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69화 (69/226)

< 23. 그곳은 우리가 간다 (2) >

GLG와의 경기는 바로 내일.

아끼던 것을 쓰기로 했다면 미뤄둘 이유가 없다.

정명은 망설이지 않고, 아이템 사용 버튼을 눌렀다.

[C등급 선물상자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랜덤으로 받기를 선택할 경우 무척 낮은 확률로 특별한 아이템을......]

“이, 씨. 랜덤은 무슨. 꺼져!”

정명은 질색하며 랜덤 운운하는 메시지를 치워버렸다. 과거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명은 지금 보고 있는 C급 선물상자 외에도, 선물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지난 스프링 리그 3위를 했을 때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아이템인 D급 선물상자였다.

당시 정명은 상자를 사용하기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랜덤으로 받기를 선택했다.

C등급 상자에서 A등급 아이템이 나왔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왔던 아이템은 정명의 기대를 배신하기에 충분했다.

[임프의 장난]

상자를 열었으나 이미 누군가가 털어간 상자였습니다.

충격으로 인하여 일주일간 집중력이 10% 하락합니다.

그리고 그 후, 정명은 괜히 짜증이 나서 경기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일주일. 승점을 잃기에는 무척이나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일을 떠올린 정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없지.’

정명은 랜덤으로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치워버리며, 일반적인 방법으로 선물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C등급 선물상자를 열어, ‘칼라의 힘’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아이템의 효과는 48시간동안 지속됩니다.

[칼라의 힘 (레플리카)]

스킬 : 칼라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신력 스탯에 비례하여 집중력과 팀워크를 일시적으로 상승시킵니다.

현재 정신력 스탯 : 57

43분에 한 번,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5.7초 동안 스킬이 유지됩니다.

*양산형 복제품이므로, 아이템의 등급이 3단계 하락했습니다.

*팀원의 정신을 안정시키는 부가 효과가 있습니다.

정명은 아이템의 설명을 읽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법 쓸모가 있겠는데? 스킬도 그렇고, 부가 효과도 그렇고. 내일 경기는 부담이 워낙 심하니까.’

가끔 보면, ‘연습실에서는 잘 하는데 무대만 나오면 못 한다.’ 는 선수들이 있다.

연습실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에서는 평소 자신의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무대 앞에만 서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먹먹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무대 경험이 많은 GLG는 그런 중압감을 덜 느낄 테고. 뭐, 이제는 아니지만.’

지난 번 싸울 때는 3:1로 패배했다.

그리고 스탯 능력치를 올린 후,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정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명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에서 나왔다.

잠시 뒤.

정명은 아이템이 바로 적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내일 경기 때문에 위가 아프니 어쩌니 하며 빌빌거리고 있던 팀원들이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명은 모니터를 열심히 보고 있는 조시에게로 다가갔다.

“뭐야? 뭐 재미난 거라도 있어?”

“네. 레딧에 올라온 한국 사람들 반응이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내일 경기에 관심이 많나 봐요.”

“아, 그래. 해외리그까지 챙겨보는 사람도 꽤 있지. 특히나 이 시즌에는 다른 나라들의 실력은 어떤가 궁금해 하기도 하니까 말이야.”

조시가 보고 있는 것은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 언벤에 올라온 한국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언벤 사람들은 가끔 북미 커뮤니티인 레딧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번역하여 언벤에 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것을 북미 사람들이 배워간 것이다.

이제는 레딧 사람들 또한 언벤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번역하여 레딧에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관음증이다 뭐다 하는 비난이 가끔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시물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번역물을 한번 살펴본 정명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한국 사람들도 당연히 GLG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네? 괘씸한 녀석들 같으니.”

“그렇죠 뭐. 3년 연속 TBM과 GLG가 나란히 월드 챔피언십에 진출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관성적으로 말이에요.”

조시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모니터 한 곳을 짚었다.

“여기, 한국어를 번역한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해석 안 했다는 게 몇 개 있네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음...이거는 좀 비속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명은 ‘그래봤자 북미잼임. ㅇㅈ? ㅇㅇㅈ.’이라는 댓글 외, 번역 글을 올린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번역을 못 했다는 댓글 몇 개를 해석해주고는, 정정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랬더니 밤에 안자고 있던 팬들이 많았던 듯, 정명의 댓글 뒤로 답 댓글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에 안자고 뭐하세요?

