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98화 (98/226)

< 33. 대타출동 (3) >

며칠 지나지 않아, XTC의 승강전 매치가 다가왔다.

정명은 ‘지겹다 지겨워...’ 라 생각하며 방송국으로 향했지만, XTC의 탑 라이너, 티웨인은 방송국 건물 앞에 서서는 무척이나 감동이라는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사람 많네요. 저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라, 이런 광경은 처음 봐요.”

“그러냐. 나도 처음 봐.”

“예. 드디어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에요. 지금쯤이면 모든 가족들이 제 TV 앞에서 경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죠. 그러니까 최선을 다 해야 해요.”

티웨인은 쓸데없이 비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명은 이런 사소한 일에 감동을 받기엔 이미 상당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으므로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티웨인의 중압감을 풀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야, 캐리는 내가 할 테니까 맘 편히 1인 분만 해. 저기 우리 팀 서포터님은 당당히 잘 있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노점상 근처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XTC의 서포터를 가리켰다.

정명의 말 대로 서포터는 승강전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부담감을 갖고 있지 않은지, 핫도그를 사 먹으며 옆에 있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시우의 여자 친구네요. 부럽다...나한테는 대시하는 팬이 왜 없을까?”

티웨인의 말에, 정명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저 여자 그냥 팬이 아니었어?”

“네. 모르셨어요? 시우의 팬이었는데,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대시한 이후로 둘이 사귀게 되었다고 얘기 들었어요.”

“미친, 언제쯤?”

“2주쯤 됐나? 모르셨어요?”

“어. 전혀 몰랐네. 흠, 그래. 딱 저 녀석의 실력이 떨어진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는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맘 같아서는 지금 달려가서 왜 말 안했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의미 없는 짓인 것을 안다.

때문에 추궁은 나중으로 미룬 정명은,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시작 좀 해라 게으름벵이들아!

-위너스 선수 언제 나와요?

경기가 시작하려면 한 시간은 남아있는데, 팬들은 이미 관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XTC의 상대 팀을 열심히 응원하며, 흥을 내고 있었다.

“우리 팀을 응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네. 저 팀에서 뭐 유명한 선수라도 있어요? 성적도 낮은 팀이 인기는 많은 것 같네.”

정명의 말에 대답한 것은, 중국 프로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빠삭히 알고 있는 매니저였다.

“정확히는 있었죠. 꽤 유명한 선수였는데, 이번에 돈 더 받고 다른 팀으로 이적했어요. 대다수의 팬들은 그 선수 따라서 응원하는 팀을 옮겨버렸고. 뭐, 많이 빠져나간 뒤, 남은 게 이 정도에요.”

“그래?

그리고 정명과 매니저의 대화에, 처음 보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 말이 맞아요. 꽤 유명한 사건이었죠.”

“응? 아, 당신은...”

그는 중국 리그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해설자였다. 정명에게 다가온 해설자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의 상대 보셨어요? 리치리치 선수요. 요즘 감이 꽤 괜찮아 보이던데. 어때요?”

“예. 무척이나 대단한 선수죠. 저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치리치 선수는 정명 선수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말 다시 할게요. 그 선수, 별 것 아니에요.”

정명의 빠른 태세전환에, 해설자가 피식 웃었다.

“뭐에요. 3초 전에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다면서요.”

“여기 팬들은 겸손한 것 좋아하잖아요. 취향에 맞춰 드린 것뿐이에요.”

정명의 말은 딱히 지기 싫어서 오기로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아까 살펴본 결과 리치리치의 피지컬은 75정도였고, 정명은 그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피지컬이 60정도일 때는 1 올려봤자 별로 실감도 안 났지만 이제는 스탯 1을 올릴수록, 조금씩 느낌이 오는 것 같거든.’

......

1시간 뒤.

1부 리그 시드권 한 장을 건, 첫 번째 매치가 시작되었다.

상대 미드라이너의 캐릭터는 곰 마법사. 정명은 얼음마녀.

한타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정명의 캐릭터가 좋지만, 라인전만 봤을 때는 상대의 캐릭터가 조금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거는 한방 싸움이거든요?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인 싸움. 궁극기 먼저 맞추는 쪽이 이깁니다!

-피지컬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아무래도 리치리치 선수가 먼저 킬을 내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리치리치의 궁극기가 정명에게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명은 상대가 점멸+궁극기 콤보를 쓸 때마다 칼같은 반응속도로 피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의 스코어는 2킬 0데스가 되었다. 2킬 모두 솔로킬로 따낸 킬이었다.

‘결국 마법 방어 아이템을 두르고 왔군. 그걸로 조금은 덜 아프겠지만, 앞으로 20분 동안, 저놈은 노딜이다.’

정명이 경기 내내 라인전에서 압도했기에, 게임은 수월하게 풀려나갔다.

