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쁘니까 비켜 (5)
ITU와의 경기 당일. 정명은 똥씹은 얼굴로 방송국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틀...아니, 하루만 더 있었어도 어떻게 해 봤을 것 같은데.’
정명은 결국 경기 당일까지 필요한 포인트를 모으지 못 했다. 아니, 모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해 봤자 어차피 안 될걸 알았기 때문이다.
“저거, 정명 선수 아닌가?”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정명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명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온 LOH 팬들이었다.
정명은 팬들이 말을 걸자 곧바로 얼굴을 폈다. 팬들 앞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있을 수는 없으니까.
머리를 빡빡 민 거구의 남자는 정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헤이, 정. 오늘 이길 수 있죠? 쳐죽여버려요.”
“게임 속에서 말씀이시죠? 노력하겠습니다.”
흑형 다음에는 여대생 팬이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정명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정명, 사진 좀 같이 찍어줄래요?”
“그러세요. 자, 찍어요.”
이제는 정명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늘어나서, 방송국에 대놓고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금방금방 말을 걸고는 했다.
팬들과 헤어진 뒤, 정명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앞으로는 직원 전용 통로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네. 괜히 피곤해지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정명에게 또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이번에 말을 건 사람은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拉夫???猫”
“예?”
남자는 정명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정명이 그 남자를 자세히 보니, 팀 ITU의 유니폼으로 보이는 것을 입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ITU의 선수. 낮은 확률로 팀 관계자인 것 같았다.
정명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猫?可?”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영어로 말해줄래?”
“猫?可?!”
남자는 정명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더욱 큰 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결국 정명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뭐지 저놈은. 미국에 있으면 영어를 쓰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 보라고...’
5분 뒤.
정체불명의 중국인의 정체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똑같이 ITU의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명과 눈이 마주치자, 명확한 발음의 영어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 저는 ITU의 매니저인데요, 혹시 샤오샤오 선수 못 보셨나요?”
“샤오샤오라는 사람은 모르는데, ITU 유니폼 입고 있던 사람은 봤어요. B구역 2번 복도 근처에서요.”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중국어로 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분위기로 볼 때,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아였나? 길을 못 찾아서 나한테 말을 걸었나 보군.’
정명이 본 샤오샤오라는 선수는 나이가 꽤 어려 보였다. 그것도 막 고등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소년 정도.
사실 샤오샤오 뿐만이 아니었다. ITU의 팀원 전부가 어렸다.
ITU에서 선수를 선발했을 당시, 구단에서 중점적으로 봤던 것은 얼마나 현란한 컨트롤을 보여줄 수 있냐를 결정하는 피지컬 능력이었다.
때문에 피지컬이 최고치를 찍는 나이대인 10대~20대 초반의 선수들만 뽑고 나이가 많으면 지원조차 못 하게 막았기에, ITU에 있는 선수들이 전부 어렸던 것이다.
정명은 중국 팀들이 잦은 교전, 그리고 소규모 싸움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소수 교전이야말로 피지컬 능력이 가장 극대화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ITU를 상대할 해법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도련님처럼 떠받들리며 자라온 애들에게 협동심 따위, 기대하는 게 어리석지. 때문에 개인기가 중요한 쪽으로 무게중심을 뒀을 가능성이 있다. 뭐,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왜’ 그들이 그런 전략을 쓰는가 하는 것은 썩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그들을 ‘어떻게’ 상대 하느냐 이다.
정명은 이번 경기에서 사용하기로 한 전략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부스로 향했다.
......
경기준비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양쪽 모두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심판이 캐스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럼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밴픽, 확인하시죠!”
ITU의 밴픽은 완전히 중국 스타일이었다. 그나마 정명의 주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 환영술사를 밴 하긴 했지만, 정명은 최근 환영술사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역시. 미라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녀석들은 북미에 대한 연구를 전혀 안 해왔어. 나야 좋지만.’
밴 뿐만 아니라, ITU가 선택한 캐릭터들도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들이였다. ITU는 북미에 왔음에도, 철저하게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피터는 그들이 선택하는 캐릭터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니걸 검사라...북미에서 저런 캐릭터를 한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요. 평범하게 크면, 나중에는 그냥 잉여 되잖아.”
