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프로게이머 136화-----------------
GLG, 북미 리그에서 두 번 정도 우승을 했으며, 준우승은 셀 수 없이 많이 한 북미의 강호.
그들의 끌어내린 뒤, 그들이 누리던 권리, 혜택, 이익 따위를 뺏어 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북미에서 우승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팬심은 참 오묘하다는 말이지.’
명문 구단.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구단’이 되는 것은 C90이라는 팀이 리그에서 TBM과 GLG를 꺾고 우승을 했을 때도, 정명이 몸을 담고 있었던 OMA가 월드 챔피언십에서 당당히 8강 진출을 했을 때도 이뤄 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퀘스트는 기회이기도 하지. 보자… 퀘스트는 4개의 단계가 있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 구조로 되어 있네. 즉, 1단계는 무척 쉽다는 말이겠지?’
첫 번째 목표는 GLG의 선수보다 많은 호응을 받는 것.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한참을 머리 아프게 고민하던 정명은 고민을 이어 나가는 대신, 책상에서 홀로 웅웅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장문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폐인게이머’를 연출하고 있는 PD, 마이클입니다. 사실 저희가 이번 방송이 100회 녹화인데, 특별한 날이니 만큼, 요즘 상승세인 정명 씨가 자리를 빛내 줬으면 해서…….]
‘이제는 PD가 직접 연락하네. 많이 급한가?’
뭐가 그리 아쉬운지, 이제는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PD가 직접 나서서 정명을 설득하고 있었다.
정명은 지난번과 같이 안 간다고 답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게스트로 GLG 선수들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낸 순간, 결심을 바꾸었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돌려, 자기들끼리 간식을 먹고 있는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에 예능 방송 알레르기가 있거나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안되시는 분, 계십니까?”
*
며칠 후.
정명과 같은 방송에 출연하게 된 GLG의 선수들은 차 안에서 이번 방송에 대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게스트가 누구라고 했지?”
“그… 쿠론하고 메테오가 들어간 팀 있잖아. 그 팀이라고 하던데?”
“아, 요즘 시끄러운 팀? 진짜 그렇게 잘하나?”
선수들은 아직 정명이 속한 팀의 실력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실력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붙어 봐야 안다.’라는 의견이 다수였던 것이다.
“아마 소문만큼은 아닐걸? 그 왜, 리그를 연출하는 PD가 영웅놀이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그래 봤자 중국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뭘 얼마나 하겠어.”
“동의. 6연승이라고 해 봐야 2 : 0승리를 세 번 했다는 뜻이고. 그런 기록은 우리도 얼마든지 갖고 있다.”
정명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은 정명을 중국에서 도망쳤다고 평했다. 빡빡한 한국, 중국 리그를 벗어나 북미 리그로 도망쳐 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30분 뒤.
방송국에 도착한 GLG 선수들은 오늘 방송이 진행되는 무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화장실. 너희 먼저 가.”
그러는 도중, GLG의 탑 라이너, 인덱스가 팀원들과 떨어졌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화장실로 향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는 한 팬을 보고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 귀찮네. 저쪽을 지나가려면 사진 찍어 주고 가야겠는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는 이런 경우가 꽤나 많았다.
그는 인기는 좋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하며 여대생으로 보이는 팬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GLG의 인덱스입니다. 같이 사진 찍으시겠어요?”
“네? 제가 왜요?”
“예?”
여대생은 별 사람 다 본다는 눈초리로 지나갔고, 인덱스는 상당히 민망해져서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뭐지? 일반인이 아니라, 방송국 스태프였나? 아쉽네. 내 스타일이었는데.’
하지만 그 이후로 마주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팬들은 그를 보고도 길가의 개똥을 보듯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평소에 그는 길거리에서 말을 거는 팬들이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 상황이 되니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냐, 귀찮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그래. 그런 거야.’
인덱스는 그렇게 자기암시를 하며 무대로 향했다.
*
그 시각.
방금 인덱스와 만났던 여대생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정명은 자신의 앞에서 훌쩍대는 팬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정명! 왜 이제 오셨어요. 흑흑… 진짜 기다렸는데…….”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음… 저 이만 녹화 들어가 봐야 해서.”
“예. 응원할게요!”
응원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당황스럽다.
정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송국 대기실로 들어왔고, 그런 정명을 차석진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형님. 그 전에 중국에서 명함 받았을 때도 그렇고, 참… 뭐라고 해야 하나, 혹시 페로몬 향수 같은 거 뿌리십니까? 있으면 저도 좀…….”
