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양민학살의 시작 (2)
스킬 교환으로 상대의 실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른 프로게이머도 물론 가능하다.
TBM의 미드라이너, 다이로스는 몇 번 스킬을 주고받더니 끙 소리를 내었다.
“어휴...저기, 혹시 OMA의 미드라이너가 몇 살인지 아는 사람 있어?”
“뭐야, 뜬금없이.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은데 왜?”
“20대 중반이라고? 그럼 나랑 비슷한 나이라는 건데...지난 번 상대했을 때보다 피지컬이 훨씬 좋아진 것 같은데? 뭐랄까... 저 사람 무빙하는 게 중국 애들 상대할 때랑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이야. 손이랑 반응속도가 무척 빨라.”
피지컬이라는 것은 단련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후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 중국 팀들은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20살이 안 될 정도로 점점 어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20대 중반의 선수가 그들과 비슷한 움직임을 낸다? TBM의 정글러 애드윈은 다이로스의 말에 콧방귀를 끼었다.
“피지컬이 좋아졌다고? 지금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어찌됐건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힘들면 미드 가서 좀 찔러줄까?”
“그러는 게 좋겠어. 그 전에 잠깐만, 딜교환 걸어서 피 좀 빼놓고.”
다이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스킬을 몇 번 던졌지만, 스킬들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맞지 않았다.
시간을 더 낭비할 수 없었던 애드윈은 어쩔 수 없이 곧바로 미드를 향해 달려갔지만, 허탕이었다. 애드윈이 맵에 살짝 보이자마자 정명이 빠른 속도로 캐릭터를 뒤로 뺐기 때문이었다.
애드윈은 정명의 반응속도를 보고는 방금 전, 다이로스의 말을 긍정했다.
“확실히... 반응 속도가 무슨 중국 애들 보는 것 같네. 다이로스, 그럼 일단 사려. 미드가 조금 잘 하는 것 같긴 한데, 다른 곳은 별 거 없으니까 버티고만 있으라고.”
정명이 라인전에서 우위를 가져가긴 했지만, TBM은 원래 미드가 구멍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팀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드라이너를 두고서도 TBM이 몇 년 동안 북미 리그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던 항상 1인분 이상을 하며 틈나는 대로 캐리를 해주는 탑 라이너, 정확하게 판을 읽고 명확한 오더를 내려주는 정글러, 마지막으로 대규모 지원과 끊임없이 들어오는 유망주, 그리고 서포팅을 해주는 직원들까지.
미드 라인전에서 이긴 것 하나만으로 승리를 점치기엔 TBM이 가진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애드윈의 오더에 따라 미드를 버리고 다른 곳을 파기로 한 TBM은 본격적으로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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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아휴, 힘들다.”
“형, 고생하셨어요. 컨디션 좋다고 하시더니, 다이로스가 아주 맥을 못 추네요. 우리가 더 잘 했어야 했는데...”
“아냐, 너희들도 수고 했다. 잠깐 좀 쉬자. 피곤하네.”
TBM과의 경기가 끝난 뒤. 정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연습게임의 결과는 2승 2패.
이길 때는 엄청 힘들게 이겼고, 질 때는 무척 허무하게 졌다.
경기 횟수가 적어서 승률이 50%로 나왔지만, 열 판쯤 했으면 승률이 40%도 안 될 것임을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가 알고 있었던 판이었다.
사실 그런 것은 OMA측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실력 차이야 경기 시작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문제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TBM측에서 앞으로 연습을 더 자주 하자는 제안을 먼저 해왔다는 것이었다.
피터는 그런 사실이 기뻤는지 연습이 끝났음에도 컴퓨터 앞에서 서성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와, 우리가 TBM한테 인정받다니, 이런 날도 오네요. 제가 프로게이머를 시작할 때 TBM은 이미 북미 1위 팀이었는데...사실 그 사람들 보고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었던 것도 있거든요.”
“걔네한테 인정받으면 뭐 해. 팬들한테 인정을 받아야. 진짜지. 됐고, 리플레이나 틀어보자. 실수한 부분은 없었는지 복기해 보고 싶으니까.”
“네? 오늘은 이만 쉬는 것 아니었나요? 내일부터 열심히 하자고...”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대로는 슈퍼위크에서 순위를 올리지 못 할 것 같아. 오늘부터 빡세게 간다.”
시즌이 후반으로 넘어가면 펼쳐지는 슈퍼위크는 순위를 대폭 상승시킬 수 있는 마지막 찬스라고 할 수 있었다.
1주간 4경기. 거의 쉬는 날 없이 경기를 해야 하는 슈퍼위크 기간은 무척 힘든 날이면서도 순위가 가장 많이 바뀌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순위권을 향해 올라갈지, 나락으로 떨어질지를 생각한다면, 정명은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때문에 투덜대는 팀원들을 다독이며, 팀 순위를 3위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OMA는 잠깐의 쉬는 시간만을 갖고는 다시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10일 뒤. 슈퍼위크 첫 날.
OMA는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방송국에 들어왔다.
그야 OMA가 요즘 연습게임에서 강팀하고만 연습한다고는 하지만, 정규 리그는 풀리그이다. 북미 1~3위 팀 뿐만 아니라, 랭킹 10~12위 팀과도 똑같이 경기를 하는 것이다.
오늘 상대는 1승 12패를 기록하고 있는 꼴지팀 스콜피온즈.
지금은 최하위권에서 빌빌대고 있지만, SAO 시절에는 정명과 같이 연습을 자주 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선수 대기실 앞.
정명은 오랜만에 만나는 스콜피온즈 사람들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 네. 뭐...”
당연히 잘 지냈을 리가 없다.
