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북미의 자존심 (4) >
조 추첨식이 끝난 뒤.
정명은 연습실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누워 끙끙대기 시작했다.
“어휴...어쩐지 캡슐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이런 개 같은 결과가......”
“어떻게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요?”
“뭐랄까. 그 캡슐이 왠지 특별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마치 ‘날 뽑아줘’ 하는 것 같았거든. 근데 뽑았더니 낚였네, 낚였어.”
“흠. 특별하긴 했네요. 랭킹 1위 팀과 경기할 수 있는 티켓이었으니까. 그것보다 이거 드실래요? 조 추첨식이 끝나고 이것저것 받아왔는데.”
한국의 1위 팀과 붙는 것은 OMA에게는 불행이지만, 다른 팀에게는 축제였다.
때문에 조 추첨식이 끝나자마자 다른 팀들은 위로 겸, 놀리는 겸 해서 OMA에게 선물을 보내줬다.
정명은 그 중에서 화려하게 생긴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고, 과자를 입에 넣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맛도 더럽게 없네. 뭐야? 이건.”
“그건...뭐더라? 아, 로얄 패밀리아의 매니저라는 사람이 준 과자요. 중국에서 인기 있는 거라던데.”
“에이씨, 맛이나 좀 있는 걸로 보내지. 더럽게 맛없네.”
정명은 메이가 줬다는 과자를 몇 번 씹더니, 휙 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팀원들을 돌아봤다.
“뭐...힘든 싸움인 건 맞지만,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있을 경기는 분명 앞으로의 게이머 생활에서 큰 경험이 될 테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할 수 있다!”
조금 힘이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승률이 희박한 싸움이라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OMA는 그날 저녁부터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
연습을 할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 추첨식 이후, 연습할 시간은 3일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어느 새 북미 3위 팀과 한국 1위 팀이 8강전을 치르는 날이 밝았다.
“OMA! OMA!”
“오늘 경기도 힘내요! 꼭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정명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팬들의 손을 맞잡으며 무대로 올랐다.
관객들은 한국 팀 보다는 OMA를 응원하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압였다.
현재로써는 오랫동안 정상에 있었던 한국 팀이 더 인기가 많은 것은 맞지만, 지금처럼 실력의 차이가 명백할 때는 약팀을 응원해주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뒤.
마침내 1경기가 시작되었다.
정명은 상대방에게 들릴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평범하게 흘러가면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하고는, 조금 도박적인 수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인베이드 가자. 그걸 위해서 고철로봇을 뽑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레벨 5:5 싸움인 인베이드.
도박적인 수중에 가장 리스크가 낮은 전략이었기에, OMA는 부담 없이 그 전략을 꺼내들었다.
-OMA, 달립니다. 인베이드에요!
-1레벨 싸움에서는 OMA가 이길 것 같거든요? 상황도 좋아요!
하지만 한국 팀의 대응이 완벽했다.
인베이드가 실패로 돌아가자, 북미의 해설자는 아깝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와드 박고 빠집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대응이네요.
‘이거 뭔가 쎄 한데.’
정명은 왠지 지난 번 한국전에서 있었던 럭키펀치가 두 번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들을 만만히 보기는커녕, 3일간의 연습시간동안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베이드가 실패한 이후, 경기는 조용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타는커녕 소규모 국지전도 잘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 팀이나 OMA측에서 특별한 실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골드차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싸움 한 번 일어나지 않았는데, 야금야금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새 역전이 힘들다고 여겨지는 마의 1만 골드 차이까지 벌어졌습니다. 이게 바로 한국팀이 자랑하는 운영의 신비인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아, OMA. 결국 GG를 선언하네요.
1경기를 패한 뒤, OMA의 부스 안.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명은 아껴뒀던 버프스킬을 사용했다.
[승리의 오오라 : 팀 전체의 결속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승리의 기운이 팀원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액티브 스킬을 발동하면, 1시간 동안 팀원들의 집중력이 20% 상승합니다.
-쿨타임 : 24시간
‘좋아, 팀원들의 표정이 한결 나아 보이는군. 이번에야말로...’
두 번째 경기의 전략은 장기전이었다.