?이 사람 진짜임?

?내일 경기에서 캐릭터 뭐 꺼낼 건가요?

?이 게시물을 번역한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서 내버려 뒀었는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어는 어렵네요 :D

선수 본인이 오니, 게시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당연히 GLG가 이길 거라던가, OMA는 해외에 나가면 처참하게 썰릴 것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갑자기 OMA만이 북미의 희망이다, GLG는 쓰레기 팀이라는 등등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시는 그런 사람들의 태세변환을 보며 큭큭 웃었다.

“정말 저 사람들의 말처럼 됐으면 좋겠네요. 솔직히 저는 섬머리그의 악몽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음, 그래? 근데 이번에는 잘 될 것 같아. 근거는 없고, 그냥 내 감이지만!”

@@@@@

경기 당일.

경기장에서는 GLG를 외치는 팬들의 함성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놈의 GLG랑 TBM은 진짜...내가 언젠가는 박살내고 만다.”

“그 말, 팬들이 들으면 엄청 싫어할걸요? GLG랑 TBM은 북미의 자존심인데.”

정명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이번 경기의 해설자이자 전직 프로게이머, 소린이었다.

선수 대기실에 놀러온 소린은 웃으며 말했고 정명은 소린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싫어하라고 해요. 어차피 이번에 우리가 북미의 자존심이라는 타이틀을 가져올 테니까.”

그리고 한 시간 뒤.

북미리그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세트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 경기에서 기선제압을 해 놓으면, 5세트 까지 가며 피 튀기는 싸움을 할 것도 3:0에서 끝내버릴 수 있죠. 3:0이랑 3:2 스코어는 정말 한 끗 차이에요.

-반대로, 1세트에서는 위험한 전략도 꺼내놓을 수 있죠. 1세트니까요!

경기가 시작되며, 관중석의 팬들이 무대를 환호성으로 채울 무렵.

시끄럽던 경기장이 조금씩 조용해지더니, 이내 침묵만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GLG 선수들이 OMA의 정글 측으로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명 1레벨 갱킹, 인베이드였다.

정명은 정글로 들어오는 다섯 명의 선수들을 보며 황급히 외쳤다.

“뒤로 빼. 당장!”

급하게 뒤로 후퇴했지만 운 나쁘게도 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죽은 사람은 제일 바깥에서 망을 보던 탑 라이너, 웨이홍이었다.

그는 점멸을 써서 열심히 도망쳤으나, GLG측 선수들도 점멸을 써서 따라왔기에 결국 잡혀버렸다.

[퍼스트 블러드. 적에게 당했습니다.]

그렇게 정글이 점령당하자, 조시는 당황한 듯 말했다.

“어떡하죠? 저도 적 정글에 가서 시작해야 할까요?”

“아니. 우리도 한 번 들어간다. 1레벨 싸움이면 우리 쪽 조합이 유리해. 잘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와 동시에 정명은 스킬을 쓰며 안으로 들어갔다.

[스킬 칼라의 힘을 사용합니다.]

*5.7초 동안 집중력과 팀워크가 대폭 상승합니다.

*남은 쿨타임 시간 : 43분

얼핏 보면 공포의 사령관 스킬과 비슷한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 스킬의 좋은 점은 스킬 사용 후에도 팀원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부작용 따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매 경기마다. 그리고 어느 때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좋아. 느낌이 온다. 이건 다 잡을 수 있겠어!’

스킬을 사용하자, 정명을 포함한 OMA 팀원들은 순간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팀원 모두가 생각을 공유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서포터를 노렸다.

-OMA! 역습입니다!

-GLG, 일단 서포터는 버려야 합니다. 살릴 수 없어요!

[OMA_mid님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서포터에 이어 탑 라이너를 잡았고, 그 순간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명이 더블킬을 내자, GLG 선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헐레벌떡 도망쳤으니까.

그리고 정명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쫒아 들어가! 저 녀석들, 처음에 점멸이 다 빠져서 도망 못 갈 거야!”

처음 한 두 녀석을 잡고 시작하면, 더 이상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추격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 처음에 웨이홍을 잡기 위해 쿨타임 300초짜리 점멸 스킬을 모두 사용한 GLG 선수들은 하나 둘, 잡히며 킬을 내주기 시작했다.

