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81화 (81/226)

< 27. 북미의 자존심 (3) >

-GG! 북미 팀이 한국 팀을 꺾고, 8강에 진출합니다!

-OMA가 북미의 체면을 살려주는군요! TBM과 C90 대신 말입니다!

정명이 사용했던 오오라 스킬의 효과가 끝나갈 정도의 장기전이었다.

그 치열할 싸움에서 OMA는 한국 팀, 팀 메그를 꺾고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진짜...힘들다. 한 판 했는데, 그냥 힘이 다 빠졌어.’

정명은 의자에 기대어,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한판 했음에도 이상하게 피곤한 기분이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정말로 승리했음을 알려주듯, 정명에게 퀘스트 완료 창이 떴다. 그리고 정명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16강 조별리그 통과!]

이것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한국 팀을 꺾고 북미의 자존심을 지킨 이 경기는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입니다.

-20000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C급 선물상자가 지급되었습니다!

“하하,...진짜로 이겼나보......”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8강 진출이다!”

“C90, TBM 다 꺼지라고 해! 우리는 8강 간다고!”

뒤에서 큰 소리가 나 정명이 고개를 돌리니, 코치를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이 부스로 하나 둘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OMA 팀 관계자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방방 뛰며 기쁨을 표현하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거나.

에리나 조시처럼 마음 약한 선수나 스태프들은 이미 흐느껴 울고 있는 중이었다.

“으흑,어흑....힘들었어...”

“흐엉....엄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우승이라도 한 모양새였지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정명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정말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군. 내 모든 걸 쏟아 부은 한 판이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흐른 뒤.

겨우 감정을 추스른 사람들이 하나 둘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선수들이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관중석에서 경기장을 가득 채운 3만 관중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미국에서 응원하러 온 보람이 있다, 잘했어!”

“여기요, 여기!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제발!”

이렇게 큰 경기장이건만, 관중석 맨 앞쪽에 있는 사람들의 말은 은근히 잘 들렸다.

정명은 앞에서 열정적으로 소리치고 있는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자신의 부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밖에 나와 있었던 한국 선수들이 서 있었다.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들은 아니네. 뭐, 하긴, 이번에 졌다고 해서 조 2위로 밀려난 것도 아니니까.’

OMA의 선수들은 그들과 한명한명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정명은 아직도 훌쩍이며 콧물을 닦고 있는 다른 팀원들 대신, 리포터와 간단하게 인터뷰를 했다.

“8강에 진출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네, 고마워요.”

인터뷰는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기분은 어떠냐, 전략은 어떻게 준비 했냐, 선수들의 집중력이 참 좋은 것 같다 등등.

그렇게 평범한 인터뷰가 끝나갈 때 쯤, 정명이 손에 힘을 불끈 쥐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요? 부모님이라던가, 혹은 애인에게.”

“아, 예. 이런 무대에 서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어요. 애인이나 가족은 아니고, 제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요.”

“오, 그래요. 한국의 연습생 생활은 무척 가혹하다고 들었어요. 어려운 시절에 맺은 인연은 특별한 법이죠. 얼마든지 얘기하세요.”

정명은 카메라를 보며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마치 한을 풀듯 외쳤다.

“프로게이머는 때려치우고 기술이나 배우라며 날 무시했던 놈들아! 내가 너희보다 성공했다. 보고 있냐!”

그 말을 끝으로, 정명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

그날 저녁.

정명은 노트북을 켜고, 오랜만에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원래는 멘탈 관리 측면에서 멀리하던 레딧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잠깐 반응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커뮤니티에는 온통 OMA의 이야기로 도배되고 있었다.

사실 레딧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오늘 경기로 인하여 게시판이 뜨거워진 상태였기도 했다.

seipo : 저 녀석 인터뷰 하는 꼬라지가 참 한심하네. 연습생 생활이면 거의 2~3년 전 일일 텐데,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냐?

?어쩌라고. 멋있기만 한데.

?맞아. 그런 소리 할 거면 꺼져 찌질아.

?seipo : 어휴, 빠순이들 또 시작이네. 그래봤자 운빨로 올라간......

‘뭐, 이정도로 욕먹는 수준이면 괜찮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살아야지.’

정명의 인터뷰를 들은 뒤,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먼저, 한국 팬들은 정명의 행동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너무 나댄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저러니까 한국 선수들이 기계처럼 인터뷰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좀만 튀어도 쫑알쫑알 시끄럽다니까.’

하지만 정명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북미에서는 욕을 하는 사람보다 정명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정명은 그런 자신의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뒤, 노트북을 닫았다.

정명은 몰랐지만, 사실 이번 경기에는 꽤나 많은 의미가 있었다.

먼저, 1년 6개월 만에 북미 팀이 한국 팀을 꺾었다.

그리고 북미에서 3위로 진출한 팀이 월챔 8강에 진출한 것은 2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고, 특히 GLG, TBM 이외의 북미 팀이 8강에 진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미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기록인 것이다.

조별리그 성적 4승 2패.

OMA는 그렇게 조 2위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정명은 아침부터 호텔 밖으로 나왔다. 아침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명이 호텔을 나서자마자, 마치 그를 뒤따르듯 문에서 사람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응? 뭐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고개를 푹 떨군 채, 묵묵히 호텔을 걸어 나오는 사람들은 정명과 같은 D조였던 대만 팀, 스터테일즈 사람들이었다.

‘아쉽게 됐겠어. 우리가 졌어야 재경기를 하는데 말이야.’

대만의 옆방을 쓰는 한국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팀이 킬을 낼 때에는 방문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OMA가 따라붙으며 조금씩 점수를 낼 때에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OMA의 승리가 확실시 됐을 때에는 짐을 싸느라 분주해졌다는 생생한 증언이 있었다.