스콜피온즈는 시드권을 돈 주고 사서 1부리그로 올라온 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팀 분위기가 초상집 분위기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으니까.
거기다 자신들은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몇 개월 전만 해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에 있었던 정명은 훨훨 날아가고 있다면?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스콜피온즈는 정명을 만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고, 결국 정명과 스콜피온즈는 언제 친하게 지냈냐는 듯 어색하게 얘기를 나누고는 곧 헤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시는 정명에게 다가와 은근히 물었다.
“형, 쟤네랑 싸웠어요? 분위기가 왜 그래요?”
“그런 건 아닌데, 말하긴 좀 그러네. 별 일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경기 준비나 하러 가자.”
피터와 함께 무대 앞으로 나간 정명은 조금은 썰렁한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리그의 인기가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 경기는 조금 결과가 뻔 한 경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첫 경기는 5위 팀과 12위 팀. 그리고 그 다음 경기는 11위 팀의 대결.
차라리 11위 팀과 12위 팀이 붙었다면 이것보다는 더욱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명은 그런 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가지 뭐. 그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네.’
......
-아, 네이쳐 선수. 세 번째 솔로 킬입니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겠는데요.
-다른 라인도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미드라인이 특히나 망했군요. 네, 망했습니다. 이게 만약 솔로 랭크였다면 네이쳐 선수, 게임을 그냥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요.
모두가 예상했듯, 경기는 퍽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스콜피온즈가 뭘 해볼 새도 없이 라인전 단계에서 게임이 터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스콜피온즈의 미드라이너, 네이쳐에게 다섯 번째 솔로킬을 따 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사람도 프로인데 뭐가 이리 쉽냐. 내 실력이 오른 건가, 아니면 저 녀석이 못 하는 건가?’
그리고 다섯 번째 솔로킬을 따 냄과 동시에 정명의 시야에 메시지창 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인]
한 경기에서 정글러의 도움 없이 상대 라이너에게 다섯 번 솔로킬을 따 냈습니다.
<네이쳐> 선수에게 무력감, 두려움이 각인됩니다.
*무력감이 각인 된 선수는 각인을 부여한 사용자와 라인전을 치를 시,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각인을 부여한 사용자에게 한 번이라도 솔로킬을 따낼 시, 각인 상태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본 정명은 기뻐하기 보다는 약간 애매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안 그래도 난이도가 이지모드인데 이걸 베리 이지 모드로 한 단계 더 낮춰줘 봤자...’
잠시 뒤. 18분 만에 첫 번째 경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2경기에서 정명은 각인의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네이쳐가 첫 번째 경기에서도 안 하던 실수를 연달아 내며 자폭을 했기 때문이다.
-네이쳐선수, 또다시 솔로 킬...스콜피온즈 코치진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안타깝네요.
-이런 말 하긴 좀 뭐 하지만, 네이쳐선수. 혹시 계약기간이 많이 남아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조금만 더 집중하는 것이 좋을 텐데요.
두 번째 경기는 25분 만에 끝났다.
첫 번째 경기보다 7분 길어졌지만, 경기시간이 무척 짧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게임을 캐리하며 경기를 끝낸 정명은 소지품을 챙기고 부스를 나오며 여전히 부스 안에 있는 스콜피온즈 선수들을 슬쩍 돌아봤다.
‘표정을 보면 전혀 진 사람들 같지 않은데...’
스콜피온즈 선수들은 경기에서 지고난 뒤,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팀원들과 잡담을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윈터리그 전적 1승 13패. 13패를 하는 동안 패배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것이다.
정명은 그런 옛 친구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건 회복하려면 꽤 오래 걸리겠는데. 완전히 맛탱이가 갔어. 시드권을 사서 무리하게 올라오기 보다는, 2부리그에서 계속 실력을 쌓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 같네.’
정명이 보기에 스콜피온즈 선수들은 이번 윈터리그가 끝난 후, 최소 반년은 슬럼프 확정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반년이나 컨디션 회복을 기다려 줄 정도로 마음착한 구단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로가 되고 싶어 하는 재능 넘치는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있었으니까.
정명은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평소 같으면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지금은 슈퍼위크 기간이었기에 쉴 틈이 없었다.
때문에 OMA 선수들은 피곤함이 약간 남아있는 채로 경기장에 나와야만 했다.
오늘 상대는 6위 팀인 토베노. 6승 6패를 하고 있는 팀으로써, OMA 바로 밑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팀이었다.
이 매치에서 진다면 순위를 올리기는커녕 뒷덜미를 잡혀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질 수 없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피터와 함께 방송국 복도를 걸어가던 정명은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피터, 저거 서서 아니냐?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머리를 빡빡 밀었네?”
“아, 네. 맞아요. 듣기로는 이번 시즌엔 꼭 3위까지 올라가겠다고 팀원 전체가 머리를 밀었다고 하더라고요. 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명은 몇 개월 전, 그렇게 싸웠던 서서와 마주쳤지만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니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서는 여전히 싸웠을 때의 감정이 남아 있었는지, 정명과 피터를 마주하자마자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봐, 유정명. 어제 경기에서는 재미 좀 본 것 같더라. 그런데 그런 승점 자판기한테 이겨놓고 자신이 잘 한다고 생각하면 무척 곤란해.”
정명은 서서의 도발에 피식 웃었다.
“넌 지난번에 우리한테 진 건 기억도 안 나냐? 왜 이리 자신감이 넘쳐?”
“그건 우리 팀원이 못 해서 그런 거고. 난 졌다고 생각한 적 없어.”
시간이 지났지만 서서의 남 탓은 여전한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정명은 매번 남 탓을 하는 서서에게 딱 맞는 제안을 해주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 이건 어때? 첫 번째 경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글러를 부르지 않고 라인전을 진행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