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프로게이머 119화-----------------
AAIG와의 경기가 끝난 뒤의 한가한 주말.
한가롭게 자신의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정명에게 연락이 왔다.
타 구단의 한국인인 김준상으로부터였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비엔비에 관한 이야기가 정리되었거든요.
“비엔비요? 걔가 왜요? 걔 이제 우리 식구 아닌데?”
-어… 전혀 신경 안 쓰고 계셨구나. 걔, 지난번 경기에서 못한다고 욕 엄청 먹었잖아요. 그거에는 정명 씨가 미드만 엄청 가서 계속 죽은 것도 한몫했거든요?
“아, 그래요? 하하. 신고식 제대로 치렀네.”
중국에서의 첫 무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고, 실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이 있으니 봐주세요.’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 것이 프로무대.
정명은 철저하게 약점을 후벼 팠을 뿐, 별로 악의는 없었다.
-가뜩이나 인성 문제로 잡음이 있었는데 실력까지 안 좋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감독님 말로는 일단 두고 보겠다고 했지만, 그 양반이 워낙 귀가 얇아서. 팬들이 하는 욕에 홀랑 넘어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붕 뜬 상태라고 봐야죠.
“아, 정말요? 이제 겨우 첫판 뛴 건데? 이래서 내가 주전으로 뛰겠다고 계약서에 명시 안 하면 안 간다고 하는 거라니까.”
식스맨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였다.
한 번 찍히면, 그대로 매몰될 수도 있다. 계약에 묶여서 다른 팀으로 가지도 못한다.
언제 출전할지 알 수 없이 벤치만 달구는 거다. 실전 감각이 점점 희미해지는 상태로.
-뭐, 그래도 꼴찌 팀이 상대라거나 하면 내보내긴 하겠죠. 진작 그래야 했는데, 감독도 무능력… 아, 이 말은 비밀로 해 주시고.
자신 팀의 팀원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음에도 김준상은 무척이나 신이 난 듯했다.
정명은 그 말을 들으며 비엔비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가 이래서 식스맨을 싫어하는 건데. 언제 나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으니.’
개인적으로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 동질감을 지닌 같은 한국인 게이머로서 조금은 동정이 갔다.
정명은 비엔비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다음 날, 한유리에게서 메일이 아닌,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혹시 그 얘기 들었어요? 비엔비에 관한 거”
“들었지. 팀에서 완전 쩌리 됐다고 하던데?”
“예? 쩌리 뭐요?”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걔가 왜?”
팀 내부의 사정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친한 선수끼리나 알음알음 이야기하는 것이지, 공개적으로 퍼뜨리고 다니면 즉시 징계감이니까. 때문에 지금 한유리가 말하는 것은 정명이 처음 듣는 정보였다.
그리고 한유리는 대답 대신, 이미지 파일을 몇 개 보냈다.
“뭐냐, 이건 또.”
한유리가 보낸 이미지 파일은 AAIG 구단을 욕하는 게시물로 가득 차 있었다. 구단에 비판적인 누군가가 SNS를 통해 익명으로 올린 것이었다.
-아, 진짜 빡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첫 경기라면 익숙하지 않아서 못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진짜 돈 보고 한다. 그래도 월급은 들어오니까. 경기에서 못 뛰면? 월급이나 축내고 있어야지, 뭐. 그럼 커뮤니티에서 욕먹지도 않겠네. 개이득.
게시물을 천천히 읽어 본 정명은 비엔비의 계정이 어째서 탄로 났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첫 경기에서 처참하게 깨졌다, 최근 인성 문제로 욕을 먹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누군지 유추 가능하잖아. 이거, 내 욕하다 걸렸을 때도 이런 식으로 걸렸나?’
한유리는 정명이 파일을 충분히 다 읽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뒷계 파서 욕했다던데요?”
“뒷계?”
