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프로게이머 112화-----------------
정명은 이동호의 방송 출연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프로게이머라 하더라도 결국은 대중들의 인기로 먹고사는 직업인 이상, 방송에 자주 나간다고 해서 손해 볼 게 없었으니까.
며칠 뒤, 정명은 오랜만에 한국의 방송국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리그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직원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하긴, 리그 끝났다고 놀면 월급은 누가 주겠어.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지. 지금처럼.’
정명은 예전에 비해 상당히 달라진 건물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정명의 뒤로 자그마한 키의 남자가 다가왔다.
“저기… 정명 선수 맞으세요?”
“아, 예. 맞습니다. 작가님이신가 보네요.”
소심해 보이는 그 남자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였다.
작가는 어쩐지 피곤해 보였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처럼 보였다.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대충 아시죠? 그런데 오늘은 게스트가 꽤 많아요. 그러니까 부담 없이 하시면 돼요.”
정명이 오늘 참여하게 될 프로그램은 일종의 신작 게임 광고 방송이었다.
방송국에서 포장할 때는 ‘기대되는 신작 게임 추천’이라며 떠들었지만, 이렇게 포장하던 저렇게 포장하던 결국 본질은 신작 게임 광고였다.
촬영장으로 들어오니 오늘 같이 촬영하게 될 게스트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게스트들 둘러보던 정명은 촬영장 한가운데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저기, 사람 몰려 있는 건 뭐죠? 스태프까지 잔뜩 있는 것 같은데.”
“아, 저거. 세라 씨 구경하려고 몰려 있는 것 같네요. 아무리 남자들만 잔뜩 있는 프로 게임계지만, 그림이 좋아야 한다며 PD님이 섭외하셨죠.”
“세라? 외국인이에요?”
작가는 잠시 정명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금방 표정을 풀었다.
“아, 외국에서 지내셨다고 하셨지. 난 또 썰렁한 개그라도 하시는 줄 알았네. 세라 씨는 팀 키카오 프렌즈의 탑 라이너예요. 모르세요? 요즘 엄청 인기 있는데. 당연히 한국인이고요.”
“키카오 프렌즈……? 아하, 하니가 있는 팀 맞죠?”
“하니? 아, 예, 맞아요, 송하니 양. 근데 꽤 편하게 부르시네요?”
작가가 왠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기에, 정명은 적당히 말을 받았다.
“네, 뭐.”
“아무튼, 맞아요. 하긴, 요즘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던데 당연히 아시겠죠. 중국에서 활동하셨으면요.”
작가는 자기가 유명한 것도 아니면서 괜히 자랑스럽다는 듯, 정명에게 자랑했다.
정명은 그 모습이 말로만 듣던 ‘국뽕’인가 싶었지만, 이곳에서 자신은 외부인이었으므로 그런 작가의 자랑을 적당히 받아 줬다.
작가와 헤어진 후, 정명은 게스트들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벼운 인사만 해도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사회생활의 기본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정명은 아직 인사를 건네지 않은 마지막 사람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직 사람들이 몰려 있네. 귀찮은데 그냥 저 사람은 패스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명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여자는 벌떡 일어나서 정명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랜만이라니,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그 말에 세라는 허겁지겁 전에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제가 팀 키카오 프렌즈의 탑 라이너잖아요. 그 왜, PC방에서 한번 봤는데.”
“아, 맞다. 우리 피시방에 모여서 같이 연습한 적 있었죠? 죄송합니다. 꽤 오래전 일이라, 지금 기억이 났어요.”
세라는 서운한 표정을 짓다가도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더 기뻤는지,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하니가 섭외 전화를 받았었는데, 아직 정신적으로 회복이 덜 되어 제가 대타로 나왔어요.”
“월드 챔피언십 선발전 최종전에서 진 것 때문에요?”
“네.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졌었죠. 그게 많이 억울했는지, 하니는 한동안 방 안에서 게임만 했어요. 불쌍한 하니…….”
“평소대로의 모습 같은데요.”
