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저 녀석은 몰라도, 너 정도는 이긴다 (2) >
태국과의 경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저녁.
연습실에 있던 정명의 팀원들은 잡담을 나누며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히, 신난다. 누가 내 팬아트라면서 그림 선물을 보내줬어.”
“우와...진짜네. 나는 OMA에 오래 있었는데도 그런 것은 받은 적이 없는데. 댓글도 엄청 많이 달리고, 부럽다...”
레딧을 보며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는 에리와. 조시.
그리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레딧 당분간 안 볼 거라며?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레딧이 아니라 언벤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레딧을 챙겨 보는 것은 조시와 에리 뿐이었다.
본인들 말로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라고는 하는데, 그러는 주제 멘탈은 약해서 댓글을 보다가 내상을 입어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정명은 그런 그들에게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잔소리도 한 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너희, 그러다가 이상한 댓글 보고 컨디션에 영향 있으면 진짜...”
“에이, 지금은 악플이 없을 것 아니에요? 우리가 이겼는데.”
“맞아 맞아. 이거는 힐링이라고. 아, 레딧에 태국 사람들 반응 올라왔다.”
그 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정명이 뭐가 그리 재밌나 싶어 화면을 보니, 태국 사람들의 커뮤니티 반응을 번역하여 올린 게시물이 인기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 이거. 요즘은 자주 올라오네. 다른 나라 반응 번역.”
다른 나라 커뮤니티 사이트 반응 살펴보기.
레딧에 원래는 없었지만, 한국에서 전파한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태국이니까 번역하는 데 며칠이 걸렸지, 아마 한국이나 중국이었으면 늦어도 다음 날에는 게시물이 올라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태국 사람들의 반응을 읽던 둘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이 사람들 뭐랄까. 너무 반응이 극단적인데? 울었다는 사람은 대체 뭐야?”
“욕을 빼면 읽을 만한 게 거의 없다. 레딧보다 분위기가 무섭네...”
‘하긴, 요즘 나라를 불문하고 팬 문화가 조금 과격해지기는 했지. 안타깝게도.’
게임의 인기가 늘면서 나타난 부작용중 하나였다. 자국의 선수가 경기에서 지면, 팬들이 훌리건처럼 날뛰거나 한다는 것.
하지만 자신의 팬들을 떠올린 정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내 팬들이 그러려고. 얼마나 착한 사람들만 모였는데.’
......
그날 밤.
보통 때라면 모든 연습이 끝났을 시간이지만, 월챔 참가 팀 연습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국, 중국, 유럽, 북미. 참가 팀 전부 새벽까지 막바지 연습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선수들은 1년간 이 날을 위해 달려왔다.
모두들 필사적인 탓인지, 심지어 어떤 팀은 연습실 불이 새벽 3시까지 켜져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연습실의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혼자 복도에 있던 정명은 어두컴컴한 연습실을 보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이렇게 보니 조금 보기 그렇기는 하네. 우리가 연습을 안 하는 것 같잖아.’
새벽에 연습을 하지 않아 연습실의 불이 꺼져 있는 곳은 단 한곳. OMA의 연습실뿐이었다.
정명은 새벽에 연습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것을 요청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정명의 요청은 바로 수락되었다. 다른 팀원의 의사는 상관없이 말이다.
‘어차피 선수들의 수면시간은 거기서 거긴데, 밤을 새고 아침에 자는 것 보다는, 그냥 밤에 잠을 푹 자고 하는 게 낫지 않나? 뭐, 어떤 게 옳은지는 결과가 말해 주겠지만.’
하지만 오늘. 정명은 불이 다 꺼진 연습실로 향했다.
‘자기 전에 어떤지 한번 실험해봐야지. 기껏 능력치를 올렸는데.’
정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능력치 창을 열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80/100)
정신력 (70/100)
오더 (68/100)
판단력 (75/100)
잔여 포인트 : 1950
정명은 많은 고민 끝에 포인트를 어디다 쓸지 정했고, 바로 실행에 옳겼다.
그리고 태국 팀에게 이겨서 얻은 1만 포인트는 전부 정신력 스탯에 투자되었다.
따라서 60이었던 정신력 스탯이 단번에 70이 되었고, 그 이후로 새로운 부가 효과가 생겨났다.
