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그곳은 우리가 간다 (1) >
6개월 뒤.
전 좌석에 사람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OMA와 GLG가 맞붙고 있었다.
그리고 정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중이었다.
“아, 이거 애매한데. 조시, 강타 타이밍 잘 봐라. 원거리 궁극기 떨어지면 백작 잡던 거 뺏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정명의 걱정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원거리 궁극기에 대형 오브젝트를 뺏기고, 설상가상으로 팀 전체가 뒤를 잡혔던 것이다.
결국 OMA는 마지막 한타에서 대패를 해버렸고, 그 결과 그대로 게임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서 실수를 낸 조시는 머리를 푹 숙였고, 넥서스가 깨질 때 까지 고개를 들지 못 했다.
-GG! GLG가 OMA에게 3:1로 승리하며, 섬머리그 3위를 확정짓습니다!
-OMA도 훌륭했지만, GLG가 더 훌륭했던 것 같네요. OMA, 무척이나 아쉽겠습니다!
섬머리그 3, 4위 결정전에서의 패배.
정명은 패배 창이 떠있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 운이 나빴다. 거기서 백작 스틸만 당하지 않았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올스타전 투표가 끝난 이후, 스프링 시즌을 지나 섬머 시즌까지 왔다.
거기에 더해, 섬머 시즌 또한 방금 막을 내렸다. OMA가 4위로 시즌을 마감한 것이다.
게임이 끝났지만, OMA 사람들 모두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조시는 이제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고, 정명은 그런 조시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그때 강타만 잘 썼어도, 역전할 수 있는 경기였는데.”
“뭘 궁상떨고 있냐. 이제 일어나자. 남은 경기에서 잘 하면 되지.”
“......네.”
정명의 말 대로, 섬머리그는 끝났지만 아직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월드 챔피언십이라는 대형 이벤트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섬머리그 1위를 한 C90이 월드챔피언십 티켓을 한 장 가져갔다.
그 다음으로 윈터, 스프링, 섬머리그에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준 TBM이 또 한 장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북미지역에 배정된 남은 티켓 한 장.
그것은 나머지 3~6위를 한 팀이 토너먼트를 벌여, 최후의 승자가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월드 챔피언십 진출 팀 결정전.
그 때 이긴다면, 지금까지 졌던 모든 경기를 만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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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위전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패배의 아픔을 마음 구석으로 밀어둘 수 있었던 정명은 은행으로 향했다.
트이치TV에서 받은 정산금을 출금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으로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개인방송으로 번 돈을 모두 환전한 정명은 원화로 환전된 금액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6개월 동안 개인방송으로 번 돈이 1억? 이런 미친, 내 연봉하고 비슷하잖아. 여왕벌 특성 덕분인가?”
정명은 몇몇 BJ들처럼 비키니를 입고 방송을 하거나, 키보드를 때려 부수는 등의 자극적인 컨텐츠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은 트이치TV 개인방송랭킹 4위를 꿰차며,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전문 개인방송인으로 전업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이 참에 그냥 개인방송 시간을 더 늘려버려? 개인방송에 시간을 더 쓰면, 이것보다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혼잣말을 하던 정명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차에 올라탔다.
이제는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정명이 연습실로 들어가니, TV를 열심히 보고 있는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조시는 막 들어온 정명을 보며 서둘러 손짓했다.
“월드챔피언십 순위 결정전 시작했어요. 지금이 한창 재미있을 때니까, 빨리 와서 보세요!”
“잠깐만. 사 뒀던 푸딩이...”
“간식도 이미 챙겨 놨어요. 내가 거의 다 먹었지만.”
“어, 그래. 그렇구나.”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시는 그동안 살이 더 쪘다.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에리는 정명에게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듯, 의자를 팡팡 치고는 말했다.
“해설자가 그러는데, 6위 팀이 마지막 티켓을 거머쥘 확률이 10%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그것도 많아 보이지만.”
“뭐, 그렇긴 하죠. 특히나 6위 팀이라면 5위, 4위, 3위를 연달아 이겨야 겨우 진출할 수 있다는 거니까. 컨디션 조절도 힘들고, 전력 노출도 심하고. 여러모로 힘들어요. 가뜩이나 상대는 자신보다 더 잘하는 팀들인데.”
