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쁘니까 비켜 (3)
호텔 내부의 한 고급 레스토랑.
그곳에서는 팀 ITU의 선수, 코치, 분석팀, 매니저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ITU의 구단주가 구단의 모든 식구들을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슬슬 식사를 마쳤을 시각. 구단주는 젓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OMA라...내가 알기론 요즘 북미에서 가장 기대되는 팀 중 하나라고 하던데. 이길 수 있겠어? 이 녀석들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물론이죠. 여기 미드라이너가 제법 쓸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게 다예요. 이 정도면 원래 있던 곳에 비해서는 쉽죠 뭐.”
“그래. 너희들만 믿고 난 가 볼게. 경기를 직접 보고 싶기는 한데, 아버지가 부르셔서 가봐야 하네.”
“예. 여긴 걱정 마세요. 저희 실력 아시잖아요.”
구단 ITU를 운영하는 진샤오랑은 아직 28살밖에 되지 않은 중국의 한 청년이었다.
진샤오랑이 고작 28살만에 구단을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별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중국의 재벌 2세였으니까.
돈이 엄청 많은 아버지를 둔 덕에, 취미생활로 구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팀 창단 당시, 원래 ITU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팀이었다.
중국에서 ITU의 지난 리그 성적은 리그 8위. 중국에는 엄청난 숫자의 팀이 활동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샤오랑은 그 성적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쪽팔리게...돈을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플레이오프도 못 간단 말이야? 돈 값 못하는 새끼들.’
많은 비용을 들여 중국의 유망주들을 팀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부족했다. 때문에 비싼 연봉을 미끼로, 타 구단에서 선수들을 빼내어 팀 전력을 강화시켰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거둔 성적은 중국 리그 8위. 꿈의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월드챔피언십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성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샤오랑이 참을성 없는 중국의 재벌 2세라고는 해도, 팀을 만들자마자 세계리그에 올라가라는 것은 너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중국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던 샤오랑은, 옆에 있던 매니저에게 자조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년이나 바닥에서 빌빌거릴 줄은 몰랐어. 구단에 해주는 지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 아니면 나도 한국에서 선수들을 사왔어야 했나?”
“그건 좀 싫은데요. 우리는 무조건 중국인 순혈팀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요?”
“그래, 그랬지. 근데 앞으로도 계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면, 내 마음이 바뀔 지도 모르겠어.”
샤오랑이 만든 구단인 ITU는 스프링 시즌, 섬머 시즌, 그리고 원터 시즌이 지나고도 계속 플레이오프에 발도 들여놓지 못 했다.
그렇게 하위권 팀으로 근근이 생활한지 1년.
샤오랑은 돌연듯 북미 리그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팀의 북미 진출은 규정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북미뿐만 아니라, 한국, 유럽, 중국...다른 곳에서도 타 지역의 팀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방송사 입장에선 오히려 환영이다. 볼거리가 늘어나니까.
그렇게 해서 북미에서 활동하긴 하지만, 팀 전부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샤오랑은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매니저가 잽싸게 와서 불을 붙여준다.
“이번에는 진짜 되겠지? 솔직히 중국을 떠나 북미에서 경쟁하는 거, 엄청 쪽팔린다고. 다른 애들이 대체 북미 가서 뭐하는 거냐고 비웃더라. 그러니까, 결과를 내야 할 거야. 내 인내심이 다 떨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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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U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던 그 시각.
정명이 건넨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터는 인상을 구긴 채 물었다.
“ITU라. 여기 거기죠? 거기.”
“그래. 거기야. 우리가 토베노랑 경기했던 날, 우리의 뒤를 이어서 팀 미라클을 침몰시켰던 그 팀.”
개막전 첫날.
ITU는 전 시즌에서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갔던 팀 미라클을 2:0으로 박살내며, 북미사람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었다.
한때 중국 팬 사이에서 떠돌던 ‘북미 리그 수준이면, 중국리그 6위팀 수준에서 정리 된다’ 는 우스갯소리를 현실로 만드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떠올린 피터는 드디어 연습을 할 마음이 들었는지, 의욕적으로 말했다.
“아...그래요. 그럼 오늘 연습경기는 누구랑 해요? 아직까진 다른 팀들도 설렁설렁 하고 있을 것 같은데.”
“ITU에게 박살났던 팀 미라클. 걔네, 아주 이를 갈고 있더라. ITU한테 진 뒤로, 엄청 연습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도 열심히 해야 돼. 알았냐?”
잠시 뒤.
정명은 여느 때와 같이, 팀원들을 혹독하게 밀어붙이며 연습에 임했다.
“야. 뭐 하냐. 역시 너희들, 너무 놀았어. 반응 빨리 빨리 안 해?”
정명이 악담을 퍼붓듯이 오더를 내렸지만, 불평하는 팀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너무 놀았다고 반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명은 팀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자꾸만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아휴 저걸 저렇게...아오, 또? 거기서 그렇게 스킬을 쓰면 어떡해? 스킬 연계가 전혀 안 되잖아!’
무언가 팀워크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정명은, 게임을 하는 도중에도 스탯 창을 불러 자신에게 걸린 버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팀의 결속 : D랭크]
[사령관의 오오라 : 팀의 결속이 D랭크에서 C+랭크로 증가합니다.]
‘효과가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참...뭐랄까. 아쉽네 아쉬워.’
팀 버프는 확실히 적용되고 있었다. 휴식이 조금 길었다고는 하나, 팀의 실력이 확 떨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달라진 것은 오히려 정명이었다. 정명은 [가혹한 지휘] 스킬을 사용하던 때. 팀의 호흡이 착착 맞아떨어지던 그 감각을 잊지 못하고 자꾸 비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의 움직임이 자꾸 답답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사실, OMA의 팀워크 등급이 C+등급이라고 해도, 북미 팀 치고는 꽤 괜찮은 팀워크를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기분 상의 문제였다.
