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아줌마, 돈 갚아요 (1) >
정명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 주택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평범한 중산층의 주택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한 정명은, 주택을 응시하며 팔짱을 끼고 그 집을 품평하기 시작했다.
“흠, 역시 꽤 괜찮네. 한국처럼 여러 사람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아파트보다야, 훨씬 낫지 이게.”
정명이 보기에는 꽤 괜찮은 집이었다.
마당에 큰 개 한 마리도 기를 수 있을 것 같았고, 야채도 재배할 수 있을 법한 마당이 있는 그런 집.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서는 땅값이 무척 저렴한 깡촌까지 내려가야 부담 없이 지을 수 있을 법한 그런 집이었다.
‘집에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리고 정명은 그 집 현관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정명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전화도 안 받고, 뭐지? 아침부터 어디 나갔나?’
이대로 누가 올 때까지 캠핑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정명이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때문에 정명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며, 장난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계세요? 빌린 돈 갚으셔야죠. 100만 달러는 준비 되었겠죠?”
그러자 안에서 헉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빌린 돈 같은 것은 없는데요. 당신이 당장 꺼지지 않는다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평소에 헤헤 웃고 다니던 에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어조였기에, 정명은 무척 당황하여 다급히 말했다.
“에리! 나에요, 정명. 장난이었어요.”
“어? 뭐야. 정명?”
그제야 문이 열리며, 정명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나왔다. 평소의 에리였다.
“놀랐잖아! 다시는 그런 장난치지 마.”
“미안해요. 근데 뒤에 그건 뭐에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 어서 들어와.”
정명은 얼떨떨하게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에리가 뒤쪽으로 감춘 물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돈 갚으라는 소리를 해 말아? 저거 한 번 더 꺼내는 건 아니겠지?’
......
그리고 잠시 뒤.
에리는 정명이 미국에 온 이유를 듣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거 있지, 한 달만 더 미뤄주면 안 될까? 미안. 실망시켜서...”
“부담 갖지 마세요. 당신이 OMA에 들어와서 날 도와줬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 그거 안 갚아도 되는 건데.”
“그건 안 돼. 다음 달에 꼭 갚을게. 미안.”
에리는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면 돈 관계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정명의 도움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후로 에리는 정명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고, 정명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에리, 직장 새로 구했다면서요? 피닉스라는 팀의 코치라고 했던가.”
“응. 실력으로 인정받았다기보다는 딸이랑 1+1으로 들어간 느낌이 강하지만 말이야...”
에리의 새 직장은 팀 피닉스라는 프로게임 팀의 코치였다.
1부 리그의 하위권 팀이었기 때문인지, 에리가 이력서를 내자마자 어서옵쇼, 하며 곧바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월드챔피언십 8강 진출이라는 커리어는 현재 북미 선수들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업적이니까.
“원래는 OMA랑 안 좋게 끝나고, 이 업계를 아예 뜨려는 생각도 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끝나는 게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조금 더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당신은 머리가 좋으니까, 코치를 한다 해도 분명 잘 할 거예요.”
“정말? 솔직히 난 별로 자신 없는데. 사실, 우리 팀의 선수들이 말을 잘 안 들어. 내가 못미더운가봐.”
“그 녀석들이 에리의 진가를 몰라서 그래요. 하위권에 있는 팀에게는 과분한 사람인데, 그걸 모르네.”
정명의 아부에, 에리는 부끄러운 듯 헤헤 하고 웃었다.
“정말? 조금 불안했는데, 그 말 들으니까 안심된다. 헤헤.”
“그리고 그렇게 헤헤 웃는 것은 그만 둬요. 만만해 보이니까.”
“어...그래? 그럴까?”
“네. 더 악랄하게 대해야 애들이 말을 잘 듣죠. 아까 당신이 현관에서 저한테 했던 것처럼, 죽일 듯이 몰아치면 말을 잘 들을 걸요?”
원래 북미 쪽 선수들은 말을 잘 안 듣는다. 북미 선수들은 누군가의 말에 따르는 것 자체를 어색해 하기도 했고, 나이가 어리다보니 사춘기에 접어든 선수들도 많았으니까.
정명의 말에, 에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응.”
“그보다 애는요? 아침부터 연습하러 갔나?”
“지금 방에서 자고 있어. 보고 싶으면 깨울까?”
“됐어요. 그보다 아직 한 경기 남았죠? 힘내요. 조시랑 같이 응원 갈 테니까.”
지금 시점에서 북미의 스프링 리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중국이 일정을 서둘렀던 것이지, 사실 북미의 일정이 정상적인 일정인 것이다.
정명의 응원에, 에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음 같아서는 직접 뛰는 모습 보여주고 싶은데, 이제는 무리겠지. 그러면 수요일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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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정명은 조시의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시의 차지만, 운전은 정명이 한다. 조시가 손목이 아프다며 징징거렸기 때문이다.
“너, 손목은 어때? 병원에선 뭐라던?”
“병원이요? 당연히...안 갔죠. 여기서 치료받으려면 제 1년 연봉 정도는 털어 넣어야 할 걸요?”
조시의 손목은 간단한 수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악명 높은 미국의 병원비는 조시의 연봉 정도는 우습게 삭제시켜버릴 수 있을 정도였고, 이제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조시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음, 그냥 무리 안하고 있다 보면, 자연치유 되지 않을까요?”
“개소리. 너, 병원비 부담되면 한국 가서 치료 받아볼래?”
“한국이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국도 의료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거든. 병원비도 엄청 쌀걸? 미국에 비하면야.”
정명과 조시는 한국에 의료 관광을 가는 것에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라느니, 한국가면 살 빼고 새 사람이 되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 쯤,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수가 아닌, 순수하게 관객으로 경기장에 오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야, 조시. 저기 봐봐. 저기 피닉스 선수들 사이에, 에리 있다.”
