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76화 (76/226)

< 26. 저 녀석은 몰라도, 너 정도는 이긴다 (1) >

정명과 팀원들이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은 파리에서 기분 좋게 식사를 했던 딱 그날 까지만 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축제 같았던 올스타전이 끝나며 본격적으로 월드챔피언십 일정이 시작되었으니까.

코치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정명에게 두 개의 자료를 건넸다.

“뭐에요 이건? 두꺼운 문서가 두 개나 있네.”

“하나는 올스타전 분석 자료고, 또 하나는 우리 조별리그 상대 팀에 관한 정보야. 근데 태국 팀에 관한 것은 자료를 많이 못 모았어. 영상 자체를 구하기 힘들었거든.”

정명은 먼저 올스타전에 관한 자료를 펼쳤다.

그리고는 중간에 있는 내용물을 전부 무시한 채 맨 뒷장으로 넘겼고, 그곳에서 결과만 확인했다.

“우리를 꺾었던 유럽은 중국한테 지고 3위로 밀려났네요. 그렇게 잘 했는데, 중국은 더 잘 한다는 건가.”

“뭐야, 어떻게 끝났는지도 아직 몰랐었어?”

“신경 끄고 살았었거든요. 이제 레딧도 안 봐요. 멘탈관리 해야 하니까. 결승은...아, 역시 중국하고 한국이 결승에 올라갔네. 그리고 한국 올스타가 3:0으로 승리라. 역시 너무 뻔한 시나리오였네요. 안 보길 잘했다.”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자료를 덮고는 두 번째 자료를 살폈다.

두 번째 자료는 D조에서 가장 약한 팀이라고 평가되었던 팀이자, OMA의 첫 경기 상대인 태국의 에일리언 게이밍의 분석 데이터였다.

코치의 말로는 경기 영상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결승전 경기만 겨우 구해 분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자료를 본 정명의 소감은 딱 하나였다.

‘한국의 스타일을 베끼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열화 판이야. 장점은 사라졌고, 단점은 커졌어. 이 정도라면 잡기 쉽지.’

잠시 뒤.

자료를 보던 정명은 연습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자, 막 생각났다는 듯 코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C90이 경기 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요?”

“어, 그러네. 지금 틀면 딱 좋은 순간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궁금하면 잠깐 가서 보고 오는 게 어때? 연습 시작할 때 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까.”

OMA가 속한 그룹은 네 번째 조인 D조.

참가 팀 중 가장 늦게 경기를 치르는 순번이다.

때문에 정명이 월챔의 첫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이미 다른 북미 팀들은 첫 번째 경기를 하는 중이었고, 정명은 쉬는 시간을 틈타 그들의 경기 모습을 슬쩍 들여다보기로 했다.

...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있군. 같은 북미팀으로써 기분이...참 좋네. 멍청이들. 잘난 척은 더럽게 하더니.’

정명이 TV를 트니, C90이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농락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이런 모습을 보기 전에 이미 대충 눈치 채기는 했다. OMA를 제외한 북미 팀의 컨디션이 영 좋지 못하다는 것을.

올스타전의 패배로 인한 패널티가 아직도 속을 쑤시는지, 원래 기량이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레딧의 분위기는 엄청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대신 레딧의 분위기를 살펴본 코치의 말에 따르면 올스타전에 뽑힌 뒤, 성적이 부진한 선수가 특히나 욕을 먹고 있다고 전했다.

무척이나 쉬운 조로 평가받는 B조에 배정된 TBM, 그리고 북미에서 무패로 우승을 했던 C90.

하지만 딱 보기에 그들의 조별리그는 그리 순탄해보이지 않았다.

정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TV를 끄고, 연습실로 향했다.

@@@@@

며칠 뒤.

드디어 OMA의 월드챔피언십 첫 경기 날이 다가왔다.

그들의 첫 상대는 태국리그에서 올라온 에일리언 게이밍.

팀 대기실에 있던 정명은 불현듯 퀘스트 창이 떠오르는 것이 보여, 대기실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16강 조별리그]

이곳에는 자국의 리그에서 한가락 한다는 팀들이 총 집결했습니다.

북미를 넘어, 세계인에게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성공 조건

-16강 조별리그 통과

보상

-20000 포인트

-C급 선물상자

‘1위나 2위인 것은 상관없이, 예선을 통과하기만 하면 2만 포인트를 벌 수 있다는 거지? 좋아. 아주 좋아. 내가 조별리그만 통과하면...’

