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프랑스로 간 사람들 (2) >
올스타전이라고는 해도, 그 무게가 가벼울 수만은 없다.
북미 올스타의 첫 상대는 북미의 영원한 라이벌, 유럽 올스타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EU와 NA의 대결이라는 것은 일본과 한국의 라이벌 매치와 약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LA에 있는 한 가정집.
TBM의 팬인 자너스는 친구들과 같이 모여, LOH 올스타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너스가 TBM의 팬이라고 하여 이곳에 모인 친구 모두가 TBM의 팬인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조금씩 뜯어먹고 있는 매컬킨은 지난번. 북미 리그에서 18승 0패로 TBM을 밀어내고 새로운 북미의 패자가 된 C90의 팬이었고, 자너스의 여동생 헤라는 지난 섬머리그에서 성적 9위를 기록한 팀, 엑스페리아의 팬이었다.
그리고 올스타전이 시작되기 직전.
소파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외쳤다.
“다른 놈들이 발목만 붙잡지 않으면 정명이 캐리해 줄 거야! 진짜라니까?”
“아닌데? 오히려 발목을 잡을 확률이 높은 건 정명이지. 그 녀석, 나이를 너무 먹었다고. 이제 슬슬 피지컬의 한계가 올 거야.”
“너야말로 무슨 소리? 정명은 C90의 니어스랑 1:1로 붙어서 올스타전에 당당히 왔거든? 헛소리 하지 말아줄래?”
붉은 머리의 여자는 OMA의 열렬한 팬인 사리였고,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매컬킨이었다.
정명이야말로 올스타에 어울리는 멋진 프로게이머라는 사리. 그리고 이제 정명은 구시대의 게이머일 뿐이라는 매컬킨의 다툼은 으레 있는 일이었으므로, 자너스는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자너스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매컬킨의 말에 손을 들어줬다.
‘내 생각에도 정명보다는 니어스가 올라왔어야 했는데. 하여간 OMA...아니, 정명의 팬들은 꼭 저러는 것 같다니까.’
자너스가 보기에 자신의 친구 사리를 포함한 정명의 팬들은 조금 극성인 것처럼 보였다.
매일 팬클럽 사이트에 접속, 선수에게 선물 챙겨주기, 그리고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OMA의 스케쥴 확인하기.
자신의 친구이지만, 약간의 빠순이 기질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리를 보며 자너스는 고개를 저었다.
‘뭐, 이번 달이 지나면 저 증세도 조금 수그러들겠지. 솔직히 말해서 OMA는 운 좋게 파리로 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너스가 친구들을 둘러보던 도중, 마침내 올스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북미 올스타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그의 친구들은, 북미가 유럽을 이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이 라인업이라면 무조건 이기지 않을까? 북미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만 다 모아 놨는데.”
“그럼 다른 대륙 사람은 아무나 뽑아온 줄 아냐? 거기서도 다 날고 긴다는 사람 모아 온 거거든?”
응원하는 선수는 각각 다르지만 북미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
때문에 자너스와 친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분 뒤.
그런 처음의 생각들과는 달리, 게임은 왠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라인전에서 위태위태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한타 페이즈로 넘어가니, 확실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잠깐, 이거 뭔가 엄청 잘리잖아. 왜 저렇게 하는 거지?”
“해설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밴픽도 이상하게 된 것 같고. 컨디션이 안 좋은가?”
북미 올스타가 그렇게 밀리는 와중에도 정명 혼자서 나름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북미팀은 개인기에서도 밀렸고, 그나마 비벼볼 수 있는 팀워크 또한 오합지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 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첫 경기의 결과는 북미의 깔끔한 패배. 어떻게 변명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어...아직 선수들 몸이 덜 풀렸나보다. 다음 경기는 잘 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그런 자너스의 희망과는 달리, 2경기 또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한타페이즈는커녕, 북미 선수들은 라인전에서부터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너스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조금씩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런 씨...미드라인 빼고는 전부 1데스씩 가져갔잖아! 이런 등신들. 왜 저렇게 못 해?”
