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윈터리그의 결말 (2)
정명은 여자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뚱뚱해보일 정도로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던 여자는 마치 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명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묘하게 친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ITU 매니저의 통역으로 온 사람은 바로 지난 번, 기레기 사건의 주모자였던 중국 웹진의 기자, 메이였다.
“기자 아니셨나요? 여기서 뭐 하십니까?”
“보시다시피 통역이요. 그만한 소동을 냈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잖아요. 중국 구직시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데...”
기레기 사건처럼 무언가 트러블이 발생할 경우, 중국 회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다.
빠른 해고.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녀를 대체할 인원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일할 사람은 너 말고도 넘친다’ 라는 거죠. 솔직히 저도 억울하거든요? 저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메이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정명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거는 제가 알바 아니고요, 한번 봐 드렸으면 됐지 무슨 염치로 다시 이곳에 들어오신 겁니까. 중국으로 썩 돌아가세요.”
“그건 안 돼요! 중국이랑 미국은 연봉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죽어도 못 가요!”
“그럼 우리랑 엮이지 않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보아하니 능력 좋으신 것 같은데 금방 다른 일자리를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메이가 뭐라고 하던 정명은 계속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메이는 처음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싹 지우고는,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저기...아직 그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나요?”
“네.”
“음...그럼 제 가슴 만지실래요?”
“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얼이 빠져 있는 정명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한국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남자친구가 화났을 때 이 한마디면 화가 순식간에 풀린다고 해서...혹시 생각 있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시무룩해진 메이를 보며 정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애초에 이 대화의 목적은 그녀의 밥줄을 끊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 대신, 적당히 목줄만 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정명에게 미인계가 통하지 않자, 메이는 징징거리며 자신이 쓸모있음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한번만 봐 줘요...언젠가 제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요? 예를 들어 중국 팀으로 이적을 원하실 때, 제가 도움을 좀 드린다거나...”
“중국 팀으로 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뭐 좋습니다. 대신 두 번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서로가 무척 피곤해질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거기에 어떻게 취업하신 거예요? 솔직히 저라면 안 썼을 것 같은데.”
정명의 질문에 메이는 머뭇머뭇 하며 연습실과 정명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어...비밀 지켜주실 수 있어요?”
“말하기 좀 그러시면 말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뇨, 말 해 드릴게요. 이건 진짜 비밀인데...ITU의 매니저가 구린 구석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얘기하며 부탁 하니까 절 이곳에 넣어 주시던데요? 월급도 많이 쳐주시고. 헤헤.”
@@@@@@
“순위가 바뀔 생각을 안 하네요. 공동 3위라...근데 우리 나머지 경기 상대는 좀 쉬운 팀들이니까 3위는 우리 차지겠죠? 그럼 플레이오프까지는 조금 쉬엄쉬엄 해도 되겠다.”
피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늘까지의 리그 순위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1위 : TBM 12승 3패 (+16)
2위 : GLG 11승 4패 (+13)
3위 : 미라클 : 10승 5패 (+10)
3위 : OMA : 10승 5패 (+10)
5위 : ITU 9승 6패 (+8)
6위 : 토베노 7승 8패 (+5)
플레이오프는 총 12개의 팀 중 6팀이 참여하게 된다.
순위 1,2위는 이미 4강에 진출해 있고, 3위 vs 6위. 그리고 4위 vs 5위의 승자가 각각 1, 2위와 맞붙게 되는 방식이었다.
순위표를 본 다른 선수들 또한 피터의 말에 동의했다. 장기 레이스가 끝나가며 슬슬 체력이 달리니, 쉬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가는 탓이었다.
그리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잔소리꾼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들이 툭 하면 쉬려고 그러네. 뭐, 다른 팀들도 사정은 비슷하겠지만.’
정명의 생각대로 다른 팀의 사정 또한 비슷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6위권에 들지 못한 팀들의 사정이 매우 나빴다.
연습은커녕 다른 팀으로의 이적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던가, 개인방송으로 부수입을 올리는데 열중하고 있는 선수들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결과는 다음 날 치러진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
-유프리우스 선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또다시 혼자 짤리네요!
-시야가 없는 곳에는 함부로 고개를 들이 미는 게 아니죠. 정 궁금하다면 서포터를 던져줘야 했습니다. 미드라이너가 직접 들어가는 것은 명백한 실수죠.
‘라인전은 그럭저럭인데 팀워크가 형편없군. 코치들 말로는 맨날 개인방송만 돌렸다던데...딱 보기에도 그러네. 경기 내내 따로따로 놀고 있어.’
팀 카스의 현재순위는 9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상대가 OMA이니만큼 오늘 경기에서 이길 가능성도 희박하다.
때문에 팀 전체가 연습은 뒷전이고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빴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모두가 예측한 대로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고, 팀 카스는 OMA에게 2:0으로 완패하며 순위가 한 계단 내려갔다.
[1부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2:0 완승 보너스! 500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됩니다.]
포인트도 들어왔고 기분 좋은 2:0 승리를 따냈지만, 정명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리고 변변찮은 승리에 기뻐하는 대신, 포인트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군. 포인트를 이렇게 쥐꼬리만큼 주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이런 녀석들이 상대이니, 포인트고 뭐고 적게 들어올 수밖에.’
1위팀 TBM을 이겨도, 12위팀 스콜피온즈를 이겨도 들어오는 포인트는 1000~1500으로 일정하다. 하위권 팀들이 평균 수준을 떨어트렸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니 정명은 북미 팀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특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다고 연습을 내팽겨친 팀을 눈앞에서 보니 더더욱.
때문에 이번 MVP 인터뷰에서 그들에게 쓴 소리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나도 인기 좀 쌓았으니까 하고 싶은 말 한다고 해서 엄청 욕먹지는 않겠지?’