정명은 쓸쓸하게 사라져가는 스터테일즈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큰 캐리어 가방을 보니, 이제 집에 가려는 모양이네. 근데 저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기껏 파리에 왔는데, 관광이라도 좀 하고 가지.’

그런 생각을 하며 멀뚱멀뚱 서있던 정명은 또다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텔 밖으로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프로팀 관계자군. 이번에는 꽤 많은데? 다들 떨어진 팀들이고...벌써 다들 집에 가는 건가?’

유럽팀, 대만 팀, 브라질 팀.

그들은 방금 전 봤던 스터테일즈보다는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멀뚱멀뚱 서 있는 정명에게 다가와 아는 체를 하며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정명! 같이 사진 찍어요. 기념으로요.”

월드 챔피언십이 치러지기 전, 정명은 그저 허접한 북미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정명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팬들 사이에서 아직은 ‘북미에도 썩 괜찮은 선수가 있다’ 정도지만,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정보를 모을 가치가 있는 사람’ 으로 등급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몇몇 프로게이머들의 SNS에서는 정명과 찍은 사진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

조별리그를 겨우 통과했지만, 정명에게 쉴 시간은 하루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침 운동을 하다가 잠깐 솔로랭크를 돌리며 개인연습을 하던 정명은 컴퓨터를 끄고, 다른 팀원들과 함께 방송국으로 향했다.

‘흠, 이번에도 운이 따라줬으면 좋겠는데.’

16강전이 끝났으니, 이제는 8강전이다.

팀원들이 쉬지도 못하고 곧장 방송국에 와야만 했던 이유는 경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 추첨식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명은 그곳에서 이미 리그에서 떨어진 TBM 선수들을 볼 수 있었다.

듣자하니, 조 추첨식에서 해설자들과 같이 방송을 한다고 한다.

‘아마 우리 팀이 떨어졌으면 나도 저기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특별 게스트다 뭐다 따위로 말이야.’

관객석은 텅텅 비어있었다.

텅텅 빈 관객석에는 팬 대신 팀의 관계자들이나 스태프들이 자리를 채웠고, 무대에는 각 팀의 대표로 나온 8명의 선수들과 진행요원만이 나와 있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네 개의 조에 각 조의 1위 팀들이 먼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 2위로 진출한 팀이 제비를 뽑아, 대결 상대를 정하는 겁니다.”

조 추첨식을 진행하는 리포터의 말대로, 무대 앞에는 네 개의 캡슐이 들어있는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제비를 뽑을 사람은 정명이었다.

“네? 제가 첫 번째요?”

“그렇습니다. D조셨잖아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제비를 뽑으시면 됩니다. 자, 여기요.”

살짝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정명이 무대 중앙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월드 챔피언십 8강]

별 볼일 없던 팀이 걸러지고, 정예중의 정예들만이 남아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됩......

......

‘어, 음.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뭔가 퀘스트가 주렁주렁 뜨긴 했지만, 한가하게 읽고 있을 시간은 없다.

정명은 네 개의 캡슐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선택에 팀의 미래가 걸려있다.

‘뭐가 좋을까. 되도록이면 유럽 팀, 레몬캣이면 좋겠는데. 솔직히 그 팀이 아니고서는, 다른 팀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모두 똑같이 생긴 캡슐임이 분명하건만, 유난히 하나의 캡슐이 눈에 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캡슐에서는 왠지 지난 번, 집중하고 있는 팀원들을 봤을 때처럼 은은하게 오오라가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걸 뽑으라는 건가? 왠지 느낌이 좋은데......이걸로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정명이 드디어 캡슐 하나를 꺼냈고, 동시에 리포터가 호들갑을 떨었다.

“정명 선수가 캡슐을 집었습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제가 정명 선수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캡슐을 바꿀 의향이 있으십니까?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뇨. 이게 마음에 듭니다. 이거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관객석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멋지다 우리 리더!

-정명아! 좋은 거 뽑아라!

정명은 자신의 팀원들을 보며 씩 웃어주고는 캡슐을 돌려 파각, 하고 열었다.

이제는 리포터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징징대봐야 결정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다시 퀘스트가 떴다.

[히든 퀘스트 발동!]

‘아이 씨, 바쁜데. 좀 행사 다 끝나고 한꺼번에 뜨면 안 되니?’

정명은 귀찮아하며 적당히 창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최대한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왕위를 계승하러 왔다!]

-게임에서 졸개들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보스와 싸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지금 당신에게 그러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방심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상대하게 될 적은 당신이 지금껏 상대해온 그 누구보다 강력합니다.

보상

-자유 포인트 4점

-포인트 1000000

-A등급 선물상자

.......

‘엄청난 보상.....젠장, 이건 느낌이 좋지 않은데.’

퀘스트 내용을 대충 훑어본 정명은 왠지 보지 않아도 캡슐 안에 있는 쪽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걸 체념한 정명은 눈을 질끈 감고 카메라 앞에 캡슐 안에 들어있던 종이쪽지를 펴서 들이밀었다.

정명이 꺼낸 쪽지에는 'A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오오! A조! OMA가 또다시 한국 팀과 붙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국에서 역대 최고의 팀이라 불리는 팀과의 경기군요!”

“C90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닙니까? 비록 시즌 내내 OMA를 괴롭혔던 C90도 저 팀 앞에서는 경기 내내 고통 받았지만 말이죠!”

정명은 자신의 정면에 있는 OMA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정지화면인 것처럼, 정명의 쪽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정명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에라이 시발. 우리도 짐 싸야겠다.’

ⓒ 추어탕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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