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프로게이머 146화-----------------
네오폴드와의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명과 다른 팀원들은 하나둘 부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지만, 네오폴드의 선수들은 아직 무대에 있었다.
그리고 정명은 해리와 그의 팀원들이 무대 위에서 팀원들과 으쌰으쌰 하며 승리를 다짐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명백한 보여 주기 식 쇼였다.
그 모습을 보던 메테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난 아직도 저 팀이 멀쩡히 굴러간다는 게 신기해. 아까 담배 피우러 가면서 잠깐 봤는데, 해리가 애들 엄청 잡고 있더라.”
“또?”
“어. 경기 시작 전인데도 별 쓸데없는 트집을 잡으면서. 애인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아주 극성이던데.”
그 말을 들은 정명은 킥킥 웃었다.
“아, 뭐, 비슷해. 나름의 방법으로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고 있는 것 같네. 물론 무척이나 안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메테오가 급하게 관심을 보였다.
벨라 또한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고, 진짜로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말을 알아듣지 못한 차석진밖에 없었다.
정명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으며 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거에는 서포터로 잘나가던 녀석이 왜 미드로 기어 나온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 정명이 제일 궁금한 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는가?’였다.
[해리]
피지컬 (86/90)
정신력 (73/89)
오더 (90/95)
판단력 (87/94)
‘높다. 평균 능력치를 보면 어지간한 한국 선수는 뺨 때릴 정도야.’
해리가 그렇게 양아치 짓을 해대는데 구단이 봐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월등한 실력.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바닥은 실력만 있다면 패드립을 치고 다녀도 용서가 되고는 했다.
그리고 해리는 정명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에서는 천재 서포터로, 그리고 현재에는유능한 미드 라이너, 혹은 천재 오더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피지컬이 86이라. 지금까지는 86으로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현재 북미를 전부 뒤져 봐도 피지컬 90을 넘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TBM의 트레브 정도가 90이었고, 곧 91로 올라갈 것 같다고 예상되는 상황.
따라서 라인전에서 적당히 사리기만 하면, 해리 정도의 피지컬로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다가 운영으로 승리. 네오폴드의 전형적인 승리 공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레브는 시작일 뿐이지. 신인들의 피지컬은 점점 좋아지는데, 해리가 앞으로 미드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제는 엄청난 피지컬을 지닌 신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고, 피지컬이 이대로 정체된다면 해리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정명은 예상했다.
과거의 해리가 괜히 서포터로 간 게 아닌 것이다.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명은 쓸데없는 잡념을 지운 뒤, 밴픽의 수 싸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다들 알지? 라인전에서부터 힘을 빡 줄 거야. 그냥 막 들이대자고. 컨트롤은 우리가 더 좋으니까.”
게임 시작 직후.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팀원들에게 운영법, 개싸움을 요청했습니다.]
*너에게 일기토를 신청한다!
-팀원들의 공격 성향이 대폭 증가합니다.
-팀원들의 피지컬이 소폭 상승합니다.
*와드 살 돈으로 칼 하나 더 살까?
-팀원들은 지금 앞에 있는 녀석을 찢어 죽일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시야가 좁아져, 갱킹에 취약해집니다.
운영법 스킬을 사용했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정명도, 팀원들도 평소와 같아 보이는 상태.
그리고 마침내 게임이 시작되었다.
[미니언이 생성되었습니다.]
게임 극초반.
인베이드 싸움이 없다면 해설자들이 선수들의 픽밴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경기 외적인 부분에 대한 잡담을 할 시간.
정명 또한 서서히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미니언을 하나하나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각,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떴다.
[퍼스트 블러드]
“엥? 뭐야?”
현재 라이너들의 레벨은 2.
3개의 스킬도 배우지 못한 극초반이다.
정명은 살짝 탑 라인으로 화면을 돌렸고, 탑에서는 벨라가 딸피로 헉헉거리며 귀환을 하고 있었다.
“아자!”
“뭐야, 벌써 킬이 나왔어?”
“영혼의 맞다이라고 해야 할까? 남자의 싸움이지!”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게임은 마치 중국 팀의 경기처럼, 끊임없이 싸움이 진행되었다.