*정신력 스탯이 70이 되었습니다!
?기본 집중력이 130%로 상승합니다.
?일반 리그 경기에서는 실수를 할 확률이 0%가 됩니다.
?매우 낮은 확률로 슈퍼플레이를 펼칩니다.
‘이제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많이 올랐다. 대만과의 대결에서 이 능력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정명은 능력치 창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 때, 복도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사람은 정명으로써도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었다.
“이야, 정명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가워요.”
“오, 이게 누구야. 중국으로 돈 벌러 간 외국인 노동자 아니십니까?”
정명에게 반갑게 말을 건 사람은 김준상이었다.
전 한국 2위 팀에 속해있던 사람이자, 한국에서 손꼽히는 원딜러였던 남자. 하지만 이제는 한국 팀이 아닌 중국 팀에서 활동하는 그런 선수.
그리고 오래 전, 팀 아서스와의 연습경기를 통해, 정상급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OMA에게 알려줬던 사람이기도 했다.
정명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반가워하며 물었다
“그래, 중국 생활은 어떻던가요? 북미 쪽은 잘 아는데, 중국 쪽은 소식이 안 들려서. 저는 중국에 갔던 사람들이 다 죽은 줄 알았어요.”
“하하, 다들 적응하느라 바빠서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조금 힘들어요. 팬들은 엄청나게 극성이지, 말은 안통하지, 거기다 팀 내 정치싸움 까지. 짐 싸서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가요? 다들 표정은 밝아 보이던데. 그냥 카메라 들이대니깐 일단 웃은 건가?”
“힘들긴 하는데, 통장 잔고를 보면서 위안을 하는 거죠. 그걸 따지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할까...아무튼 뭐 그래요.”
“오. 역시 페이가 괜찮나보네요. 한국이랑 비교하면 어떤가요?”
“흠, 한국요? 한국도 힘들기는 하는데, 통장 잔고를 보면서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의 차이? 아, 물론 한국의 대기업들이 돈을 형편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쪽이 돈을 좀 많이 주긴 하거든요.”
그 사람은 얼마를 받니, 중국에서 이 팀은 정말 쓰레기라느니 하며 떠들던 준상은 ‘아차, 내 정신 좀 봐...’라고 중얼거리며 정명에게 눈을 맞췄다.
“그런데, 지금 시간에 어디가세요? OMA는 이 시간이면 다 자러가지 않았나?”
“솔로랭크 두 판정도 돌리고 자려고요.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요.”
“그래요? 그럼 이왕 하는 거 같이 할까요? 어차피 지금은 개인연습 시간이라서 시간 남는데.”
“좋죠. 우리 둘이 듀오를 한다면 제가 묻어가겠는데요?”
@@@@@
그 시각.
선수들이 연습을 하는 것을 감시하던 스터테일즈의 코치, 핑다오는 상대편의 아이디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저기 레드 팀 미드라이너, 유정명이야? OMA에 있는?”
“예. 새벽에는 통 안 보이더니, 오늘 처음으로 보네요. 엔빅터스의 김준상도 있고.”
“근데 카드맨을 잡았네? 흠, 저 녀석이 있는 줄 알았으면, 밴 했을 텐데.”
정명이 고른 캐릭터는 카드맨.
올스타전에서 활약했던 캐릭터이자, 일시적으로 숙련도 버프를 받았던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시간이 되어 숙련도 캐릭터를 변경할 수 있었고, 솔로랭크에서 마지막으로 해보려는 생각으로 꺼낸 것이었다.
아쉬워하는 핑다오에게 대만의 미드라이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봐야 북미에서 활동하던 사람인데요 뭐. 카드맨이든 카드우먼이던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겨요.”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잘 된 것 같네. 지금 여기서 정명을 꺾으면 내일 경기에서 밴카드 하나 아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북미에서 온 선수.
핑다오는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팀의 미드라이너가 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월챔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핑다오는 북미 팀이라 할지라도 무척 경계했다.
하지만 다른 조에서 북미의 1, 2위라는 녀석들이 죽 쑤는 꼴을 본 이후 핑다오는 북미팀에 관한 모든 근심을 내려놓았다.