결심은 했지만, 약간은 불안하다.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정명은 상태창을 켜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팬들의 수 : 973명]
*평가 : 당신을 응원하는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팬들은 당신이 다른 팀으로 이적한다 해도, 변함없이 당신을 응원할 것입니다.
[명성 : 437]
*평가 : 북미 리그의 팬들은 당신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면,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좋아. 나도 이제 초보 딱지는 뗀 것 같으니...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살까.’
......
언제나처럼 치러지는 MVP 인터뷰.
인터뷰에 흥미 없는 팬들은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절반 정도의 팬들은 정명의 인터뷰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솔직히 한심합니다. 연습을 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이럴 거면 그냥 기권 던지고 집에서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 아까우니까.”
정명은 인터뷰를 하자마자 폭격을 개시하듯 악담을 퍼부었다.
눈치 빠르게도 재미있는 것이 펼쳐질 것을 직감한 팬들은 떼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고, 트래시 토크에 익숙한 리포터는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오늘 상대였던 유포리우스 선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팀 카스 선수 전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얘기할 사람은 많은데, 그러면 말이 길어지니까 이번에는 P.O에 진출할 가능성이 없다며 연습도 안 하고 개인방송이나 하면서 용돈이나 벌고 있는 선수들에 대해서만 말 하고 싶네요.”
개인방송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되니까.
프로로 활동하며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개인방송을 돌리면, 그 수입만으로도 먹고 살만한 돈이 벌리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P.O에 올라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연습을 조금 설렁설렁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정명은 대답을 미루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일방적으로 흘러가 조금 지루했던 경기를 볼 때보다 지금의 인터뷰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는 아는데 한국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바보취급 당했을 겁니다. 프로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를 높이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해요. 그게 싫다면 프로 때려 치고 전문 BJ나 하면 되겠죠.”
-맞아! 때려 쳐라!
-북미에서도 수준 높은 경기 좀 보자! 내가 해도 더 잘하겠다!
정명의 말에 팬들이 환호하며 동조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PD의 신호를 본 리포터는 급하게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시군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런 게으른 선수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제가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앞으로의 경기에서 저에게 솔로킬을 당한다면, 반성의 의미로 삭발하십시오. 반대로 제가 솔로킬을 내지 못 한다면, 500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저에게 솔로킬을 내신다면? 이발키트 들고 직접 제 머리카락을 밀어버리십시오. 이상입니다.”
......
정명의 인터뷰는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만 뷰를 달성하며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북미 LOH 팬 사이트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정명은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엄청나게 욕 얻어먹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이네.’
반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고, 속 시원한 인터뷰라고 칭찬하는 내용들이 줄을 이었다.
슈퍼소닉 : 우리가 왜 매번 월드챔피언십에서 빌빌거리나 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 북미 리그는 그 근본부터가 썩었어. 대진운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냥 못해서 졌던 거야...
?마테리얼 : 동감. 재능도 없는 놈들이 재능 넘치는 한국 선수들보다 연습도 더 안한다니...정말 아이러니하군.
99821 : 그나저나 저 사람 다시 봤다. 매번 한국 사람들처럼 미적지근한 인터뷰만 하길래 역시 한국인은 어쩔 수 없는 건가...했는데 이번에 시원하게 질렀네! 리그 끝나고 개인방송 열면 바로 달풍선 쏜다!
?익명889 : 나도. 이번에 팬 됨 ㅋㅋ......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것을 증명해내지 못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정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명은 연습을 게을리 하는 것으로 평가받던 선수들을 완전히 박살내며 스스로의 말을 지켜냈다.
-솔로 킬! 정명 선수가 크롬 선수를 상대로 멋진 솔로 킬을 따 내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오늘따라 환호성이 크군요. 네!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저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합니다. 하하!
사실 정명의 말은 약속도 뭣도 아니었다. 솔로킬을 냈다고 해서 상대 선수가 정명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삭발을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솔로킬을 당했던 크롬 선수 또한 정명의 말을 개소리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기에서 진 뒤, 연습실에 돌아와 개인방송을 돌리던 크롬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뭐야? 이놈들 왜 이래? 이거.”
솔로랭크를 시작한 뒤, 크롬을 알아본 팀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게임을 하다 말고 갑자기 모두 귀환을 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게임을 하는 대신,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머리 안 깎고 뭐 하냐 패배자야, 내가 깎아줄까?
-프로대 프로끼리 붙었는데 솔로킬을 자유자재로 낸다고? 쯧쯧 대체 실력차이가 얼마나 나는 건지.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는데, 정명의 말대로네. 이것들, 연습은 안 하고 개인방송만 돌리고 있어! 이 녀석들이야 말로 북미리그의 암덩어리야!
“아 씨...이런 트롤새끼들. 행님들,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면 추천, 즐겨찾기, 달풍선좀 부탁드리겠습니다. OMA 빠돌이들 때문에 게임을 할 수가 없네요.
크롬은 마이크에 대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그의 팬들이니까.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 주니까.
하지만 크롬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방송 채팅창에서도 욕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삭발 안 하면 즐찾 삭제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흥 깨지 말고 웬만하면 삭발 하자. 삭발하면 달풍선 쏨.
-야이...왜 이래 재미없게. 그래서 머리 안 깎을 거야?
비난이 빗발쳤지만, 크롬은 머리를 깎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자존심 강한 그의 성격상 삭발하면 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 대신 크롬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이 새끼 너무 깝치는데 형이라면 이길 수 있죠? 이새끼 주둥이좀 닥치게 해줘요.”
-당연하지. 전에 붙었을 때는 별 것 없었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그놈 솔로킬 따 내고 공개적으로 사과시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