“뭐? 북미 최강의 봇듀오? 차라리 내가 더 잘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결과를 보며, 자너스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북미의 모든 팬들이 커뮤니티 레딧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북미 올스타 선수들의 부모님 안부가 무척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북미 올스타가 그렇게 밀리는 와중에도 정명은 꾸역꾸역 활약을 하고 있었고, 사리는 그 모습을 보며 친구들에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내 말이 맞지? 다른 놈들은 다 쓰레기야. 저 녀석들이 1인분만 해 줬으면 정명이 캐리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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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미드 삼거리에 와드좀 박아라. 정글러 동선이 그쪽인 것 같은데.”
“그래. 알았어.”
북미 팀의 부스 안.
정명은 펙토르의 오더를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남의 오더를 듣는 것은 익숙해지지가 않네. 오더도 살짝 이상한 것 같고.’
상황은 영 좋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드를 제외한 다른 라인 선수들은 골고루 1데스씩 가져갔고, 거기다 더해 바텀라인은 CS마저 심각하게 밀리고 있는 상태.
그래서인지 펙토르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정명. 다음 궁 타이밍 때는 바텀으로 지원 와. 다른 라인 힘든데 미드에만 붙어 있으면 어떡해? 다른 라인으로 로밍을 가야지!”
“내 라인 포기하고? 그건 좀 힘들겠는데.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라, 여기서 차이가 더 벌어지면 힘들어.”
정명도 도와주러 가고 싶었지만, 그로써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정명의 상대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많은 게이머들을 제치고 유럽에서 정점을 찍은 천재 게이머.
정명이 지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상대인 것이다.
‘그나마 캐릭터 빨로 버티는 거지, 원래대로였다면 무슨 짓을 해도 솔로 킬을 당했을 거야. 다른 라인으로 지원 갈 여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정명 혼자 뿐.
다른 라인의 선수들은 헉헉대며 라인전에서 엄청나게 고전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패배는 뻔해 보였다.
그동안 정명은 펙토르의 오더를 군말 없이 따랐다.
오더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고 하여 제 멋대로 움직인다면, 오더를 정한 의미가 없어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경기가 될 지도 모르는 두 번째 경기에서 정명은 마음을 바꿨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군. 이대로라면 유럽에게 박살 난 다음,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 혼자라도.....’
정명이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오랜만에 킬 상황이 나왔다.
북미 팀 선수들이 유럽 팀의 원딜러를 둘러싼 1:3의 상황.
상대가 도망갈 수도 없고, 킬만 먹으면 된다.
때문에 C90의 원딜러, 펙토르는 재빠르게 말했다.
“킬 나한테 줘! 지금 상황에서는 원딜러가 킬을 먹는 게 나아!”
하지만 그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명은 상대 원딜러의 막타를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똥쟁이한테 킬을 양보하긴 뭘 양보해. 넌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어.”
정명이 생각하기에도 원딜러에게 킬을 양보하면 좋을 상황이었지만, 정명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명은 다른 사람의 킬이나 미니언까지 다 먹어버리면서 혼자 커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정명 혼자서 분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명 선수가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상당히 힘들어 보이네요. 다른 팀원들이 받쳐주질 못 합니다.
-펙토르, CS가 왜 이리 낮죠? 북미에서의 모습을 반만이라도 보여 주길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고 있던 그 때, 드디어 캐릭터 숙련도 LV 4의 진가가 나왔다.
낮은 확률로 터진다는 슈퍼플레이가 나온 것이다.
-정명! 순식간에 원딜러를 끊고 더블 킬, 트리플 킬! 이겁니다! 이거에요! 북미의 팬들은 이런 모습을 기다렸습니다!
오랜만의 승전보에 해설자는 무척이나 흥분하며 소리쳤고, 북미 팀은 정말로 오랜만에 한타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북미팀은 후반의 단 한 번의 한타로 게임을 역전시켰고, 운 좋게도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휴, 한 판 이기긴 했지만, 운이 좋아서였어. 마지막 경기에서는 힘들겠지 아마.’
정명의 생각대로 2세트를 이기긴 했지만, 그 다음 경기가 문제였다.
정명이 숙련도 보정을 받을 수 있는 캐릭터는 일주일에 한 번만 바꿀 수 있었으니까.
-네. 정명이 2경기에서 사용했던 카드맨이 밴되었군요. 당연한 결과죠.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니까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명은 눈을 감았다.
‘글쎄. 지금 실력으로 다른 캐릭터를 고른다고 해봤자...끝났구만 이건.’