“그런 거 없다. 쯧쯧, 이상한 것에 의존하지 마렴. 석진아, 너는 일단 공대생 같은 체크무늬 남방부터 벗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키득대며 농담을 건넨 정명의 맞은편에는 GLG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섯 명의 선수들과 GLG의 코치.
그리고 정명은 그중에서 가장 얼굴이 잘생긴 게이머, 인덱스를 살펴보았다.
[인덱스]
피지컬 (81/92)
정신력 (69/83)
오더 (65/85)
판단력 (71/90)
‘저 사람이 GLG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라고? 제법이긴 한데, 역시 1티어 급 선수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스펙이 좋은 신규 선수 대신, 인기가 많은 예전 선수가 그대로 리더를 맡고 있다.
GLG의 성적이 왜 하락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형님, 저기 진행자가 뭐라고 하고 있는데 저거 뭐라는 겁니까?”
“너 아직 영어 안되냐?”
“아직이라니요. 저 이래 봬도 토익 점수 750점인 남자입니다. 곧 영어 마스터할 테니, 기다리십쇼. 그런데 저 대머리 아저씨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차석진이 말하는 대머리 아저씨는 오늘의 방송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방송국 PD였다.
정명은 대머리 아저씨의 이야기를 잠시 귀 기울여 들은 뒤,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늘 우리가 할 것은 AI대전인 ‘멸망전 봇’이래. 게임이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하다가 키보드 부수거나 모니터 때려 부수지는 말라고. 대신 과장된 리액션만 해 주라고 하네.”
“아아,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는 선수들이 툭하면 키보드랑 모니터 때려 부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일 없죠?”
“없어. 아, 곧 시작하겠다. 자리로 가라. 일 있으면 내가 챙겨 줄게.”
곧이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100회를 맞은 프로그램의 특별 게스트는 정명의 팀원들과 GLG 선수, 10명이었다.
“어렵게 모신 두 팀입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북미의 영원한 명문 팀, GLG!”
-와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방청석에서 개미 같은 호응이 들려왔다.
정말 마지못해 ‘박수 쳐 준다.’라는 느낌의 환영이었는데, 진행자뿐만 아니라 GLG 선수들 또한 그런 빈약한 반응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 네. 하하. 아침이라 아직 피곤하신가 보군요. 방송에서는 다른 오디오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다음 게스트는…….”
진행자는 빨리 넘어가야겠다는 듯 정명의 팀을 후다닥 소개했다.
그런데 그때, 방청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와아아아!
-사랑해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
GLG를 소개할 때는 시든 콩나물처럼 축 쳐져 있던 방청객들은 갑자기 생기가 넘친다는 듯 열렬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정명은 벨라에게 소곤대며 물었다.
‘야, 혹시 이거 팬클럽 애들…….’
‘얘기 들었어. GLG 팬들한테 속 좀 썩고 있었다며?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 줘야지.’
벨라는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었고, 정명도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근황 토크로 프로그램을 시작한 진행자는 이번 프로그램의 메인 메뉴, ‘멸망전 봇’을 시작했다.
“이번 AI는 진짜 어렵게 설정되었으니까 꼭 진지하게 해 주세요. 아셨죠? 난이도를 1레벨부터 100레벨까지 설정할 수 있는데, 선수 여러분들이 도전할 레벨은 100레벨이거든요.”
멸망전 봇.
컴퓨터만이 낼 수 있는 반응속도, 그리고 인공지능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스킬을 비정상적으로 강화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만든, 일명 즐겜을 위한 모드였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고작 AI인데. 스톤즈 리그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AI 상대로 지겠습니까? 하하!”
GLG의 선수들이 진행자의 당부를 비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난이도를 설정했다는 프로그래머는 오히려 GLG 선수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먼저 도전하는 것은 팀 GLG였다.
그리고 다음번에 도전하게 될 정명의 팀원들은 한쪽에서 구경하며 이야기를 하는 역할이었다.
“허, 어렵게 설정했다더니 이것 참… 보는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요?”
AI가 조종하는 캐릭터들은 컴퓨터답게 스킬을 엄청난 속도로 피해 냈다.
미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컴퓨터는 0.001초급의, 그야말로 찰나의 속도로 스킬을 피했는데 처음에 GLG 선수들은 그런 AI를 상대하며 욕을 하다가 나중에는 해탈한 듯 헛웃음만 지었다.
“미쳤다 이거. 저걸 어떻게 피해요? 스킬 하나가 광역기로 나가는데?”
“개발자 어디 갔어요? 이거 안 됩니다. 우리 시키지 말고 당신이 깨 봐!”
정명이 보기엔 과장된 리액션이 아니라 순도 100%자리 진심이 담긴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GLG 선수들은 금방 항복 선언을 했다.
