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쁘니까 비켜 (2)
정명을 포함한 다른 프로게이머들은 보통 1:1채팅이 걸려오면 대부분 무시하고는 한다.
당연한 일이다.
수많은 팬들의 얘기를 하나하나 모두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고, 또 질문의 대부분이 요즘은 어떤 캐릭터가 좋냐, 등급을 빨리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뭐냐 등과 같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정명은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달풍선 2만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VIP 회원은 관리를 해 주는 것이 맞겠지?’
정명이 마틸다라는 시청자와의 채팅을 수락하자마자, 마틸다에게서 바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님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네. 게임공략에서부터 인생 상담까지,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정명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틸다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꼬치꼬치 질문을 해 왔다.
프로게이머가 된 계기가 뭐냐, 한국에서는 어떻게 활동 했냐, 한국을 떠나 북미로 온 이유는 뭐냐...
솔직히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지금 막 달풍선 2만개를 받았는데 입 싹 닫고 그만 물어보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정명은 끝까지 친절하게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실력이 별로였거든요. 대우도 별로 안 좋고...그런데 정말 이런 게 궁금하세요?”
-넹! ㅎㅎ; 그나저나 이런 인재를 못 알아보다니. 그 감독이라는 사람도 참 월급도둑이네요. 쓸모가 없어요. 쓰레기처럼.
정명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마틸다라는 애청자가 테니스 스타, 에바 벨라라고 생각해 왔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을 조금 바꿔야할 것 같았다.
언론 매체에 나왔던 그녀의 모습은 판타지에서 나오던 여기사의 느낌이었다.
말 수가 적고, 냉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내뱉는.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마틸다라는 사람은, 여기사라기보단 수다쟁이 여대생 A에 가까웠다.
말투가 가볍고,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은근히 친한 척을 한다. 에바 벨라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녀의 정체가 어찌되었든,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 정명은 적당히 대화를 끝마치기로 했다.
“제 과거 이야기가 왜 궁금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서서랑 화해했다고 기사 떴었잖아요. 그런데 방금 경기를 보면 전혀 아닌데요? 진짜 악감정 다 풀린 것 맞아요?
“아 그거요...그 건에 대해서는 서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봐서,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네요. 죄송합니다.”
-뭐예요! 인생 상담은 되고, 그건 안 돼요? 저 어디 가서 비밀얘기 떠벌리고 다닐 사람 아니거든요?
“어...네. 물론 저도 마틸다님이 참인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제가 위에서 한 소리 들을 게 뻔해서...”
정명이 난색을 표하자, 마틸다는 더는 이러쿵저러쿵 채팅을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마틸다 본인의 셀카였다.
정명은 마틸다라는 애청자가 보내온 사진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와, 몸 좀 봐. 진짜...와.’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 그리고 많은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들. 근육이 과하지 않고 딱 보기 좋게 몸을 관리한 듯 했다.
그녀는 입고 있는 티셔츠 끝을 입에 물어, 복근을 선명히 드러낸 채 날카로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한 눈에 봐도 인기 테니스 선수. 에바 벨라였다.
-저 누군지 알죠? 그러니까 빨리 말 해줘요. 서서라는 사람, 소문대로 인성 쓰레기에요?
그녀는 계속해서 독촉을 했지만, 정명은 끝까지 입을 닫았다.
진흙탕에서 투닥거린 일이 뭐 자랑거리도 아니고, 신나서 떠벌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명이 계속 입을 열지 않자 벨라는 다르게 생각을 했는지, 묻지도 않은 일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본인만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영화배우 앤드류 있잖아요. 유부남. 그 사람이 저 엄청 꼬실려고 들이댔었는데. 그냥 차버렸지만요. 저 진짜 벨라 맞다니까요?
“아...그래요. 그게 진짜라면, 정말 본인만 알 수 있는 사실이네요. 검증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무튼, 얘기 안 해드릴 거예요. 별 일도 아니었어요 그건.”
-아, 진짜. 궁금한데. 그러면 이렇게 해요. 내일......
......
다음날.
정명은 한가로이 테니스 경기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벨라가 자신이 내일 경기가 있다며 입장권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초대를 받았으니 가긴 하는데, 정명은 테니스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정명이 테니스에 대해 아는 것은 기껏해야 인기 만화 ‘테니스의 신’을 읽은 게 전부였다.