“그래도 다들 잘 하네. 나도 서포터를 저렇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뒤늦게 프로게이머가 된 에리는 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다만, 최근 공격적인 캐릭터를 선택하는 서포터가 유행이 되었는데, 그 유행에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공격적인 서포터를 하려면 호전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공격성이 부족했기에 유행을 따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명은 그런 팀원들과 시계를 번갈아 보더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쉬는 시간 끝났어요. 우리도 슬슬 연습해야죠. 다들 자리에 앉으십쇼.”
오늘의 연습경기 상대는 TBM. 평소 같았다면 연습경기 일정을 잡기 무척 힘든 팀이었다.
하지만 섬머리그가 끝나며 대부분의 팀들이 휴가를 떠났고, 연습을 할 수 있는 팀이 상당히 부족해졌다.
그리고 그 덕분에 OMA는 TBM이나 C90처럼 실력 좋은 팀과 매번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OMA는 TBM과 하루 종일 연습게임을 했고, 그들에게 익숙해질수록, 승률은 점점 높아져 갔다.
몇 시간 후.
연습경기의 마지막 판에서 정명이 마지막으로 남은 적 상대를 처치하며 승리를 확정지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마무리.]
그리고 연습경기이기에, 미련 없이 뜨는 TBM의 항복 선언.
조시는 승리를 확정짓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이햐, TBM을 상대로 이렇게 이기다니. 우리 정말 프랑스행 티켓 따낼 수 있겠는데요?”
“그래. 내가 봐도 만족스러운 경기력이네. 다들 수고했고, 오늘은 이만 쉬자.”
팀원들은 이젠 TBM이 만만한 것 같다며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잠시 뒤.
팀원들의 틈에서 살며시 빠져나온 정명은 자신의 상태창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연습게임으로 받은 500포인트를 더하면...간신히 스탯을 하나 더 올릴 수 있겠어. 이게 효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현재 능력치]
피지컬 (76/100)
정신력 (57/100)
오더 (68/100)
판단력 (75/100)
[잔여 포인트 : 5100]
SAO시절 때와는 달리, 정명은 압도적인 승률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들어오는 포인트의 양이 만족스럽지 못 하게 되었고, 성장이 더뎌지게 된 것이었다.
‘이거 하나면...다음 경기는 그럭저럭 이길 수 있겠지.’
그리고 정명은 피지컬 스탯을 하나 더 올리며 그날의 하루를 마감했다.
@@@@
다음 날 경기장.
에리는 정명을 툭툭 치며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좀 봐! 오늘 우리 상대들이야.”
6위 팀과 혈전을 치른 다음날, 또다시 혈전을 치러야만 하는 팀 미라클 선수들은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에리는 그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쟤네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것 같다. 이번 경기는 쉽게 갈 수 있을지도...”
“에리, 저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신도 엄청 긴장해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컨디션 괜찮은 겁니까?”
정명이 되묻자, 에리는 헤헤 웃으며 답했다.
“그래보여?”
“예. 부담되는 건 알겠는데, 너무 걱정 마세요. 오늘 경기는 무척 잘 풀릴 것 같으니까.”
정명이 자신감 넘치게 말하자, 에리는 안심이 되었는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래. 우리 캐리꾼만 믿고 갈게! 팀 미라클 따위, 쳐부수는 거야!”
...
그리고 잠시 후 시작된 경기.
밴픽 단계에서 원하는 캐릭터를 고를 수 있었던 정명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숙련도 보정을 받으면, 피지컬 80의 벽을 넘을 수 있다.’
[환영술사의 숙련도 : LV 3 원소술사]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수준입니다. 당신은 이 캐릭터의 장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피지컬이 77 + (3)으로 보정됩니다.]
숙련도 보정을 받은 정명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야 뭔가 일이 풀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피지컬 80대를 찍은 정명은 캐릭터를 움직이며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건 뭐랄까. 시력이 좋아진 것 같군. 지금 오락실에서 슈팅게임을 한다면, 원코인으로 보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정명을 시험이라도 하듯, 상대의 정글러가 미드로 다가왔다. 첫 갱킹이었다.