“자, 첫 번째 도전 실패입니다. 그럼 다음 타자 준비해 주십시오.”
“아이고, 이건 한국 팀이 아니라, 어디 세계 올스타로 팀을 구성해도 못 깨요.”
GLG 선수들은 퇴장하며 몇 마디 불평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이 정명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너희들도 별수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정명은 앞에서 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AI의 허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저건 논타깃으로는 이야기가 안 되겠어. 타깃형 스킬로만 간다.’
컴퓨터가 논타깃형 스킬을 100%의 확률로 피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선택할 뿐이다.
정명과 팀원들은 자리에 앉아, AI와의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메테오. 강타 집어넣어요. 정글은 가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그러면… 저는 탑에 가면 되는 건가요?”
“예. 그렇죠. 탑에서 혼자 버틴다면, 타워가 너무 빨리 밀리는 것 같더군요.”
정명은 조금 특이한 전략을 취했다. 정글러를 정글에 보내지 않고 탑에 2명을, 즉, 2/1/2 전략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정명의 캐릭터로 쏠렸다.
“와, 진짜 진기명기네. 저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진행을 해야 하는 진행자조차 혼잣말을 하며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서는 정명의 캐릭터가 쏟아지는 스킬들을 마치 오락실의 비행기 슈팅 게임을 하는 것처럼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진행자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정명의 옆에 붙었다.
“정명 선수, 눈이 좋다고 들었는데 저 수없이 날아오는 스킬이 전부 보이시는 건가요?”
“예. 동체 시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좀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다 보이기는 해요. 그걸 피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요.”
-오오!
-대단하다!
정명의 말에 방청석에서 리액션이 날아온다.
방청석에 GLG의 팬들은 거의 없는, 정명의 팬클럽에서 단체로 왔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명의 오더에 따라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라, 혼자 탑으로 푸시해서 AI들을 끌어 모아. 그 틈에 우리는 억제기 밀게.”
“응.”
“석진아, 와드 살 필요 없다. AI야 어차피 동선이 뻔해. 너도 서포터 아이템 사지 말고 공격 아이템 사라.”
“예.”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리포터는 오오,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와, 이게 오프더 레코드……. 그러니까 오더로 운영하는 모습이죠? 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신기하다.”
“이걸 운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럽네요. 컴퓨터잖아요? 행동 패턴이야 뻔하니까 역할 분배를 한 것뿐이죠.”
“예? 하지만 GLG는 운영의 신이 와야 이걸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글쎄요. 멸망전 봇은 운영보다는 피지컬이 더 중요할 것 같네요. 그리고 약간의 꼼수만 더해지면 되겠죠.”
그 후, 정명의 팀은 두 번 정도 클리어에 실패했다.
수없이 날아오는 스킬을 피하지 못해 팀원들이 조금 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망의 세 번째 도전에서 정명은 치트키를 쓴 봇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그것을 끝으로 방송은 종료되었다.
PD는 방송 분량이 많이 나왔다며 연신 싱글벙글했다.
“와, 힘들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거 방송 언제 돼요?”
“10일 정도 후에요. 사람들이 끙끙대고 있을 때, 공략 방송으로 풀면 정말 시청률 잘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흐흐. 아무튼 고맙습니다. 역시 정명 선수에게 출연해 달라고 매달리길 잘 했어요.”
*
멸망전 봇이 대중들에게 공개된 이후.
사람들은 ‘GLG 선수들처럼’ 이걸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며 욕하기 바빴다.
하지만 일명 ‘공략 방송’이 공개되자 그제야 100레벨 클리어 인증샷이 속속 뜨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와, 무빙. ㅎㄷㄷ 동체 시력이라고? 진행자 말대로 정명한테 슈팅 게임 시켜 보고 싶네. 말 그대로 켠 김에 왕까지 깨버릴 듯.
-GLG애들 처음 실패한 것 보여 줄 때 이후로 거의 나오지도 않네. 대체 저기에 왜 나감? 혹시 중간에 집으로 간 것 아님?
-저 정도면 양심껏 출연료 반납해라.
‘이제 욕도 거의 없고, 후원금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제 개인 방송도 틀기만 하면 3위를 찍는 상태니…….’
아직 퀘스트 완료가 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명은 세상이 조금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갈수록 팀에 대한 주목도가 늘어나고 있었고, 수익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북미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제 다다음 경기에서 GLG만 한 번 잡아주면 퀘스트는 끝이다. 계획대로야.’
그런데 정명이 타도 GLG를 외치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정명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한국의 방송국에서 정명의 북미 도전을 촬영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정명은 자신을 빼놓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여기 다큐멘터리 방송에 나오면 두드러기가 난다거나 하시는 분,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