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프랑스로 간 사람들 (3) >
정명은 팀원들과 만난 김에 호텔에서 나와, 파리에 있는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호텔 밥도 좋지만, 파리에 왔으면 파리의 음식들을 먹어 봐야지.’ 하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호기롭던 기세와는 달리, 팀원들은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엄마를 잃어버린 미아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다.
“어딜 가야 좋지?”
“나는 최소한 메뉴판이라도 영어로 쓰여 있으면 좋겠어.”
“글쎄. 여기 와서 나는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그렇게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조시는 이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어, 저기 펙토르 있다. 쟤네들도 밖으로 나왔나 봐.”
조시의 말에 팀원들의 고개가 모두 한 쪽으로 돌아갔다.
근처에는 몇몇 프로게이머들 또한 적당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정명과 올스타전을 치렀던 펙토르 또한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동료 선수를 바라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넌 진짜 운 좋은 거야. 여긴 현지에 사는 사람 정도나 아는 곳이거든. 프렌차이즈 식당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와, 역시나 프랑스 유학생! 믿음직하다!”
펙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동료와 함께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본 조시는 좋은 것을 알아냈다는 듯 들떴다.
“저기가 숨겨진 맛집인가본데? 우리도 저 쪽으로 가자!”
“음...글쎄. 저 놈이랑 어제 얼굴 붉히며 싸웠는데, 또 보기는 싫다. 격하게 싫다.”
그렇게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 정명 일행들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맹한 얼굴의 남자는 이미 정명을 알고 있다는 듯, 반갑게 말을 걸었다.
“혹시 어제 올스타전에 나오셨던 정명 선수 아니세요? 저 헬리엉입니다. 기억하시죠?”
“어, 네. 물론이죠. 안녕하세요.”
정명에게 말을 건 사람은 어제 유럽 올스타 중 한 명이었던 탑솔러, 헬리엉이었다.
그는 펙토르가 들어간 가게를 슬쩍 바라보더니, 말소리를 줄였다.
“그런데 혹시 저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셨나요?”
“예. 그런데요?”
“그곳으로 가면 바가지 쓸 거예요. 조심하세요.”
그 말에, 정명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바가지요?”
“예. 저 가게에서는 현지 사람들에게 주는 메뉴판이랑 외국인들에게 주는 메뉴판이 달라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허...전혀 몰랐습니다. 역시 무서운 동네네.”
파리에서의 바가지요금.
정명이나 다른 게이머들이 아무데나 들어가지 않고 고심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프랑스 파리는 관광객들을 등쳐먹으려는 사기꾼들로 바글거리는 곳이었으니까.
정명이 얼굴을 굳히자, 헬리엉은 정명에게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하실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어떠세요?”
“물론 좋죠. 오히려 부탁드릴게요.”
정명은 헬리엉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기쁘게 받아들였다.
헬리엉이 안내한 곳은 조금 작고 아늑한 식당이었다.
그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정명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뭐, 사실 정명 선수라면 엄청나게 바가지를 쓰지는 않을 겁니다. 내 생각이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가게 사람들이 정명 당신의 플레이를 인상 깊게 봤을 테니까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그리고 파리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 올스타 팀의 선수 모두가 당신의 실력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제 당신을 상대했던 그린스타는 당신이 북미의 원탑 미드라이너라고 확신하더군요. 하하.”
헬리엉과 팀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의 주제는 팀 간 교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까지 이어졌다.
“연습게임과 정보 교환, 그리고 OMA가 월드 챔피언십에서 일찍 탈락하면 관광 가이드까지 붙여드립니다. 어때요, 우리 팀이랑 친해지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일찍 탈락할 생각은 없지만, 좋네요. 그럼 오늘 저녁에라도 같이 연습 하시죠.”
한 시간 뒤.
정명과 그 일행은 즐거운 식사를 하여, 만족스러운 얼굴로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는 다른 식당으로 들어갔던 C90 선수들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런 거지같은 나라 같으니! 뭐 저따위로 서비스하고 팁을 바라는 거지?”
“누가 아니래, 시발.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가격도 존나 비싸고, 무엇보다 맛이 없잖아. 빵은 딱딱하고 스프는 식었고!”