“뒷계정이요. 멍청하게 또 걸렸지 뭐예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오빠 욕은 없네요. AAIG 팀 욕만 잔뜩 있지.”
하지만 그 대상만 달랐을 뿐이지, 정명과 XTC를 뒤에서 욕하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정명은 잠시 비엔비를 동정하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군. 뭐,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
다음 날.
연습실로 내려간 정명은 핸드폰 화면에 들어가기라도 할 듯 집중하고 있는 사오미를 볼 수 있었다.
‘쟤도 참 핸드폰 중독이다. 몸에서 떼어놓는 걸 못 본 것 같아.’
정명은 자신이 다가가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는 사오미의 뒤로 가서 슬쩍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말에 사오미는 펄쩍 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냈어. 네가 하도 집중하고 있어서 못 알아챈 것뿐이지. 그보다 그건 뭐야?”
“SNS요. 요즘 선수들은 대부분 한다고요.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정명이 ‘그놈의 SNS 좀 안 할 수 없나?’ 하는 표정으로 사오미를 바라보자, 사오미는 제 발 저렸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미리 말해 두는데 이번에는 노는 게 아니라 적들을 탐색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진짜로.”
“적?”
정명은 그제야 사오미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게시물엔 [오늘도 열심히 연습 중 ^^]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작성자는 정명도 아는 사람이었다.
“팀 ME의 선수네?”
팀 ME.
현재 중국에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월드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한 팀이었다.
당연히 정명도 그들이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월드 챔피언십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오히려 긴장감은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 왜, 우승자 징크스라는 것도 있잖아. 이번 시즌에 걔네 분명 설렁설렁할 테니까 걱정 마.”
“걔네는 우승 팀이 아닌데요?”
“아니, 아무튼 사람이 연습만 하고 살 수는 없을 거 아냐. 월챔에서 준우승씩이나 해먹었으면 쉴 때도 됐지, 안 그래?”
월챔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은 거의 대부분 직후의 윈터 리그에서 침몰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최선을 다해 연습했으면 재충전할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보통은 그 재충전의 시간이 윈터 리그였고.
그다음은 팬들의 부등호 놀이 차례다.
예를 들어 문페아는 비록 월드 챔피언십에 진출하지는 못한 팀이지만, 윈터 리그에서 세계 1위 팀, 네이보를 꺾었으니 문페아가 이제 세계 1위 팀이다. 문페아>네이보라는 식의 부등호 놀이.
물론 그 정도로 실력 있는 팀들은 윈터 리그에서 바보가 되었다가, 섬머 리그에서 다시 그 기량을 회복한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클래스는 영원하다’.
하지만 사오미의 의견은 정명과 조금 달랐다.
“하지만 ME 사람들, 월드 챔피언십에서 욕먹은 것을 만회하려는지, 엄청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요?”
“욕을 먹어? 왜, 설마 2위 했다고?”
“예. 최고가 아니면 의미 없잖습니까.”
가끔 중국 선수들, 혹은 팬들을 보면 사오미와 같은 말들을 하곤 했다.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한다. 1등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하지만 정명이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시험에서 77442등을 한다거나 프로게이머 수익 랭킹 352위 따위를 해도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진심인지, 그냥 입버릇처럼 말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상대방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정명은 팀원들을 모아 연습을 재개했다.
*
오늘의 연습 상대는 AAIG였다.
경기를 앞두고 있는 팀과는 연습을 할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직전에 서로 경기를 치른 팀과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오늘 할당된 팀 연습 게임이 끝났다.
[연습 게임 승리! 보상으로 3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수고했다. 오늘 팀 연습은 이걸로 끝, 개인 연습은 재량껏 해.”
“오늘 성적은 2승 2패네요. 마지막 판에 이겨서 다행이다. 똑같은 2승 2패라도, 저는 왠지 마지막에 지면 무척 짜증 나더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팀원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정명 또한 화장실에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던 찰나, 김준상이 말을 걸었다.