16강전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 팀을 꺾었을 때 썼던 바로 그 전략.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은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평온하게 진행되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상대방이 라인전에서부터 강하게 압박을 해왔던 것이다.
-방랑마법사, 솔로 킬! 정명의 탈주닌자를 잡아내며 1킬을 기록합니다!
-정명 선수가 솔로킬을 당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죠?
-바로 그렇습니다. 월챔에 와서는 처음이죠. 북미 리그에서 솔로 킬을 당한 것은 잘 기억도 안 나고요.
‘젠장, 하필 전부 타겟형 스킬을 갖고 있는 캐릭터라서 피할 수도 없잖아.’
실력이 엄청 뛰어나다고는 해도, 캐릭터 스킬의 투사체가 더 빨리 날아오지는 않는다.
잘하건 못하건 스킬이 날아오는 속도는 똑같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명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좋은 눈으로 상대방의 스킬을 피할 자신이.
하지만 상대방이 고른 캐릭터의 스킬은 논 타겟형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종류의 타겟형 스킬이었고, 정명은 스킬을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주어야 했다.
정명이 솔로킬을 당하는데, 다른 팀원들은 오죽할까.
다른 팀원들은 진작 솔로킬을 내준지 오래였다.
결국 20분 뒤, OMA는 GG를 선언했다.
-GG! OMA, 2:0으로 패배하며 4강 진출에 실패합니다!
-OMA, 기죽을 필요 없어요. 졌지만 잘 싸웠습니다. 첫 번째의 도전에서 이 정도면 잘 한 것 아니겠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예. 다들 수고했어요.”
시작 전부터 이기기 힘들 거라고 얘기하고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선수들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정명 또한 자신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새로 뜬 메시지 창을 열었다.
[결과]
월드챔피언십에서 탈락했습니다.
스크롤을 내려, 월드챔피언십의 통계를 확인하십시오.
평균 경기시간 : 35분
현재 속해있는 팀 : OMA
-종합등급 C+랭크
-결속력 B랭크
-선수의 평균 능력치.....
......
마지막에 대결한 팀의 등급 : A랭크 (예상 승률 4%).......
.......
‘진짜로 끝났나 보군. 하,’
언제나처럼, 메시지창이 뜨는 것을 봐야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하는 정명이었다.
정명의 첫 월드챔피언십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
그날 밤.
모든 선수들은 그날 잠을 자지 못했다.
정명은 캔맥주를 까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에효, 하필 그 캡슐을 뽑아서는. 그 때, 만약 유럽 팀처럼 더 해볼 만한 팀이 걸렸다면...아니, 하다못해 중국 팀이 걸렸다고 해도 이거보단 더 괜찮았을 것 같은데 한국 1위 팀이라니 재수도 없지.”
정명의 자책에, 코치가 하하 웃었다.
“아냐, 좋은 쪽으로 생각 하자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길만한 팀은 거의 없었어. 아주 객관적으로 보자면 말이야.”
“너무 솔직하시네요.”
“그래. 그러니까 어차피 8강에서 떨어질 거였다면, 한국 팀이랑 붙는 게 낫다는 거지.”
“왜요? 그래도 2:0이면 너무 무력하게 보이는 것 아닌가?”
“변명 거리가 생기잖아. ‘크윽, 하필 상대가 세계랭킹 1위 팀이라 졌어.’라고 해야 할까? 이른바 명예로운 패배를 당하는 거지.”
“그렇군요. 앞으로 연습하기 전에 한국 방향으로 세 번 절해야겠어요.”
코치와 정명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멀뚱멀뚱 있던 에리가 정명을 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뭐 해?”
에리의 질문에, 모두들 입을 닫고, 정명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정명은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야....집에 가도 되고, 한가롭게 파리 관광이나 해도 되고.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우르르 몰려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난 좀 쉬어야겠어. 나이 먹으니까 힘들어. 먼저 비행기 타고 갈게.”
“고생했어요 에리. 미국에서 봐요. 조시는 디즈니랜드 간다고 했던가?”
“네. 말만 하면, 디즈니랜드 티켓 준다던데. 공짜로 가는거면 두 배로 재밌지 않을까요.”