이야기하기를 잠시, 스태프가 곧 촬영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다.
정명은 이야기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이름이 세라예요? 혹시 종교적 이름인가?”
정명의 말에 세라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뇨, 그건 아이디. 본명은 유리예요, 한유리. 그런데 세라라고 많이들 부르시더라고요…….”
“오, 사무라이. 이 캐릭터가 강해 보이는데요?”
“음, 그럼 저는 이 저격수 캐릭터요. 귀여워 보이는 게 마음에 드네.”
잠시 뒤.
프로게이머 열두 명의 신작 게임 플레이가 시작됐다.
[한 방이면 충분해여!]
정명이 고른 것은 저격수 캐릭터.
저격수라서 자리를 잡고 숨어 있어야 하지만, 정명의 귀여운 저격수 캐릭터는 총총거리며 맵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같은 편 게이머가 정명의 플레이를 지적했다.
“정명 씨, 그거 저격 캐릭터예요. 돌격 캐릭터가 아니라고요.”
“아, 그래요? 하하, 제가 FPS는 잘 몰라서.”
정명은 처음 보는 게이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약간의 꼼수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다른 게임이지만, 지금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까? 헤드 샷을 날리는 데 딱 1초면 충분할 것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확인 결과, LOH에서 얻었던 스킬을 여기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정명은 저격 총을 잡고 돌아다니다가 상대와 마주치자 급하게 스킬을 사용했다.
[1초 용사 스킬을 사용합니다.]
[용사, 등장!]
메시지가 뜨는 것과 동시에 효과가 나타났다.
정명은 이 스킬을 사용하면서도 참 저렴한 스킬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1초라고 해도 한 발 발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통상적으로 정명처럼 플레이한다면 게임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는, 트롤 유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명은 적과 마주친 그 짧은 시간 내에 줌을 당겨, 헤드샷을 맞혔다는 게 다른 트롤 유저와는 다른 점이었다.
[1초 용사 스킬의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용사, 퇴장!]
-크어어어억
적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뒤로 쓰러지는 광경에, 옆에서 핀잔을 하던 게이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방금 그거 뭐예요? 1초도 안 걸려서 줌을 당기고 맞힌 거예요?”
“운이 좋았네요, 하하”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기묘한 움직임이었기에, 정명은 스스로 조심하기로 했다.
이 짓을 여러 번 보여 준다면, 분명 쓸데없이 주목받을 테니까.
그 뒤로 정명은 무사히 방송을 끝낼 수 있었다.
방송을 끝낸 후, 정명은 다시 기간제 백수가 되었다.
친구들을 불러 놀려고 해도, 다들 야근이니 뭐니 하면서 바쁜 것 같았고, 아직 취업을 못 한 친구들 또한 스펙을 쌓아야 한다며 놀러 나오질 않았다.
결국 정명은 방바닥에 붙어, 혼자 게임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노는 것도 일주일이지, 이거 엄청 심심하다.’
그리고 그런 정명의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 방바닥에 붙어 있던 정명에게 일거리를 안겨 주는 전화가 걸려왔고, 다음 날 정명은 팀 키카오의 연습실로 향했다.
‘여자 다섯이서 사는 집에 찾아가려니 괜히 민망하네.’
정명은 아침부터 문자로 전해 받은 주소로 찾아갔다.
그곳은 키카오의 숙소 겸 연습실이었는데, 시설이 제법 좋아 보였다.
“계세요? 저기요?”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명은 문을 두드려 보다가 손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이게… 자기가 오라고 해놓고 어디로 간 거야?’
살짝 짜증이 난 정명이 초인종을 계속해서 누르자, 다행스럽게도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나야. 네가 불렀잖아.”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하니는 지금 막 일어났는지, 잠옷에다가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채로 정명을 맞이했다.
“뭐야, 지금 일어났어?”
“어.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내가 오라고는 했지만…….”
“일찍 이라니, 벌써 10시인데.”
“그런가? 암튼 어서 들어와.”