1:1 상황에서 저격 밴을 당한 정명은 더 이상 숙련도 보정을 받은 캐릭터를 고를 수 없었다.
때문에 마지막 3경기에서는 사이좋게 세 라인이 전부 터졌고, 20분 만에 게임이 끝이 났다.
결국 북미팀은 올스타 팀 중 제일 먼저 올스타전 일정을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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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정명은 늦잠을 자고난 뒤,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정명은 그 뒤통수를 보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좋은 아침.”
“지금 낮인데? 늦잠 잤나보네. 너답지 않게.”
라운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의 팀원들인 OMA 선수들이었다.
오랜만에 본 것도 아닌데도 고생을 하고 와서인지, 정명은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시 또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북미의 올스타로 선정된 정명선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싸인이라도 해 드릴까요?”
“아뇨. 그보다 어땠어요? 올스타전을 치른 소감은.”
“어제 경기를 보고서도 그렇게 묻는 거냐? 경기 끝나고 나서 분위기 완전 살벌했거든? 펙토르랑.....TBM의 누구야, 걔. 비쩍 마른 애랑 멱살 잡고 난리였다니까.”
“탑 라이너 엑소더스요? 하하, 지금 레딧을 보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을 생각 못 할텐데. 혹시 어제 레딧 봤어요?”
“아니, 피곤해서 그냥 잤어. 왜, 역시 분위기 많이 나쁜가?”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레딧에는 아니나 다를까, 올스타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winavr : 그렇게 기대하게 해 놓고, 뭐 이리 싱겁게 끝나냐. 지금 이거 북미 선수들 암살하러 가도 되는 부분이냐?
?응. 판사도 열 받아서 무죄 판결 내릴듯.
레딧을 켜자마자 본 게시물부터 심상치 않다.
그리고 욕을 먹는 당사자 중 한 명인 정명은 멋쩍게 웃었다.
“음, 역시 화가 많이 났나 본데.”
레딧 사람들은 마치 한국 사람들처럼 욕을 하며 분노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애교였다. 특히 안 좋은 활약을 펼쳤던 C90 선수들의 팬들은 팀 티셔츠를 화형식까지 하며 난리를 피웠으니까.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정명은 혼자 까임 방지권 비슷한 것을 획득할 수 있었다.
Sari : 그래도 정명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지 않았나? 다른 애들이 쓰레기였지, ?맞아 맞아! 2경기에서 역전을 만들어낸 플레이는 엄청났다구.
‘휴, 다행이군. 그래도 밉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정명은 그 댓글을 보며, 어제 나타났던 퀘스트 완료창을 떠올렸다.
[올스타전의 열망]
1. 비록 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 했지만, 당신만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팬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2. 올스타전에서의 슈퍼 플레이는 유럽의 사람들까지 매료시켰습니다.
비록 유럽에서 활동하는 선수는 아닐지라도, 파리의 사람들은 그런 멋진 선수에게 호감을 나타낼 것입니다.
보상
-포인트 3000 획득
-명성 400 증가
-파리의 모든 음식점에서 가격 20% 할인 *만약 당신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면 받았을, 숨겨져 있던 패널티가 드러납니다.
-수많은 악플에 위축되어 집중력이 20% 하락합니다.
-명성이 600 하락합니다.
-개인방송 시청자수가 30% 감소합니다.
숨겨져 있던 패널티.
만약 정명이 다른 북미 선수들처럼 죽을 쒔으면 받았을 패널티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정명은 그 패널티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다른 북미 올스타 선수들은 이 패널티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정명만은 잘했다는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은 유럽 팀의 승자 인터뷰가 결정적이었다.
정명의 상대 미드라이너였던 그린스타는 인터뷰에서 정명의 플레이를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며 정명을 띄워주었다.
“카드맨을 그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사실 그 캐릭터는 중국의 샤오웨이가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부터 그 캐릭터의 1인자는 정명이에요. 엄청나게 애먹었습니다. 앞으로 정명을 상대할 팀은 이 캐릭터를 꼭 밴 하는 게 좋아요.”
‘음. 살짝 오해이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지.’
올스타전이라는 큰일을 끝낸 정명은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제 올스타전 이후의 일정표로 향했다.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