1경기, 2경기. 모두 정명의 캐리로 게임을 쉽게 풀어나갔고, 정명을 포함한 팀원들은 승강전에서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3경기에서 일어난 서포터의 실수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아니, 시우 선수. 정글러가 부시에 숨어있는데 힐을 주면 어떡합니까! 이런 초보적인 실수라니, 이 달의 워스트 top 3 안에 들 만 한 영상이군요.

그것은 해설 말 대로, 무척이나 초보적인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서포터 시우는 캐릭터를 공격적으로 전진시키며 외쳤다.

“야, 그냥 들어가자.”

“네? 하지만...”

“어차피 들킨 거, 그냥 들어가 임마!”

하지만 근처에는 상대방의 정글러도 막 도착한 상태였고, XTC의 바텀 라인은 그대로 역습을 당했다.

결과는 3:0 트리플 킬, 안타깝게도 XTC에서 일방적으로 킬을 내줘버렸다.

“야! 신입 시발 뭐 하냐 저거. 내가 저럴 줄 알았다. 생긴 건 기집애처럼 생겨가지고 저거.”

자신의 잘못도 크지만, 서포터는 기다렸다는 듯 사오미에게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LOH를 플레이하는 상당수의 유저들이 사용하는,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명은 그런 소리를 계속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만 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마라.”

“하지만, 이런 건 욕 먹으면서 배워야 한다고요. 좋게좋게 넘어가면, 똑같은 실수를 또 한다니까요?”

“알았어, 개자식아. 그만 닥쳐. 욕을 먹었으니, 넌 이제 조용해지겠지?”

정명이 무척 드물게 진심으로 화를 내자, 서포터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그 이후로 사오미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가뜩이나 첫 무대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동료로부터 거하게 욕까지 들어먹은 이후, 멘탈수습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명의 구멍이 생긴 덕분에, 스코어는 2:1, 그리고 2:2까지 따라잡혔다.

-이거 패패승승승 가겠는데요?

-10분 뒤, 단두대 매치가 시작됩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었군요!

사오미는 죄인처럼 모니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정명 때문에 말은 하지 못 했지만, XTC 팀원들은 한 번씩 그를 째려보며 지나갔다.

그리고 정명은 사오미를 째려보는 대신,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어후, 씨. 경기 처음 하는 애 멘탈은 왜 건드려 놔서는, 씨. 저거 짜를까? 열 받는데.’

정명이 그동안 아껴뒀던 C급 보물상자라도 열어야하나 고민하던 그 때, 한 사람이 허겁지겁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잠깐만요! 저 왔어요. 사오미 대신 제가 할게요!”

갑자기 등장한 조시의 모습에, 모든 팀원들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지금 비행기 타고 있을 시간 아니었어?”

“지금 당신들 박살나고 있는 거 보고, 곧바로 차 돌렸어요. 제가 대신 정글 잡을게요. 선수교체 되죠?”

“세트당 선수교체는 가능하긴 한데...너 정말 괜찮겠냐?”

조시는 대답 대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사오미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고, 사오미 대신, 조시가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선수교체가 진행되려 하자, 정명은 조시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야, 진짜로 괜찮아? 승강전이 중요하기는 한데, 네 손목만큼은 아니야.”

“조금 따끔거리기는 하는데, 괜찮아요. 한 판 정도야 당연히 문제없죠.”

“수술하면 프로게이머로 돌아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던데, 쯧. 그래. 은퇴경기라 생각해라. 나도 네가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할게.”

“말은 고맙지만, 저 손목 부러졌다거나 한 것 아니거든요? 거기다 아직 은퇴확정도 아니에요.”

괜찮냐고 계속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정명은 내심 무척이나 안도하고 있었다.

조시가 팀에 합류하자, 정명은 드디어 새로 얻었던 스킬을 꺼내볼 수 있었으니까.

[임시 동맹]

*특정한 팀원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습니다.

당신의 생각을 일부 공유할 수 있게 된 팀원은, 말로 오더를 내리는 것보다 더욱 정밀하게 당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줄 것입니다.

*조건

-사용자의 오더, 판단력 80 이상 -사용하는 팀원과의 결속력 65 이상 -결속력이 강할수록, 더욱 완벽한 연계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이 능력은 오더, 그리고 판단력 스탯을 80까지 올렸을 때 나타났던 능력이었다.

상당한 포인트를 소모하여 겨우 얻은 능력이건만, 조시가 빠지는 바람에 사용하지 못 했던 능력이기도 했다.

결속력 65라는 조건이 충족되는 팀원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조시밖에는 없었으니까.

정명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곧바로 스킬을 사용하였고, 처음 쓰는 스킬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아하, 이거 그때 그거 같은데.’

