 일을 분담해 줄 스태프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전력 분석 문제도 아니고 픽밴 싸움 문제도 아닌, 경기장까지 갈 때 운전하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운전 가능한 사람이 다섯 명 중에 나랑 메테오밖에 없잖아. 30분씩 운전하더라도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 지금도 많이 늦은 거지.”
“그래도 왜 하필 엄마를…….”
쿠론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에리랑 같이 일한다는 것이 아직 제 엄마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일까 봐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정명은 자신의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야… 믿을 만하니까. 최소한 배신은 안 할 사람이잖냐.”
사람을 뽑는 데 있어서 정명은 예전에 비해 자신의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재능, 그리고 실력을 주로 봤지만 이제 정명이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바로 ‘믿을 만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였다.
‘이제 뒤통수 그만 얻어맞을 때도 됐지.’
곧 4년 차 프로 게이머가 되는 이 시점에서 정명은 그동안 수도 없이 믿음을 배신당해 왔다.
체감상으로는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였는데, 사실 정명이 불신병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엄청난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나를 벗겨 먹으려는 사람도 많아지겠지. 이러한 인선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연습실에 들어온 에리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연습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습 경기 일정이 적혀 있는 게시판을 얼떨떨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OMA와의 연습 경기 일정이 적혀 있는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 OMA랑도 연습해?”
“네. 이놈은 싫다, 저놈도 싫다, 계속 거르다 보면 연습할 팀이 아예 없어질 것 같아서.”
“아, 그래…….”
에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정명은 덧붙여 말했다.
“사실 사과도 받았거든요. 새 구단주한테.”
“사과?”
“네. 그 디클레어란 감독, 까기로 했어요. 이런 말, 어디 가서 이야기하진 마시고.”
“안 해, 그런 거…….”
사실 OMA와는 물밑에서 딜이 있었다.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정말 특이하게도 OMA의 구단주가 직접 연락을 해 왔는데, OMA와의 해묵은 감정을 풀고 연습 게임 교류를 해 달라며 직접 부탁해 왔던 것이다.
정명은 이제 연습할 팀이 슬슬 없어지고 있기도 해서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하지만 감독을 쿨하게 자르겠다고 하는 구단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파리 목숨이군, 파리 목숨이야.’
*
연승을 하는 것은 무척 힘들다. 컨디션이 매번 좋을 리도 없거니와, 수많은 경기를 치르다 보면 운 나쁘게 질 때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리그가 열린 이후, 아직까지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팀이 있었다.
북미 리그 역사상 제일 긴 연승 기록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 팀이 언제 패배를 기록할지, 혹은 언제까지 기록 갱신을 해 나갈 수 있을지를 기대하며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어, 뭐야? 사람이 왜 이렇게 몰려?”
차에서 내린 에리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수들이 도착하자 주변에는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쫙 몰리기 시작했는데, 에리가 현역으로 뛸 당시에는 전혀 겪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와요! 더 몰리면 답 없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겨우겨우 인파를 뚫고 온 에리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너희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팬들을 몰고 다니는 게 마치 GLG나 TBM같은 구단을 보는 것 같잖아?”
“거기서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이거나 좀 받아요. 이건 뭐야,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네.”
“크악, 무거워!”
정명은 팬들이 건네준 선물을 에리에게 건네준 뒤, 부스로 향했다. 에리는 남겨 둔 채였다.
“나 안 가도 돼?”
“받은 선물이나 좀 정리해 줘요.”
에리가 코치 명목으로 밴픽에 관여하기 위해 부스에 들어올 수는 있다.
하지만 에리는 아직 감을 완전히 찾지 못했기에 그다지 도움도 안 될 테고, 사실 밴픽에 대한 고민은 없다.
이미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정해 놓고 왔기 때문이다.
*
밴을 모두 마친 후, 첫 픽을 시작하기 전.
벨라는 정명에게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았다.
“그럼 지난번하고 똑같이 픽해?”
“그래. 이 정도의 팀에게 전력을 더 드러낼 필요가 없어.”
오늘 정명의 상대는 하위권 팀. 때문에 정명은 지난번 썼던 픽을 그대로 재활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상외로 경기가 질질 끌렸다. 상대 팀 측에서 꽤 분석을 많이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정명은 이번에도 역시 2 : 0으로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연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규 리그에서 승리하였습니다.]
-2 : 0 보너스 100%
-명문 구단 보너스 30%
-연승 보너스 50%
-11,00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휴, 이번에도 무사히 승리……. 연승을 이어 나가려고 하다 보면, 하위권 팀한테도 긴장하게 된다니까.’
경기가 끝나자 상대편 선수들이 악수를 청하러 왔고, 정명과 팀원들 또한 일어나서 그들을 맞았다.
방금 한 경기는 이번 리그에서 상대팀의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에 그걸 기념해서였다.
악수를 마친 정명은 자연스레 무대 앞으로 나갔고, 그런 정명에게 리포터가 다가왔다.
“플레이오프 1위 진출입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플레이오프는 12개의 팀 중 6위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중에서 1, 2위 팀은 4강에서 상대를 기다리게 되는데, 정명의 팀은 1위이면서도 연승이 깨지지 않은, 모든 북미 팬들이 주목하고 있는 그런 팀이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한 정명은 팀원들과 무대에서 퇴장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첫 출전에서 우승까지. 로열 로더가 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졌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