“너무 멀어서 안 보이는데요. 저게 보여요?”
정명과 조시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명은 경기를 기다리며, 에리와 만났던 일에 대해 떠들었다.
“치료 다 받으면, 코치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지금 네 경력이면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조금...에리야, 머리가 좋으니까 코치가 어울리는 거죠. 전략 짜거나 밴픽 싸움 하는 것을 잘 하기도 했고요.”
“그치? 그런데 선수들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걱정이라더라.”
“가끔 그런 애들이 있긴 하죠.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은 무섭게 몰아쳐야 말을 잘 들어요. 마치 한국 팀들 처럼요.”
조시는 그들에 대해 정명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이 선수 생활을 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똑같은 결론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경기가 시작되자, 둘은 입을 다물고 경기에 집중했다.
오늘의 매치업은 1부 리그 하위권 팀, 피닉스. 그리고 그 상대는 평범한 리그 중위권 팀이었다.
순위가 5개는 차이나기에, 사실 피닉스가 이기기는 힘든 싸움이다.
하지만 그런 실력 차에도 불구하고, 에리의 딸 쿠론은 상당한 피지컬을 뽐내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리네 꼬마, 잘 하는데요. 17살이라고 했던가?”
“17살인가, 18살인가 그쯤 될 걸. 그런데 다른 팀원들이 영...”
쿠론은 혼자서 솔로 킬도 내고, 제법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팀에 대한 설명이 거기서 끝났다면, 팀 피닉스가 하위권으로 쳐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 팀의 문제는 다른 팀원들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명은 시야가 장악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나가다가 죽는 탑 라이너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휴, 저거 진짜. 나 같으면 멱살 붙잡고, ‘나가지 말고 타워 끼라고 했지 멍청아!’ 하고 욕이라도 해줬을 텐데.”
“예. 분명 그랬을 거예요.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저쪽에는 오더가 없나 봐요? 움직임이 영, 솔로랭크 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그렇다. 하위권이 괜히 하위권이 아니라니까? 하는 걸 보다보면, 문제가 명확히 드러나. 그리고 그건 단기간에 고칠 수 없는 문제가 대부분이지.”
둘이서 그렇게 악평을 하며 경기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둘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정명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명. 그 말 들으면, 저 팀의 선수들이 무척 속상해 하겠어요.”
“어라, PD님 아니세요?”
“예. 오랜만입니다. 오셨으면 얘기라도 좀 해 주시지.”
순위가 거의 굳어졌기에, 이 경기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청률도, 관객 호응도 별로인 상황에서 PD는 반쯤 졸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장에 정명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이곳으로 뛰어온 것이었다.
정명이 중국으로 팀을 옮긴 상태라고는 하나, 정명은 여전히 북미에서 한 손가락에 꼽는 인기 선수였으니까.
“혹시 방송 나오실 생각 없으세요? 리그 끝나고 방영할 특집 방송 컨셉 몇 개를 생각해 두고 있거든요.”
좋은 제안이었지만, 정명은 쉬러 왔지 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기에, 일단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고, PD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너무 힘들게 지냈더니, 조금 쉬고 싶어서요.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예. 생각 바뀌시면 연락 주세요. 오랜만에 팬들에게 인사 한 번 하셔야죠.”
그렇게 둘이 떠드는 사이에 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결과는 에리와 쿠론이 속한 팀 피닉스의 패배.
쿠론은 열이 많이 받았는지 무서운 얼굴로 다른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고, 에리는 그런 딸을 달래기 바빴다.
조시와 정명은 팀 피닉스에 대해 상당한 혹평을 하긴 했지만, 꽤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팀이라고 결론 내며, 경기장을 나왔다.
.......
다음 날.
정명은 다시 한 번, 에리의 집에 방문했다. PD가 제안한 방송 출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자 나온 사람은 에리가 아니라 그녀의 딸, 쿠론이었다.
“뭐야 넌. 엄마 없는데?”
“그래? 그럼 나 간다.”
에리의 딸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같이 있어봐야 어색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가려는 정명의 소매를 쿠론이 붙잡았다.
“야, 잠깐만. 이리 좀 와 봐.”
정명은 굳이 미국까지 와서 나이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쿠론의 태도가 심히 건방져 보였기에 거절했다.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은 안 듣는다.”
“아, 진짜!”
쿠론은 답답했는지 정명의 손을 잡아끌더니, 집 근처의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본 뒤, 담배를 꺼내어 칙칙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뭐야, 너. 버릇이 점점 안 좋아진다?”
“엄마한테는 말 하지 마. 그 아줌마, 네가 일러바치면 딸이 불량소녀가 되었다며 아마 3일은 펑펑 울 테니까.”
“잘 알고 있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일단은 눈감아 줄게. 일단은.”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쿠론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척 친한 친구의 딸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진짜 열 받는다. 그 멍청한 팀원들만 아니었어도, 그냥 이기는 건데. 이것 때문에, 내가 억울해서 어제 잠을 못 잤어.”
어제의 경기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눈치 챈 정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렇게 속상해 해? 어차피 순위도 결정되었고, 그렇게 중요한 경기는 아니었잖아.”
“복수해주려고 했단 말이야.”
“복수? 무슨 복수.”
“너는 자존심도 없냐? 억울하지도 않아?”
쿠론의 말은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비약되고 있었다.
결국 이 녀석이 물고 있는 게 혹시 담배가 아니라 마리화나가 아닐까 하고 정명이 의심할 때 쯤, 쿠론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번 우리의 상대, OMA였잖아. 복수해주고 싶었다고. 쯧, 엿 같은 팀원들 때문에 꼴사납게 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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