차근차근 오브젝트를 먹거나 용 싸움을 유도하는 것 따위는 생각이 안 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개싸움이라는 말이 아주 딱 들어맞는 라인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
킬이 나올 때마다 팬들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열띤 호응으로 답했다.
이런 개싸움 전략은 비록 약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보는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명 또한 그런 개싸움에 합류하고 있었다.
“정명, 지금 미드로 젤리 내려가는데?”
“그래? 그럼 모른 척하고 있을 테니까. 벨라, 너도 내려와. 한판 붙자.”
미드에 핑이 찍혔다.
목표는 탑에서 내려와 부시에서 정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탑 라이너.
그리고 정명이 일부러 각을 주자, 네오폴드의 탑 라이너는 기다렸다는 듯 이니시를 걸었다.
[뚜루뚜 빠라빠라!]
젤리가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정명의 피싱맨은 재롱부리기 스킬로 여유롭게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역습이 시작됐다.
팀에서 가장 피지컬이 좋은 벨라와 정명. 두 명의 소규모 교전이었다.
-네오폴드, 제대로 낚였는데요! 이제부터는 컨트롤 싸움입니다!
-아이고, 해리 공기팡!
-태엽, 태엽!
-물고기, 물고기!
상황이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는 탓에, 해설자들은 베이비 토크를 하는 것처럼 간단한 단어들만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설자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거, 눈 호강했네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네오폴드는 피지컬 싸움으로 가면 안 돼요. 무조건 운영입니다, 운영.
라인전에서부터 게임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딱 한 라인, 밀리는 라인이 있었다.
평소에 팀워크가 그다지 맞지 않던 라인, 바텀 라인이었다.
-네오폴드는 바텀 라인만 믿고 가야 할 것 같네요. 봇 듀오, 라인 쭉쭉 밉니다.
-그런데 조금 불안한 것 같습니다. 귀환 타이밍 잡아서 와드를 사 와야 하지 않나 싶은데요?
하지만 밀리고 있던 것도 설계였다.
쿠론은 부시에 와드가 없다고 여러 번 신호를 보냈다.
평소라면 입 다물고 있었겠지만, 팀원과의 소통이 활발해진 것이다.
“시야도 없는데 뭘 믿고 저렇게 라인을 처밀고 있는지 모르겠군. 갱킹 와. 오면 바로 딴다.”
“그래? 시야가 없어? 없으면 갱 당해야지. 그리고 죽어야지.”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마침 네오폴드의 서포터, 지옥의 간수가 삼거리 부시에 와드를 박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포터가 와드를 박은 순간 본 것은,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메테오의 캐릭터, 타이탄이었다.
-쿠론, 더블 킬!
-제가 뭐랬습니까. 와드가 없다? 갱킹 오면 갱킹 당해 준다는 소리랑 똑같은 거예요.
경기에서의 기초적인 운영법은 초반의 이득을 바탕으로 이득을 점점 불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스노우 볼을 굴린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스노우 볼이 굴러간다고 하기엔 조금 컸다. 이득이 서서히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브젝트 컨트롤 따위는 개나 준 채, 오로지 전투. 전투만을 유도한 결과였다.
그러자 발악이라도 하듯, 정명의 시야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게이머 해리가 스킬, 냉혹한 지휘를 사용합니다.]
‘흠, 진작 쓰지 그랬어. 이미 늦은 것 같다만.’
네오폴드가 자랑하는 운영도 어디 비빌 건더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인전에서 터졌는데 운영을 해 봐야 소용없지만, 정명은 혹시나 하고 팀원들에게 경고했다.
“조심해. 쟤네 슬슬 운영 들어가려나 보다. 하나둘 뭉치고 있네.”
“이제서요? 진작 하지, 왜 지금에서야 운영 들어간대요?”
“그야… 라인전하느라 바빴나 보지. 해리가.”
정명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사실 미드 라인은 그다지 오더에 어울리는 포지션은 아니다.
바쁘니까.
잠시 한눈을 팔아서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곧장 상대에게서 공격이 쏟아지는데 한가롭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소한 라인전 단계에서는 팀원들이 알아서 잘해 줘야 한다. 아니면 정글러나 서포터 포지션에 오더를 맡기든가.
하지만 해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네오폴드의 팀원들은 이제 해리의 일방적인 오더에 익숙해져, 상당히 수동적인 플레이밖에는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리! 지금 사막악어가 우리 정글로 들어왔는데, 잡을까? 말까?”