그것은 예전, 송하니와 팀을 맞추고 솔로랭크를 돌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것 같은 그런 느낌.

물론 그때보다는 훨씬 희미한 감각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제법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괜찮네. 포인트를 갖다 부은 보람이 있다, 이 능력은.’

뭔가 좋은 느낌을 받은 정명은, 정글러가 초반 오브젝트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조시를 불렀다.

“이거, 잡자. 공허마법사는 6렙 전에 따 놔야지 편해.”

“그렇죠. 궁극기 배우면 갱킹 성공확률이 확 떨어지니까.”

굳이 입으로 3, 2, 1 따위를 세지 않아도, 둘은 비슷한 타이밍에 진입했다.

-리치리치 선수! 손도 못 써보고 킬을 헌납하네요. 사실 뒤를 내준 순간부터, 도망갈 수는 없었죠.

-멋진 연계입니다! 새 정글러를 투입하자마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네요! 어라, 근데 미드로 또 가나요?

그 후, 조시는 다른 라인은 다 버리고 미드만 파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정글러가 도와주러 와도 소용이 없었고, 공허마법사를 잡은 리치리치의 스코어는 어느새 0킬 5데스 까지 벌어지며, 골드 자판기 신세가 되어 있었다.

-조시 선수가 저렇게 잘 하는 선수였나요? 전의 경기 기록을 보면, 평범한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제 생각으로는 중위권 팀인 레티오스의 바텀 듀오와 비교될만한 팀워크라고 생각합니다. 북미에서 왔다고 절대 무시할 수 없겠어요!

킬을 잔뜩 먹고 둘이 맵을 휩쓸고 다닌 결과, 20분 만에 경기를 끝내버렸다. 5경기까지 간 접전 치고는, 마지막 경기는 조금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 부스에서 나온 조시는 멋쩍게 웃었다.

“인생경기였네요. 제가 프로게이머를 한 이래로, 제일 만족스러운 한판이었어요.”

“그래.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치료를 받고 나오면, 또 해 보자고.”

정명이 상대방 부스를 바라보니, 부스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아까 멘탈이 완전히 나갔던 사오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정명과 조시는 무대 앞에서는 무표정으로 있었지만, 직원용 복도로 나오자마자 큭큭 웃기 시작했다.

“표정 봤어요? 처음에는 2부 리그가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 진짜 바보 같다.”

“아무리 졌어도 그렇지, 표정 장난 아니더라. 무슨 인생 끝난 것처럼 있더라니까.”

“드디어 실감이 나서 그래. 자신의 팀이 2부 리그까지 떨어졌다는 것 말이야.”

“응?”

뒤에서 들리는 낯선 남자의 말에, 정명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갑자기 나타난 중년의 남자는 자신을 방송국의 CP라고 소개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그보다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실감이 나다니.”

“대단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그 선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지. 중위권이었던 팀이 한 사람이 빠지자마자 2부 리그로 왔으니까, 이제는 자신들은 들러리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도 된 거라고 봐.”

“음, 잘 하던 사람이었나 봐요.”

“그렇지. 혼자서 하위권 팀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니까. 아 참 그리고.”

CP는 정명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씩 웃었다.

“최고의 리그에 입성하게 된 것을 환영해. 앞으로는 고생 좀 해야 할 걸?”

CP는 그렇게 말하며 정명에게 악수를 청했고, 정명은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요. 그런데 최고의 리그는 한국 리그 아닌가 싶은데요?”

“아니야. 중국 리그는 세계 최강이야. 중국에서 활동하려면 앞으로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알았어?”

“어휴, 이놈의 중화사상...알았어요. 그렇다고 합시다.”

@@@@@

그리고 그 다음 날,

조시는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고, 정명 또한,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조시는 팔이 아픈지 손목을 주무르다가 말을 꺼냈다.

“저야 병원에서 정밀검진 받아본다고 가는 거지만, 정명은 굳이 미국으로 갈 필요 없지 않아요?”

“원래는 그랬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네. 세입자가 월세가 밀리고 있어서 한 번 가보려고.”

“아, 맞다. 그동안 번 돈으로 방송국 근처에 집하나 사셨다고 했죠?”

원래는 생각이 없었지만, 투자 개념으로 하나 구입한 집이었다.

지금 사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정치인의 말에, 조금 충동적으로 구입한 집이기도 했다.

“사긴 샀는데 자리 오래 비울 것 같으니까 월세 놨지 뭐. 그런데 월세도 엄청 싸게 줬는데 두 달째 밀리네. 무슨 일이 있나?”

“나 참. 그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집구하기도 엄청 힘든데, 염치도 없이. 쫒아 내버려요.”

정명은 무척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혼자 딸 키우는 아줌마라 불쌍해서 사정 봐줬던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쫒아 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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