C90 선수들은 무척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그중에서도 항상 여유만만 하던 펙토르가 무척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는데, 정명이 볼때 저 상태로는 제대로 된 연습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쉽게 되었군. 섬머리그에서 전승 우승한 C90이 이번에야말로 뭔가 보여줄 거라며 기대하고 있는 팬들이 많던데, 저래서야 글렀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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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휴식이 끝난 뒤.
이제는 다시 본업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정명은 라운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올스타전 이후의 일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조별리그 예선이라. 미국에서 한국을 거쳐, 프랑스까지 왔는데 16강 정도는 통과해야 하지 않겠나?’
월드챔피언십에 온 팀은 총 16팀.
북미, 유럽, 중국, 한국에서 각각 3팀. 그리고 대만에서 2팀까지 열 네팀.
마지막으로 브라질, 러시아, 일본, 태국 등등의 경기력이 약한 지역에서 예선을 치르고 올라온 2팀 까지 총 16팀이 월드챔피언십에 오르게 되었다.
정명이 처음 치러야 할 16강전 조별리그 예선은 풀 리그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16개의 팀을 추첨을 통해 4개의 조로 나누었고, 각 팀은 그룹 안에서 총 6경기를 펼치게 된다.
정명은 OMA와 함께 D그룹으로 배정된 팀들의 분석표를 보며 한숨을 뱉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조마다 2개의 팀만 8강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인데...휴, 잘못 걸렸어. 이거 만만치 않다. TBM은 완전 꿀조로 들어갔던데 말이야.’
D조
1. 대만, 스터테일즈 - 섬머리그 성적 15승 3패 (2위) OMA와 같은 그룹에 속한 첫 번째 팀은 대만의 스터테일즈였다.
열심히 대만의 경기를 분석한 스태프의 말에 의하면, D조에서.
그리고 월드챔피언십에 참가한 팀 중에서 OMA와 가장 실력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과의 경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
2. 태국, 에일리언 - 섬머리그 성적 17승 1패 (1위) 두 번째는 태국의 에일리언 게이밍.
1위인 것에 더해 자국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약한 리그에서 경쟁을 하던 팀이다.
스태프들은 이 팀은 무조건 깔고 가야 한다며 꼭 이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승점 자판기지. 이 팀에게 진다면, 8강 진출이 불투명해진다.’
3. OMA - 섬머리그 성적 9승 9패 (4위) 그리고 북미의 OMA.
정명은 팀 분석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바로 종이를 넘겼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싶네. 우리 팀이지.’
4. 한국, 팀 메그 - 섬머리그 성적 12승 6패 (3위) 마지막으로 팀 메그.
지난 번, 섬머리그에서 3위를 한 팀이다.
3위라고는 해도, 사실 그냥 한국 팀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월드챔피언십에서 출전한 한국팀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기록이 있었으니까.
결국 팀 내부에서는 팀 메그 때문에 조 1위 진출은 힘들고, 조 2위 진출을 노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 팀과의 경기는 마음을 비워놓고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버릴 건 버려야지.’
정명은 분석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런 정명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명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우리 지난번에 본 적이 있죠?”
“예. 한국에서 토크쇼 나갔을 때 뵈었었죠. 반갑습니다.”
정명을 알아보고 다가온 것은 한국에서 최상위 서포터라고 평가받는 이현경이었다.
이현경은 지난 번. 한국에서 에리와 함께 게임채널의 토크쇼에 나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정명과 인사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정명의 근처를 살폈다.
“에리씨는 없어요? 맨날 정명씨의 근처에 붙어있던 것 같더니.”
“에리요? 연습실에 먼저 가 있겠다고 했는데. 왜요?”
“우리 팀이 한국에서 공수해온 먹을거리가 있어서요. 생각 있으면 조금 드릴까 했죠.”
토크쇼에 출연했을 당시, 에리는 정명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에 심취한 미국인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따른 행동이었다.
때문에 에리의 이미지는 한국을 무척 사랑하는 미국인으로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덕분에 한국 선수들과 팬은 다른 서양 팀 보다 OMA에게 더욱 친근함을 느끼고는 했던 것이다.
잠시 뒤.
그렇게 현경과 잡담을 하던 정명은 옆에서 큰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 ? ?我!”
정명과 현경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은 어떤 몸집이 큰 남자였다.