“해리, 지금 용이…….”
“지금 바쁘니까 알아서 좀 해!”
온 맵에서 교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일이 오더를 내리고 있을 수는 없었고, 이런 운영을 처음 겪어 보는 팀원들은 허둥지둥거리다가 하나둘, 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히고 있었다.
쿨하게 오더를 내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성격 더러운 똥쟁이만 남아 있는 것이다.
네오폴드의 리더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인터넷 기사를 보던 메테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정명을 불렀다.
“오, 정명. 네오폴드에서 새로운 선수를 영입한 모양인데? 구단주가 유망주를 아주 비싸게 모신 모양이야.”
“엥? 지금 시점에?”
“아마추어였대. 그래서 가능했겠지. 뭐, 그래도 이번 시즌까지는 연습실에서 TV로 구경만 해겠지만.”
메테오는 그렇게 말하며 ‘아마 다음 시즌부터는 나오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예측했다.
네오폴드가 2:0으로 형편없이 깨진 후.
팀 전체적으로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네오폴드 구단은 적극적으로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번 영입이었다.
정명은 메테오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사진도 있네. 어디…….’
새로 영입했다는 사람은 흑인이었다.
마치 TBM의 트레브처럼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이, 운동깨나 한 사람으로 보였다.
정명은 그 사진을 보며 하하 웃었다.
“누가 보면 직접 나가서 싸우는 줄 알겠어. 근육이 저렇게 우락부락할 필요가 있는 거야?”
“큭큭, 그러게. 저렇게 근육이 크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째 흑인 선수들은 다 몸이 좋네.”
그리고 정명의 기억 속에서 이 소식은 빠르게 잊혀졌다.
자신에게 중요한 소식도 아니고 어차피 다음 시즌에나 볼 것 같은 선수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정명은 그 선수를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빨리 만날 수 있었다.
“정명, 어디 가? 곧 경기 시작하는데?”
“자판기. 음료수만 마시고 올게.”
오늘의 경기 상대는 꽤 쉬운 상대였기에, 곧 경기임에도 정명은 여유롭게 자판기로 향했다.
예전, 해리와 쿠론이 만나고 있었던 외딴 곳에 있는 자판기였다.
그런데 자판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 경기를 끝내고 이제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팀 네오폴드의 리더, 해리였다.
“야, 신입이 이따위로 말하는 게 꼽냐? 꼬와?”
“아니, 그게…….”
“꼬우면 고소 안 하기로 각서 쓰고, 스파링 한판 뜰까? 이 새끼, 말하는 거 진짜 엿 같네.”
정명은 처음엔 해리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해리가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구단에 새로 왔다는 흑인 게이머가 해리의 멱살을 붙잡은 채, 거칠게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던 정명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먹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부스로 돌아갔다.
‘구단이 아끼고 있다던 선수라더니, 견학이라도 온 건가? 아직 정식 멤버가 아닌데도 저 정도면, 다음 시즌에 팀에 합류한다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군.’
정명은 그 순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바뀔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어쩌면 해리가 이번 기회에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정명은 그러한 기대를 품으며 자신의 부스로 들어왔다.
부스에서는 팀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손을 풀고 있었는데, 쿠론과 차석진, 바텀라인 듀오는 AI 컴퓨터를 잡으며 손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정명은 멀쩡히 게임하고 있는 쿠론에게 다가가 볼을 쭈욱 꼬집었다.
“야, 석진이 좀 괴롭히지 말라고! 혼날래?”
“어어? 안 괴롭혔는데…….”
“진짜로?”
“지짜로…….”
정명은 그제야 볼을 놔주었고, 쿠론은 아프다는 듯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예전의 툭하면 짜증 내고 날카롭던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쿠론 대신, 차석진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 형. 그러지 좀 마요.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나중에는 저한테 지랄한다고요.”
“응? 진짜? 요즘은 안 그러지 않냐?”
“지금은 그냥 금연하는 사람이 잠깐 담배를 참는 것처럼, 변덕을 부리는 걸 거예요. 두고 보세요. 곧 성격 나올 테니까.”
차석진은 조금씩 바뀌는 쿠론의 태도를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의 경기는 무척이나 쉽게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