-XTC가 다음 주 ME랑 경기죠? 흐, 힘내십쇼.
“그래야죠. 지금껏 XTC가 한 판도 못 이겼는데. 이번에는 이기고 싶네요. 아, 팁 같은 거 없어요? 그래도 AAIG는 가끔 이기잖아요.”
-그거야… 걔네 컨디션이 별로이거나, 일부러 후반전 유도해서 이긴 게 대부분이었죠. 보통은 이기기 힘들더라고요. 아나, 한국 팀에서 활동할 때는 거의 안 졌는데.
김준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생활이 더 낫다고 했다. 한국에서 활동할 때보다 연봉이 배는 더 많다고 하며.
팀 ME. 정명이 슬쩍 본 결과, 팀 구성원 전부가 90 이상의 스탯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김준상이 활동했었던 팀, 팀 아서스……. 그때야 당연히 할 만했겠지. 그 팀도 다섯 명 전부가 에이스였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잠시 후.
잠깐 야식을 먹은 정명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솔로 랭크를 돌리기 전, 잠시 시스템창을 불러왔다.
[피지컬을 1 올리시겠습니까?]
[피지컬을 올리는 데는 19,0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연습 게임에서 얻은 포인트로 아슬아슬하게 스탯을 올릴 수 있었다.
정명은 점점 막대해져 가는 필요 포인트에 잠깐 한숨을 쉬고, 스탯을 올렸다.
[피지컬이 1 상승했습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89/100)
정신력 (82/100)
오더 (81/100)
판단력 (82/100)
‘음, 89, 89라. 전에 올릴 때는 18,000, 19,000포인트가 들었으니 다음에 올릴 때는 20,000 포인트가 필요하겠네.’
정명은 고개를 저으며 솔로 랭크를 시작했다.
사람들과의 합의에 따라 탑을 선 정명은 마우스를 움직여 보며,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감도가 좋아지긴 한 것 같은데… 애매하게 좋아졌는데? 티가 날 듯 말 듯한.’
하지만 피지컬 89라는 수치는 개나 소나 이길 수 있는 능력치가 아니다.
정명은 자신의 캐릭터, 설원 산적으로 상대방 캐릭터의 머리를 쾅, 내려쳤다.
-우오오오, 약탈이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음, 역시 이 캐릭터는 도끼를 내려찍는 맛으로 한다니까.’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들 데려다 놔 봐야,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정명에게 솔로 킬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리그에서 어느 정도 이름난 라이너들, 손가락 싸움에 어느 정도 자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정도뿐이었다.
정명은 상대방 라이너를 제물로 손쉽게 게임을 캐리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
그 시각, 팀 ME의 연습실.
팀 ME의 서포터, 샤우샤우는 터지는 넥서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와, 졌다, 이거. 부캐로 하길 잘했지, 하마터면 쪽팔릴 뻔했네.’
샤우샤우는 서포터였지만, 이것은 솔로 랭크. 어떤 라인에 가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번 경기에서 그는 탑 라인에 가게 되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뭐야, 0킬, 5데스, 5어시스트… 0/5/0? 미친, 킥킥킥…….”
“처웃지 말고 가라 좀. 상대도 프로였다고.”
옆에서 샤우샤우의 결과창을 엿본 다른 팀원, 오무가 참혹한 KDA를 비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샤우샤우는 서포터. 피지컬보다는 맵 장악 같은 머리싸움을 주로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프로가 솔로 랭크에서 이런 똥을 싸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으므로 기회가 생겼을 때 놀리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프로겠지. 이 점수대까지 올라왔음에도 프로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패자는 말이 없다.
샤우샤우는 입을 닫고, 다시 랭크 게임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일명 분노의 랭겜이었다.
‘아나, 초반에 솔로 킬만 안 당했어도… 버틸 만했는데, 중요한 순간에 속도를 못 따라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