-아아아, 이거 망했어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합니다!

-욕심이 너무 과했습니다. 1킬 냈을 때 바로 빠졌으면 이런 꼴 안보죠!

그리고 잠시 뒤.

쿼드라 킬을 달성한 정명이 위풍당당 라인으로 복귀했다.

시작하자마자 아이템을 세 개 들고 온 정명과, 처음에 살 수 있는 기본 아이템만을 들고 있는 스케스벤.

GLG 입장에서는 머리를 감싸쥘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고, 마침 카메라가 두 미드라이너의 모습을 잡아 비교했다.

팀원들과 낄낄대며 웃는 정명.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마우스를 깨작거리는 스케스벤의 모습이 무척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스케스벤. 막 여자한테 차인 표정을 짓고 있네요.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야죠!

-이게 만약 연습게임이었다면, GLG측에서는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방 다시 파고 리게임 합시다.’ 라고요. 하지만 이거는 연습게임이 아니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해설들은 GLG에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쩐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드에서 솔로킬이 나왔고, 해설들은 그때부터 입을 다물었다.

.........

-OMA, 기적의 한 타! 한타 한 번으로 그동안의 실점을 모두 만회합니다!

-갑자기 이 얘기가 떠오르네요. OMA는 가끔 예술일 정도의 한타를 보여주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더라 하는 얘기요.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아뇨! 반대입니다. 매 경기마다 그런 슈퍼플레이가 나오고 있어요. OMA가 이 정도 기량을 매 번 보여줄 수만 있다면,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기대할만 하겠습니다!

@@@@@

첫 경기가 끝난 후, 두 시간이 지났다.

북미의 희망이었던 팀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큰 무대. 그리고 1년에 단 한 번 오는 기회.

이런 압박감 속에서 GLG, 그리고 OMA 사람들은 무척이나 기분이 날카로워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스케스벤은 연달아 정명에게 솔로킬을 당했고, 팀원들은 스케스벤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 했다.

“야, 첫 경기 진거는 진 거고,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왜 자꾸 던지는 거야!”

“그러게. 섬머리그 때는 저 녀석, 네가 이긴 적도 많았잖아? 그 때처럼 만 해 봐.”

“나도 그러고 싶거든? 근데 오늘 따라 스킬이 더럽게 안 맞네, 씨. 짜증나게.”

팀원들은 스케스벤이 첫 경기의 무력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컨디션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스케스벤의 컨디션은 정상이고 정명이 피지컬로 찍어 누른 것이었지만, GLG 선수들을 포함한 팬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찢어진 팀원들을 박살내는 것은 정말로 쉬웠고, OMA는 GLG를 3:0으로 꺾으며 경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

“우리를 응원해주신 팬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팀원들 정말 고생 많았고...”

조용해진 경기장 안에서 정명이 무미건조하게 승자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OMA를 외치며 환호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망한 듯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TBM을 이겼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정명은 그런 팬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적당히 인터뷰를 마무리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월드 챔피언십에 대표로 나갈 세 팀이 결정되었다.

C90, TBM, 그리고 OMA.

이제 이 세 팀이 북미의 새로운 자존심이자 희망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정명은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겨우겨우 GLG를 꺾고 월드 챔피언십 티켓을 쟁취했건만, 팬들은 OMA는 안중에도 없고 C90이나 TBM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C90이랑 TBM이 정규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 우리는 뒤늦게 물이 좀 올라서 간신히 티켓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북미의 팬들은 팀으로써의 OMA는 얕잡아 볼지언정, 정명 개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정보는 시스템 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명성 : 1001]

*평가 : 북미 리그의 팬들은 당신을 북미에서 손꼽히는 선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동안 북미에서 쌓은 명성은 당신이 당장 프로게이머를 은퇴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북미에서 활동하던 게 헛짓거리는 아니었다는 건가. 그것 참 다행이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은퇴할 생각 따위는 없지만.”

시스템 창을 닫은 정명은 곧장 연습실로 나왔지만,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막 강행군을 끝낸 참이니, 오늘만큼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던 그 때, 정명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정명이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보니, 코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정명.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우리가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나면 효과가 좀 있을까?

다른 팀들이 다 간다고 하니까 불안해서 묻는 말이야.

ⓒ 추어탕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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