ITU의 탑 라이너가 선택한 캐릭터는 싸움을 좋아하는, 그러니까 1:1 대결에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였다.
게임에서는 밸런스라는 게 있으므로 당연히 단점도 있다.
손을 많이 타며, 한타 싸움에서는 위력이 약해진다.
그와 반대로 OMA의 탑 라이너, 네오가 선택한 캐릭터는 방어스킬이 많은 종류의 캐릭터였다. 라인전에서 우위를 가져가기는 어렵지만, 2:1같은 상황에서 미니언을 챙기고 버티는 데 특화된 캐릭터.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정명은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바쁘게 오더를 내렸다.
“원딜이랑 서포터, 들키지 않게 탑으로 가. 라인 스왑이다.”
라인 스왑. LOH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탑, 미드, 바텀, 정글 포지션 전략을 약간 비튼 전략으로써, 실행해도 큰 리스크가 없는 전략. 그리고 부족한 피지컬을 메우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다.
......
잠시 뒤.
기습적인 라인스왑을 당하여 2:1 상황을 마주한 ITU의 탑 라이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바니걸 검사라는 캐릭터는 계속해서 성장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성장하지 못하면, 후반에는 1인분도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캐릭터.
결국 하나, 둘 날아가는 미니언을 아까워한 ITU의 탑 라이너 마일드는 CS를 챙기기 위해 살짝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부시에 숨어 ‘제발 앞으로 나와라‘ 하며 속으로 빌고 있던 조시는 황급히 외쳤다.
“저거 잡을 수 있나? 아니, 된다. 빨리 잡아, 빨리!”
[퍼스트 블러드. 적을 처치했습니다.]
-완벽한 콤비네이션! OMA, 마일드 선수를 깔끔하게 잡아냅니다. 거기다 타워는 보너스죠!
-마일드 선수, 말리기 시작하는데요. 바니걸 검사라는 캐릭터 특성상 한 번 말리면 복구하기가 엄청나게 힘듭니다. 아무래도 ITU는 탑을 위주로 케어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모든 게 작전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너무 순조로워서 허탈할 정도였다.
10분 만에 1차 타워 철거, 동시에 첫 드래곤과 퍼스트 블러드까지. ITU는 방심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러야만 했다.
승기를 잡았음을 직감한 정명은 곧바로 싸우자는 오더를 내렸다.
“쟤네들이 시야에 보이면 네오. 넌 바로 텔레포트 타고 뒤로 돌아가. 무조건 이긴다 이거.”
그리고 벌어진 5:5 한타.
ITU는 정교한 컨트롤로 나름 분전했지만, 이미 성장의 격차가 엄청나게 난 뒤였다.
OMA는 자리가 썩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며 게임을 끝내버렸다.
-OMA의 완승! OMA가 중국에서 온 도전자를 무너트리며, 첫 승을 따 냅니다!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 겁니다. 아직 다음 경기를 봐야 하지만, 이 1승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요. OMA, 요즘 상승세가 무섭습니다. 대단해요.
해설자들은 OMA가 완승을 따냈다며 놀라고 있었지만, OMA의 부스에서는 승리의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명은 팀원들이 긴장을 풀지 않게 주의시켰다.
“라인스왑도 두 번은 안통할거다. 게임 아직 끝난 것 아니니까, 다들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정명의 생각대로 두 번째 경기는 OMA에게 상당히 힘든 경기였다.
과연 그들도 호구는 아닌지 첫 번째 경기에서 까다로웠던 캐릭터들을 모조리 밴 했고, ITU의 봇 듀오는 OMA의 봇 듀오가 라인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며, 라인 스왑이라는 변수를 원천 차단하고 있었다.
결국 경기는 안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OMA, 슬슬 패색이 짙어지는군요. 킬 스코어가 15대 5로 벌어집니다.
-라인전에서 너무 막심한 손해를 봤습니다. 킬만 주지 않는다고 해서 다가 아니에요. 탑만 해도, CS격차가 두 배는 나고 있으니, 싸움에서 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라인전 때문이었다.