조시의 말대로, 탈락한 팀에게는 주최 측에서 디즈니랜드 이용권을 제공했다. 어차피 떨어진 거, 놀다 가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찍 탈락한 팀=디즈니랜드로 놀러감 이라는 공식이 생겼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조기에 탈락하여 기분이 거지같은 것은 둘째 치고, 팬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까.
‘그따위로 해서 떨어진 주제, 아주 신났다?’ 같은 소리를 들을 바에는, 그냥 다음에 자기 돈 내고 가는 게 백번 낫다.
팀원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정명은 굳이 서둘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유럽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부터 연습실에 나온 정명은 연습실에 오자마자 솔로랭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정명의 아이디를 알아본 유럽의 사람들이 정명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mingming : 정명선수 아님? 집 안가고 뭐해요 여기서.
-솔로랭크 1위나 먹으려고요. 다른 사람들 없을 때를 틈타서.
정명이 유럽 서버에서 개인 연습 겸 솔로랭크를 돌리다보니 느낀 것이 있었다.
월챔에 참가한 팀들이 하나 둘 탈락할수록 솔로랭크를 돌리는 프로들도 갈수록 줄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월챔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
이제는 솔로랭크에 프로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죄다 아마추어이거나 유럽의 2부 리그 선수들만이 솔로랭크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명에게는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빈집털이지. 덕분에 포인트를 쉽게 날로 먹을 수 있겠어.’
[솔로랭크 퀘스트 (EU)]
솔로랭크에서 1위를 차지하십시오.
*보상
-포인트 11000
-명성 300
퀘스트를 다시 한 번 읽은 정명은 의욕을 불태우며 계속해서 솔로랭크를 돌렸다.
CoolTime : 야호! 정명이 같은 편이다. 이 판은 업혀가겠네.
Zoro : 정명이 버스 태워주는 판이니까, 1인분만 하자. 그러면 알아서 캐리해 줄듯!
세계무대를 준비하느라 감이 빠릿빠릿한 것을 넘어, 최고조에 이른 정명을 상대하기에는 아마추어들은 너무 약했다.
거기다가 정명이 무대에서 보여준 게 있었기에 솔로랭크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명의 오더를 잘 따랐고, 덕분에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승을 따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솔로랭크 랭킹이 97위로 올랐습니다.]
[솔로랭크 랭킹이 85위로 올랐습니다.]
[솔로랭크 랭킹이 75위......]
그렇게 5연승, 10연승을 달리던 정명은 전적 40승 15패라는 엄청난 승률을 보이며, 당당히 유럽서버 1위에 올랐다.
정명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퀘스트를 달성했던 것이다.
[솔로랭크 퀘스트]
유럽에서 솔로랭크 1위를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1000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명성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현재까지의 솔로랭크 성적
한국 - 5위
북미 - 10위
유럽 - 1위
중국 - Unranked
*기억해두세요!
모든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한다면,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대륙에서 1위? 어휴, 그 짓을 언제 하고 있냐. 이 퀘스트를 달성하는 건, 매우매우 먼 훗날일지도...’
정명은 일단 11000 포인트를 얻은 것만 해도 대만족이었다.
솔로랭크 1위도 찍었고, 모든 볼일이 끝난 상황.
하지만 정명은 아직 유럽에 남아있었다.
기왕 늦어진 거, 결승전은 보고가자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 이번에는...역시 중국과 한국의 대결인가. 보통은 그렇지. 한국대 한국이거나, 중국 대 한국이거나.’
정명이 솔로랭크를 돌리는 동안, 월드챔피언십은 8강, 4강전까지 진행되었다. 남은 것은 결승전 뿐.
마침내 시작된 결승전에서 정명은 보는 내내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대단하다. 한국 팀도 물론 잘하지만, 중국 팀도 엄청 잘한다. 우리랑 붙었으면 꼼짝없이 졌겠어.’
그리고 3시간 뒤.
OMA를 꺾었던 한국 팀이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월드챔피언십이 마무리되었다.
......
이로써 월드챔피언십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이제 OMA의 연습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연습실이 텅텅 비어있었다.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간 팀원들은 물론이고, 파리에서 관광하던 다른 팀원들 또한 이미 미국으로 돌아간 상황.
홀로 쓸쓸히 남겨진 정명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메일함을 보고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네. 가서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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