하니는 하품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고, 정명은 그런 하니의 뒤를 따라갔다.
‘이 녀석이 연예인급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저 모습을 보면 못 믿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송하니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다, 곧 게이머 때려치우고 연예인으로 활동할 것이다 하는 이야기들을 멋대로 하고 있었지만, 정명으로서는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하니는 처음 PC방에서 만난 후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으니까.
“들어와, 들어와. 오늘은 아무도 없어. 내 세상이야.”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소파 한쪽에 쌓여 있는 토끼 인형들이었다.
정명은 그중 하나를 집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뭐야, 이 바보 같은 토끼 인형은.”
“그거? 내 앨범 한정판 부록. 아, 때리지 마! 비싼 거거든? 지금은 웃돈 줘도 못 구해.”
“하하, 이상하게 생겼는데 보다 보니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네.”
“갖고 싶으면 하나 가져가든가. 나한테 많으니까. 아, 그건 내가 베개로 쓰던 거니까 엄청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한참 토끼를 주물럭거리던 정명은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왜 불렀어, 그래서?”
“음… 그게 있지, 잠깐 앉아 봐. 나랑 게임 한 판 해.”
정명과 하니는 둘이서 랭크 게임을 시작했다.
둘의 아이디는 그랜드 마스터 랭크.
프로라는 이름을 괜히 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높은 랭크에서도 연승을 거듭했지만,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하니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지금은 그때보다 실력이 올랐을 텐데, 왜 그때보다 떨어진 것 같지?”
“무슨 소리야?”
“몰라도 돼. 그런 게 있어, 응.”
정명은 하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체해 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때에 비해 실력은 많이 늘었지만… 당연히 그 느낌이 안 나겠지. 결속력이 부족한데. 그 아이템을 다시 갖고 온다면 모를까.’
정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송하니와의 결속력 수치를 열어 보았다.
결속력: 62/100
-오랫동안 우정을 쌓은 동료입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같은 화면에 있을 시 판단력이 +3 상승합니다.
‘역시 부족해. 같은 팀이 아닌 것치고는 이상하게 높기는 해. 하지만 그때처럼 하려면 결속력이 90? 95?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명은 시스템창을 끈 뒤, 다시 랭크 게임에 집중했다.
랭크 게임이기에, 정명의 라인은 정글이 아니라 탑 라인이었다.
상대방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본 정명은 곧바로 용사 스킬을 사용했다.
[1초 용사 스킬을 사용합니다.]
그와 동시에 집중력이 대폭 상승하여 정명은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상대방의 캐릭터에 붙은 정명이 빠른 속도로 스킬을 넣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이 정도야 우습지.’
송하니는 정명의 깜짝 컨트롤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어? 방금 그거…….”
“그거?”
“그거 뭐였어?”
“뭐가.”
“…아니, 아닌가?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오빠 생각보다 잘하는구나? 솔직히 나이 먹어서 감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라니, 우리 팀 그래도 중국에서 5위 했거든? 아직 죽지 않았어, 나.”
“오오오, 5위? 그런데 우리는 한국에서 3위했다고, 3위, 한국에서. 우리가 더 대단해”
빨리 칭찬하라는 뜻의 말이었지만, 정명은 흐흥, 대단하지? 하며 자랑하는 하니에게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 줬다.
“너 그래 봐야 최종전에서 떨어지지 않았냐?”
“하, 그건 오빠네 팀도 마찬가지 아님? 그래도 우린 5세트까지 갔어. 누구처럼 3 대 떡으로 지지는 않았음!”
“3 대 떡이든, 5세트 접전이든 떨어진 건 떨어진 거지. 바보 아냐?”
그 말을 끝으로 서로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이야기해 봐야, 서로 가슴 아픈 곳을 후벼 파는 대화였으므로 휴전이었다.
“오빠, 지금 놀지? 유리언니한테 다 들었어.”
“어, 그래. 그분, 생각보다 입이 가벼우시네.”
“암튼 잘됐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할 거 없으면 잠깐 용병 좀 해주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