무척 화난 표정의 남자는 라운지를 나갈 때 굳이 현경을 밀치며 나갔고, 그 상황을 본 정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쟤네들 아는 사람이에요? 이건 너무 노골적인 시비인데?”
“아, 대만 애들인가 보네요. 스터테일즈 애들요. 다른 팀원들도 이런 일을 겪었다고는 하던데.”
정명은 대답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어 재차 질문했다.
“대만 애들이랑 싸우셨어요?”
“아뇨. 저희도 본적은 거의 없긴 한데...그 왜, 있잖아요. 대만하고 국교단절 한 것 때문에 저러는 것 같아요. 그 때, 대만에 혐한이라는 게 많이 퍼졌으니까.”
“아.”
대만과의 국교 단절.
그 이후로 대만 사람들에게는 한국을 혐오하는 감정이 퍼지게 되었고, 현경은 그 때문에 대만 팀들이 한국 팀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판단하고 있었다.
“대만팀을 만난 김에, 중요한 것 하나 알려드릴게요. OMA가 그룹 D에 속해있죠? 스터테일즈랑 같은 조.”
“네.”
“그러면 중국 팀하고 연습게임을 할 때는 조심하세요. 연습게임 정보가 새어나갈지 몰라요. 아니, 제 생각으로는 중국이랑 연습게임 하면 무조건 대만으로 넘어갑니다.”
현경은 베이징 타이탄즈라는 중국 팀과 연습게임을 하다가 전략과 리플레이 파일이 외부로 새어나갔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이제는 밖에서 함부로 전략 얘기도 못 한다던가, 연습게임도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팀과 할 수밖에 없어, 형제팀 창설을 고민 중이라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역시나 잘나가는 팀은 견제 받는 것도 차원이 다르군. 물론, 이곳에 있는 팀 중에서 OMA를 신경 쓰는 팀은 아무도 없겠지만.’
현경과 헤어진 후, 정명은 기분 좋게 OMA의 연습실로 들어갔다.
조시는 싱글벙글 웃는 정명을 보며, 무슨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어. 스터테일즈 사람들이랑 마주쳤거든. 그리고 그 다음에...”
정명은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조시는 창밖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 말이죠?”
정명이 창밖을 보니, 확실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터테일즈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방금 마주쳤던.
그리고 스터테일즈의 코치는 선수와 열심히 토론하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뭘 저렇게 적고 있는 걸까요. 밴픽이나 작전이려나?”
조시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엿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정명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걸 보려면 시력이 몽골인 급은 되어야 할 걸? 조시 너는 두꺼운 안경이나 벗고 말 하자.”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정명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맞다. 게임에서 피지컬 80에 도달했을 때 동체시력이 무척 좋아졌었지? 그러고 보니 남은 포인트가 조금 있을 텐데...’
정명은 연습게임을 시작하기 전, 잠시 시스템창을 불러왔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77/100)
정신력 (60/100)
오더 (68/100)
판단력 (75/100)
잔여 포인트 : 16512
시스템을 열어 잔여 포인트를 확인하니, 역시나 포인트가 꽤나 쌓여 있었다.
그것도 피지컬 80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정명은 캐릭터 숙련도 보너스가 없이도 피지컬 80을 찍을 수 있게, 피지컬을 올리기로 결심했다.
[피지컬 스탯을 3 구입했습니다.]
[남은 포인트 : 1512]
평소라면 이렇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그마한 창이 한 개 더 떠올랐고, 정명은 그 메시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피지컬스탯 80을 달성하였습니다.]
*아직도 여느 천재들에게 닿지 못하는 당신에게 한 가지 특별한 무기가 부여됩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다.
-피곤에 지쳐있던 당신의 눈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이런 기적은 평생에 두 번 찾아오지 않습니다.
‘관리를 열심히 하라는 뜻인가. 가만 보면, 별 것 아닌 말도 꼭 저렇게 겁을 주듯이 이야기 한다니까. 그리고 뭐 대단하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네. 동체시력이 좋아지는 것의 효과는 이미 몇 번 경험했으니까.’
정명은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멍하니 창문 밖에 있는 스터테일즈의 뒷모습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명은 코치가 들고 있는 노트의 글자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인가? 이 거리에서도 글자가 보이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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