북미팀이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의 팀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북미에 시드권 3장 줄 바에야, 대만에 3장을 주지 말이야. 우리는 얼마나 박 터지게 싸워서 겨우 올라왔는데, 저 녀석들은 완전 꿀 빨았잖아? 너무 불공평해.’
그 후, 코치는 곧장 솔로 랭크 관전 방으로 들어갔다.
정명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바텀라인의 김준상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세계 정상급의 선수에 관한 자료는 모아도모아도 부족하니까.
‘관전자수 3031명...이 새벽에 많이도 보고 있군. 아니, 지구 반대편에서는 낮인가?’
코치는 미드에 관한 것은 제쳐두고, 바텀 라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서는 유럽의 봇 듀오와 김준상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김준상의 상대는 유럽의 프로들이었다.
바텀 라인에서 김준상에게 딜교환을 잘못 당한 이후, 유럽 듀오는 미니언을 건드리지도 못했고, 처음 한 번의 교전으로 라인전이 끝나버렸다.
사실 유럽 듀오가 못한다기보다는 김준상이 너무 잘했기 때문이지만, 핑다오의 눈에는 그저 프로의 이름도 아까운 아마추어로 보일 뿐이었다.
“어휴, 저걸 저렇게...멍청한 유럽 놈들. 듣기로는 저 놈들도 시드권이 3장이라지?”
라인전이 끝났다고 생각한 핑다오는 미드로 시점을 옮겼다.
그런데, 미드라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지금 저 새끼 뭐 하는 거야? 북미 선수한테 지고 있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한 미드라인전이 지고 있다. 그것도 상당한 CS격차를 내면서.
바텀, 그리고 미드.
두 라인이 라인전에서부터 밀려버리니, 한타페이즈까지 갈 것도 없었다.
20분이 되자마자 항복투표가 시작되었고, 항복투표는 찬성 4표, 반대 1표로 무난히 통과되었다.
물론, 반대 1표는 대만의 미드라이너였다.
그리고 게임이 끝난 후.
핑다오는 팀의 미드라이너가 컨디션이 무척 안 좋다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연습을 너무 무리하게 시켰나 보네. 괜찮아. 누구나 컨디션은 안 좋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내일 경기에는 네가 아니라 식스맨을 투입 할 거다. 알겠지?”
@@@@@
스터테일즈와의 경기 당일.
OMA 선수들은 굳은 표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왔다.
이번 상대는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대만 팀과의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명은 태평하게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고, 에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한 정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는 긴장도 안 되니? 엄청 여유로워 보인다.”
“음...긴장되세요?”
“당연하지! 이번 경기, 진짜 중요하잖아. 한국 팀은 이기기 힘들다고 가정했을 때, 대만 팀은 무조건 잡아야 8강에 올라갈 수 있으니까. 근데 사람들 말로는 OMA보다 스터테일즈가 더 잘한다고 평가하고...”
“걱정 마세요. 자신 있으니까. 한 번 이겼는데, 두 번은 못 이기겠어요?”
에리는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마도...”
그리고 그 순간, 관객석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스터! 테일즈!]
[빅토리! 빅토리!]
“아우, 시끄러. 저건 또 뭐야.”
“듣기로는 대만에서 온 응원팀이라고 하더라고요. 참 많이도 왔다.”
관객석에는 약 1000명 정도의 대만인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한국전을 보자니 질 확률이 높아 재미가 없을 것 같고, 태국전은 조금 관심도가 떨어지니까 적당한 상대인 OMA전을 골라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응원단보다 더욱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정명은 상대 팀의 부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근데 저건 또 뭐야?”
정명이 가리킨 것은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두 사람의 건장한 경호원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대만 선수들과 한명한명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뒤.
호기심이 많은 조시가 대만 사람 열 명에게 물어본 결과, 한 명이 영어를 할 수 있었고, 곧이어 저 남자는 대만의 국회의원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국회의원? 국회의원이 여기는 왜 온 거죠?”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국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죠! 미국에는 이런 것 없죠?”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대만 팬. 하지만 정명은 부럽다기보다는 황당한 심정이었다.
‘응원은커녕 엄청나게 부담될 것 같은데...’
밝게 웃고 있는 국회의원과 응원단.
저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진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요즘 팬들이 많이 과격해졌던데, 그건 온라인상에서만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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