확실히 차이 나는 피지컬 능력 탓에, 초반부터 말려버린 것이다.
구석까지 몰린 정명은 에라 모르겠다싶어, 지고 있는 팀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법을 쓰기로 했다.
몰래 구석에 숨어 있다가, 따로 떨어진 한 명을 덮쳐보기로.
통할 확률이 낮은 전법이었지만, OMA는 운 좋게도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서포터한테 궁 쓰지 마, 궁 아껴! 조시는 나 따라서 원딜 물고!”
게임 중반.
시야를 밝히러 온 서포터를 잘라내며 시작한 전투는 피 튀기는 혈투 끝에 ITU를 전멸시키며 끝이 났다.
단, OMA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밖에는 없었지만 말이다.
혼자 살아남은 조시는 맵을 두리번거렸다.
“뭐 하지? 혼자 살긴 했는데, 할 게 없네. 우리가 이득 볼 여지가 있나?”
“없어. 라인이나 밀어.”
정명은 흑백 화면을 바라보며,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답이 없네. 억제기는 다행히 하나만 밀리긴 했지만 솔직히 힘들어. 차라리 3경기를 바라볼까.’
패색이 짙다면, 멘탈 관리를 위해 항복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흑백 화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항복 투표에 대해 생각해보던 정명은, 허공에 메시지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복된 연습으로 인하여 팀워크가 향상됩니다.]
팀의 결속 - D -> D+로 상승
[사령관의 오오라 효과를 받아, 능력이 상승합니다.]
결속 등급 : C+ -> B-
“뭐라고?”
“정명,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제발 깜빡이좀 켜고 나와라, 심장 떨리게 하지 말고...’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놀란 정명은, 허공을 보며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포기할까 생각했던 게임을 좀 더 해보기로 결정했다.
......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화려한 컨트롤과 스킬연계에 맥없이 잡혀버린 네오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안. 손 써볼 틈도 없었어. 쟤네들 손이 엄청 빠르네.”
“괜찮아. 우리는 드래곤 오브젝트를 챙겼으니까, 우리가 이득이야.”
능력치가 상승한 이후,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갑자기 확 좋아지진 않았지만 꾸역꾸역 ITU를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ITU가 소규모 교전에 집중한다면, 정명은 큰 그림을 그렸다.
탑 라이너 네오를 미끼로 내어주고 그 사이에 드래곤을 취한다던가, ITU가 드래곤쪽에 몰려 있을 때 2차 타워를 밀어버린다던가 하며 운영 싸움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 기묘한 상황에 해설자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체 킬 숫자는 ITU가 앞서는데도 글로벌 골드는 OMA가 앞서는군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사실, ITU가 크게 실수한 것은 없습니다. 이건 그냥 OMA가 잘했다고 밖엔 볼 수 없군요. 아니면 운이 좋았던가요.
게임이 극후반으로 흘러가면, 그동안의 게임 흐름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냥 마지막에 잘 싸우는 놈이 이기는 것이다.
피지컬이냐 팀워크냐.
5:5 한타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능력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해답은, 곧바로 벌어진 한타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그렇지! 서포터는 죽어도 되니까, 피터 살려!”
“탱커, 탱커 치워 줘. 이거 너무 아프다.”
“됐다! 미니언 무시하고 바로 달려! 넥서스 깨버려!”
-OMA의 승리! 객관적인 전력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OMA가 승리를 따 냅니다!
[1부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2:0 완승 보너스! 500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됩니다.]
[실력이 뛰어난 팀을 잡아냈습니다. 50%의 포인트가 추가로 주어집니다.]
‘휴, 3경기까지 갔으면 정말 몰랐을 텐데. 운이 좋았어.’
정명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의자에 축 늘어졌다.
가혹한 지휘 스킬을 쓴 것도 아닌데, 팀원들 또한 상당히 지쳐 보였다. 정신적인 압박이 상당했던 것이다.
정명은 의자에 기대어 부스 바깥을 바라봤다. 팬들은 OMA가 이겨서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더 큰 환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정명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었다.
정명의 시야 끝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한 여기자가 있었다.
‘다음은 너다.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