정명은 벌써부터 2만 포인트를 번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팀원들과 함께 이번 경기에서 쓸 전략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자료 준거 다 외웠어?”

“네. 경기 영상도 한 번 봤는데, 저화질이라 보기는 힘들었지만, 아무튼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던데요.”

“자신감 좋은데? 그럼 이제 가 보자.”

지금껏 OMA 선수들이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의 월드챔피언십 무대.

정명은 이미 올스타전을 치르기 위해 밟아본 곳이지만, 다른 팀원들은 처음 오는 곳이다.

그리고 에리는 멀리서 환호하는 팬들을 보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거...사람이 엄청 많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더라고요. 그냥 평소처럼만 하면 됩니다.”

“어...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혹시 부스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그렇게 걱정할 만도 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관객 수만 해도 3만 명이 넘으니까.

좌석은 전석이 유료좌석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정명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무대 위의 부스를 툭툭 두드렸다.

“아, 부스까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들었는데, 저 5인 부스 가격이 한 2억 한대요. 그게 두 대니까, 4억 원 정도. 돈 많이 부은 부스니까, 안에까지 팬들의 목소리가 들릴 걱정은 없어요.”

“4억이면 얼마지...40만 달러? 와, 엄청 비싸다. 그나저나 너는 참 별걸 다 아는 것 같네...”

냉방, 방음, 방진, 공기필터 등등이 들어간 부스이기에 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 덕분에 공정한 게임을 치를 수 있는 것이었기에, 주최측은 이런 곳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양측 선수가 준비를 마치는 것과 함께,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평소 3전 2선승제를 펼쳤던 지난 리그와는 달리, 풀리그는 단판 승부. 하루에 딱 한 번만 경기를 치르게 된다.

현재 첫 경기를 치른 북미팀의 성적은 TBM, C90 모두 1패씩 가져간 상황.

때문에 북미의 해설자는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로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밴픽 시작되었네요. 과연 에일리언 게이밍의 첫 선택은...아, 역시 카드맨은 밴이군요. 정명선수가 올스타전에서 썼던 무기죠.

-개인적으로는 무척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면 중요한 무대에서 꺼내도 됐을 텐데, 너무 쉽게 드러냈어요. 안 그런가요?

정명이 올스타전에서 뽐냈던 숙련도 보정 캐릭터, 카드맨은 칼같이 밴 되었다.

태국 팀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명 또한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동안의 연습에서는 카드맨이라는 캐릭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명이 그 대신 고른 캐릭터는 떠돌이 마법사. 숙련도 보정을 lv3까지 받을 수 있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하지. 그것도 조금 방심하고 있는 상대라면 말이야.’

에일리언 게이밍이 태국 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17승 1패.

겉보기에는 엄청난 성적으로 보이겠지만, 경쟁상대가 변변치 않았기에 거둘 수 있었던 성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에일리언 게이밍 사람들은 북미를 어찌 생각했는지 인터뷰에서 ‘그래도 북미정도라면 해볼 만 한 것 같다’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때문에 정명은 바로 지금, 그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해줄 참이었다.

-오, 정명선수. 초반부터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는데요, 과연 어떨지?

그와 동시에 정명의 손이 재빠르게 두 번 움직였다.

한 번은 상대방의 스킬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한 번은 스킬을 사용하여 딜을 넣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딜 교환. 하지만 정명의 HP는 가득 차있고, 상대방의 HP는 절반 정도가 빠져나갔다.

명백한 클래스 차이었다.

-드디어! 북미 팀에서 뭔가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북미 팬 분들!

잠깐의 활약이 그렇게 기뻤는지, 해설자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북미 팀의 패전보가 이어지다보니, 북미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딜교환에서 성공한 뒤, 정명은 바로 정글러를 불렀다.

“조시, 저놈이 슬슬 눈치 보는 것 보니까, 오른 편 부시에 정글러가 있나보다. 너도 준비해.”

“지금 갑니다.”

라이너가 정글러를 불렀을 때는 연기력이 중요하다.

우리 편 정글러가 부시 안에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며 상대방을 속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명은 기묘하게 좋아진 눈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고, 에일리언 게이밍 선수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바로 이겁니다. 미드가 확 풀렸어요!

-그렇죠. 이제 정명선수가 크게 실수하지 않는 한, 이 격차가 꾸준히 유지될 겁니다.