-가시고치, 정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잘 하면 첫 킬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달려듭니다! 반응이 빨라야 살 수 있...아, 네. 여유롭게 살아가는군요. 반응이 상당히 빨랐습니다.
갱킹이 허무하게 실패하고 쓸쓸히 돌아가는 가시도치.
정명은 그 뒷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냥 딱 보이네 이거. 이 정도면, 바로 피하지.’
그 뒤로도 그런 순간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정명은 상대 정글러가 맵에 살짝 보이는 것만으로도 무섭게 반응하며, 정글러의 갱킹 의욕을 떨어트렸고, 그런 정글러의 시간낭비는 전부 OMA의 득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전직 프로게이머, 찰스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맵 리딩이 말도 안 되게 빠르다. 아니, 대체 저런 사람한테 피지컬이 낮다고 할 수 있는 거지? 다들 LOH 볼 줄 모르는 건가?”
“그냥 운 좋게 잘 피한 것 같은데. 저게 그렇게 대단해?”
LOH을 잘 하지 못하는 친구의 물음에, 찰스는 열변을 토했다.
“당연하지! 캐릭터를 정교하게 컨트롤하면서도 미니맵을 계속 체크하는 플레이가 얼마나 까다로운 건데. 저건 죽어라 훈련해도 안 되는 사람은 끝까지 안 되는 거라고. 나처럼 말이야.”
갑자기 진화한 시력의 좋은 점은 갱킹을 피할 때뿐만이 아니었다.
1:1 라인전에서 스킬을 피할 때에도,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상대 미드라이너가 들고 온 스킬은 전부 논 타겟형 스킬. 즉, 플레이어가 스킬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스킬들이었다.
물론 스킬의 속도가 무척 빨라 보통사람으로써는 보고도 피하기 어려웠지만, 정명은 스킬이 나가기 전, 캐릭터가 취하는 특정 움직임에 주목함으로써 한 템포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이노시틀 선수, 스킬을 좀 더 신중히 써야 할 것 같은데요? 적중률이 너무 떨어집니다.
-어쩌면 정명이 스킬을 잘 피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평소 정명의 피지컬을 생각하면...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딜 교환을 하는데, 상대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두 번 연달아 솔로 킬을 내준 미라클의 미드라이너, 이노시틀은 완전히 페이스를 잃어버렸고, OMA는 그것을 발판삼아 손쉽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잠시 후, 두 번째 경기 시작 전.
경기 시작 시간이 되었지만, 미라클 측에서 5분의 추가 휴식시간을 요청했다. 선수들의 컨디션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명은 코치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미라클의 미드라이너, 이노시틀이 지금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다네. 압박감이 상당했나봐.”
“허...그런가요? 중요한 경기라서 그런지 긴장을 많이 했나보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서 봐주거나 할 수는 없다. 만약 정명이 라인전에서 졌다면,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은 자신의 팀원들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문제의 그 선수는 잠시 쉬었음에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는지 1경기보다 못한 기량을 보였고, OMA는 손쉽게 2, 3세트를 가져갔다.
“우리가...이겼군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이렇게만 해 봅시다.”
오늘의 경기가 모두 끝났다.
승리가 확정되었지만, 격하게 좋아하거나 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OMA에 아무도 없었다.
월드 챔피언십을 위한 마지막 관문, GLG전이 남아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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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연습실로 돌아온 정명은 커뮤니티 기사를 읽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섬머리그 3, 4위 결정전에서 OMA를 쉽게 꺾은 GLG가 이미 월드 챔피언십에 진출한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붙어보고 싶은 상대는 한국 팀들...이라고? 한국에서 연습하기 위해 베이스 캠프를 알아보는 중? 김칫국을 사발로 퍼 마시네 이것들이.”
그와 동시에, 정명은 그런 그들에게 줄 선물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스템 창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원하는 물품을 찾아내었다.
[C급 선물상자]
무엇이 나올지 두근두근한 선물상자.
당신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명이 찾은 것은 C급 선물상자.
한국에서 그랜드 마스터 5위 달성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얻은 무언가였다.
“사실 월드 챔피언십 경기에서 쓰려고 아껴뒀던 거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진출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 못 하니까. 내일 바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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