의욕적으로 경기에 임한 끝에, OMA는 오랜만의 연습경기에서도 어찌어찌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연습게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포인트 150점을 획득합니다.]
[휴식 패널티 해제. 팀원들의 기량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조시는 한 판 하고서는 뭐가 그리 심각한지 경기 결과 화면을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정명에게 고개를 돌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명, 네 말이 맞다. 우리들, 실력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토베노랑 멋지게 한타 붙었을 때의 감각이 전혀 나오질 않아. 스스로가 한심해질 지경이다.”
조시의 말에 다른 팀원들까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도 스킬을 썼을 때의 그 감각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은 새어나오려던 웃음을 참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는 니들이 잠깐 뽕 맞은 거야. 그때의 그 감각 찾으려면, 1년은 연습해야 할 거다.’
하지만 정명은 그런 속마음을 굳이 겉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정명은 의욕에 찬 팀원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연습을 이어나갔다.
.......
그날 밤.
정명을 비롯한 OMA 팀원들은 ITU의 경기영상을 분석하고 있었다.
정명의 의자 뒤. 코치는 뭐가 그리 바쁜지 메모장에 무언가를 정신없이 쓰고 있었고, 정명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형적인 중국 팀들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군요. 운영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교전, 교전, 교전...무척이나 공격적입니다.”
“그래. 그 만큼 피지컬이 중요해. 소규모 국지전에서는 보통 빠른 놈이 이기니까...”
정명은 ITU와 미라클의 리플레이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5위팀인 미라클이 진 이유가 있었네. 운 없게 진 것이 아니야. 이번 경기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중국은 과연 인구가 많기 때문인지, 재능 있는 선수들도 그만큼 많은 것 같았다. 리플레이 화면으로 보는 ITU 선수들은 하나같이 피지컬이 좋았다. OMA에선 정명을 제외하면 피지컬로는 승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생각까지 다다른 정명은, 코치와 의견 교환을 계속했다.
“이거, 라인전 단계를 오래 가져가면 안 되겠어요. 이번 ITU전은 철거 메타로 해 보죠.”
“철거 메타?”
“초반부터 빠르게 타워를 정리해서, 라인전 단계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서요. 캐릭터도 라인전 특화 캐릭터가 아니라, 방어형. 혹은 한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들 위주로.”
정명은 코치와 상의하여, 대 ITU 전에서 사용할 전략과 캐릭터를 정했다.
전략을 정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연습뿐이다.
OMA 팀원들은 상당히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이 묵묵히 연습을 이어나갔다.
......
그리고 며칠 뒤. ITU와의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각.
잠깐 밖에 나갔다 온 정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습실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지금쯤이면 다들 쉬고 있을 시간인데.’
그런 의문을 품은채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못 보던 사람들이 OMA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ITU가 하는 경기, 보셨죠? 어떠셨나요?”
“무척 잘 하시던데요. 좋은 실력을 갖고 있는 팀입니다.”
“음...북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그럼 가장 신경 쓰이는 선수는 누구인가요? 샤오샤오? 설원?”
“예? 어...한 명을 집어서 말 하기는 좀 그러네요. ITU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죄송합니다.”
“한 명만 집어서 말 할 수는 없다. 모두가 잘 하기 때문이다...”
정명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 피터 옆에 가서 물었다.
“피터, 저건 또 뭔데?”
“중국에서 온 기자래. 근데 아까부터 제 말만 하고, 갈 생각을 안 해.”
연습실에 한 사람이 더 들어오자, 여기자는 눈을 빛내며 정명에게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오, 혹시 OMA 선수신가요? 잠깐 시간 좀 내 주세요. 우리 기자에요.”
하지만 정명은 여기자의 말을 무시하고, 피터에게 말했다.
“피터. 저 사람들이 언제 왔다고 했지?”
“어...지금이 3시니까... 그러니까 1시간 전에.”
“뭐야. 1시간 동안이나 여기서 시간을 뺏기고 있었다고?”
정명은 짜증이 치솟았다.
가뜩이나 빡빡한 일정.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팀원들은 웬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시간과 체력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명은 쌍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을 압축하여, 짧게 말했다.
“나가요. 당장.”
“하지만...”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요. 아니면, 끌어낼까요?”
경찰이라는 소리는 알아들었는지, 여기자와 두 남자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갔다.
기자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정명은 연습실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조시에게 물었다.
“쟤네, 뭐야?”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온 기자들이라는데...나도 잘은 몰라.”
“야이...약속도 없이 온 사람을 들여보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적당히 보냈어야지. 저 헛소리를 계속 들어주고 있으면 어떡해?”
“하지만 저 사람들, 기자잖아. 우리한테 안 좋은 이야기라도 쓴다면...”
“알 게 뭐야.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라며. 걔네들이 우리를 씹던 맛보던 무슨 상관이야? 다음부터는 쥐어 패서라도 쫒아 내. 알았어?”
“응...”
한바탕 난리를 친 정명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후...하긴, 얘네들이 겉모습으로는 30대 아저씨이긴 해도, 실제 나이로는 애들이지 애들. 어렸을 때부터 연습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사회 경험이 없어.’
정명은 그냥 이 일을 묻어두기로 하였고,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습이 계속되었다.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그것이 팀원들의 컨디션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연습 게임 성적도 꽤 좋았다.
하지만 그 다음날. 그 나이어린 팀원들이 본다면, 썩 좋지 않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을 보던 정명은 황당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뭐? 이 개소리는 또 뭐야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