경기 시작한지 6분 째에 미드라이너가 더블 킬을 먹었다.

이것은 앞으로 15분 동안, 라인전이 끝날 때 까지 에일리언 게이밍의 미드라이너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북미팀이 경기를 리드하는 모습에, 북미의 경기를 해설하고 있던 해설자는 마이크를 잠시 끄고 웃음을 터트렸다.

“OMA의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아. 다음 경기에서도 이런 컨디션이면 좋겠는데.”

“누가 아니래. TBM이랑 C90은 1패를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경기력이 안 좋았다고.”

북미 선수들의 부진은 곧바로 타격이 온다.

시청률의 저하. 그로 인한 광고 판매 감소.

열 받은 시청자의 방송국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은 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OMA가 좋은 모습을 보이니, 방송국에 고용되어 일 하는 해설자는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평화롭게 흘러가던 라인전이 다시 긴박하게 흘러가자, 해설자는 다시 마이크를 켜고 해설을 재개했다.

......

“그냥 그랩에 잡혀 들어 가! 내가 뒤에서 텔레포트 탄다!”

바텀 라인에서 2:2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싸움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정글러까지 끼어들어 3:3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정명은 그곳에 텔레포트를 타고 들어갔다.

“좋아, 거의 다 잡았어! 타워 무시하고 들어가라!”

-이건 완전히 의도된 상황이네요. 에일리언 게이밍이 OMA의 설계에 제대로 말렸습니다!

-조시, 트리플 킬을 내며 상황을 마무리합니다. 잘 하면 항복 투표도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스코어는 20대 4.

당연히 OMA가 20이었고, 4가 에일리언 게이밍이었다.

그리고 트리플 킬을 낸 조시는 홈으로 귀환하며 한가롭게 말했다.

“지금 이걸로 게임이 거의 끝난 것 같은데요? 항복 투표 안 해주려나?”

OMA가 대승한 한타 이후, 태국 팀이 항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게임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정명은 벌어진 차이를 계속해서 불려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넥서스를 두드리며 게임을 끝냈다.

-GG! 북미 팀의 첫 승전보입니다. OMA 선수들 모두 기뻐 보이네요.

-북미 팀이 첫 승리를 거뒀으니, 이제 우리 방송국에 관한 디도스 공격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쪽 일을 맡고 있는 직원이 계속 야근중이거든요.

게임에서 승리한 정명은 기지개를 쭉 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게임을 승리한 이후, 메시지 창이 드러났다.

[조별 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 보상으로 10000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어? 왜 이렇게 많이 줘? 1만?’

생각치도 못한 포인트에, 정명은 살짝 놀랐다.

북미 리그에서는 상대를 2:0으로 잡아도 2000포인트 남짓 준다.

그런데 지금 태국 팀을 한 번 잡고 1만 포인트를 얻은 것이다.

정명은 무척이나 이득 봤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부스를 나섰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선수들의 경기력 보존을 위해 일정은 그리 타이트하게 짜여 있지 않았고, 월챔 참가 팀들은 휴식과 함께 충분하게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북미팀들의 두 번째 경기가 펼쳐졌다.

정명은 첫 번째 경기와는 달리 다른 팀의 경기를 보는 데에 시간을 쓰지는 않았고, 경기가 끝난 뒤. 코치에게 경기 결과만을 전해 들었다.

“걔네들 또 졌어. 이제 0승 2패야.”

“어라? 진짜? 북미팀이 또 졌다고?”

코치의 입에서는 상당히 의외의 소식이 나왔다.

지옥의 조라 불리던 곳에서 뒹굴던 C90은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적으로 약한 조에 속해있던 TBM까지 모두 패배.

그 둘은 나란히 0승 2패라는 스코어를 쌓았고, OMA의 승리로 멈춰졌던 디도스 공격은 다시 재개되었다.

조별예선을 통과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코어는 보통 5승 1패나 4승 2패 정도.

3승 3패까지 한다 하더라도 8강에 갈 수 있는 확률은 있지만 그 때는 자력 진출이 아닌, 경우의 수를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벌써 2패를 하고 만 것이다.

코치는 정명에게 뭐라 말을 더 하려다가, 목구멍으로 말을 다시 삼켰다.

‘그 대신, OMA에게 기대가 쏠리고 있다는 것은...말 안 하는 게 좋겠지. 괜히 부담만 늘리는 꼴이니까.’

ⓒ 추어탕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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