테니스에 관심이 없는 정명은 잘 몰랐지만, 이번 경기는 정상급 선수 둘의 대결이었다.
입장권 구하기도 엄청나게 힘들고,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는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런 경기.
물론, 정명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었기에 경기장 안의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팬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야, 토토 누구한테 걸었어? 벨라?”
“난 제시. 제시가 요즘 물올랐잖아. 무려 13연승이라고. 아무리 벨라라도 쉽지는 않을 걸?”
“하긴, 벨라는 예고도 없이 태업을 하고는 하니까...”
벨라라는 테니스 선수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태한 천재였다.
대부분의 경기에서 그녀는 천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방을 찍어 눌렀다.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밤새 게임을 하다 와서 다크서클이 낀 채로 게임을 치르다 어이없는 졸전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다.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의식이 없다며 그녀를 비난하고는 했지만, 천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괴짜들이 많다며 그녀를 옹호하는 팬들이 훨씬 많았다.
원래 스포츠 세계에서는 실력이 깡패다. 벨라를 게으르다며 비난하고 싶다면 그녀를 이기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잠시 후. 두 테니스 거물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팽팽할 거라고 생각했던 경기는 의외로 일방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펑!
테니스 라켓에서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튀어나간 공은 상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바닥에 내리 꽂혔다.
‘헉...저게 대체 뭐야?’
그 흉악한 모습에, 정명은 기겁하여 몸을 움츠렸다.
놀란 것은 테니스 초보인 정명뿐만이 아니었다. 관객, 기자, 그리고 그 경기를 보고 있던 다른 테니스 선수까지.
경기장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는 서브를 계속했다.
펑!
“Game Bella!”
경기는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에바 벨라의 완승. 제시는 도저히 벨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포스트 벨라라고 칭해지던 이야기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테니스를 잘 모르는 정명으로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집에 가야하나...생각하고 있는 정명에게 스태프 하나가 다가왔다.
“실례지만, 정명씨 맞으신가요?”
“네. 제가 정명입니다만...”
“잠시 이쪽으로.”
스태프가 안내한 곳은 한 선수 대기실이었다.
그곳에는 막 인터뷰를 마치고 온 벨라가 땀을 닦으며 서 있었다.
“안녕.”
벨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실제로 보는 그녀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봤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었다.
여러 매체에서 접한 것처럼 무척 차갑고, 무서워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벨라는 인터넷에서 친한 척 굴었던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무심하게 말했다.
“하기 귀찮았는데, 일부러 힘 좀 쓴 거예요.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까...”
정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니스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벨라가 이번에 사고 아닌 사고를 쳤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싸웠던 것은 어떻게 된 거에요? 이제는 말 해줄 거예요?”
또 저 소리.
이미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카더라가 돌고 있는 중이었지만, 벨라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집요하게 굴었다.
이렇게 까지 구는데, 정명은 그냥 적당히 말해주기로 했다.
“네. 그런데, 어디 가서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저랑 서서가 서로 개싸움 들어가면, 피해보는 것은 저니까...”
“그럴게요. 믿으세요.”
정명은 서서와 엮였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 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닌데, 뭐가 그리 궁금한지 살짝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정명의 이야기를 들은 벨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와...서서 진짜 쓰레기였네. 트위터에서는 그렇게 가식을 떨더니...아, 그리고 구단주가 보너스로 걸었던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한 거는요? 돈 없으시다면서요.”
OMA의 구단주는 팀이 이긴다면, 보너스를 주기로 공약을 내걸었다.
보너스로 내건 금액은 5만 달러. 다섯 명이서 나누면 한 명이 1만 달러씩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게임에서 이긴 뒤. OMA 선수들은 그 돈을 전부 좋은 곳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아, 예. 가질 수도 있었는데, 이미지 관리하는 게 좋다고 해서. 그냥 그러라고 했어요.”
“아...그렇구나. 그럼 그 1만 달러, 제가 드릴까요?”
“예?”
“싫으시면 말고요.”
그녀는 그제야 만족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
“야, 조시! 너 죽을 병 걸렸냐? 잔말 말고 빨리 나와!”
토베노 전을 승리로 끝내고, OMA에게 부여된 휴가는 3일.
하지만 팀원들은 휴가를 떠난 지 5일째임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북미 특유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복귀가 점점 늦어졌기 때문이다.
정명은 그런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들이 골골대는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휴식으로 인하여 팀원들의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주의 : 제한시간까지 연습게임을 치르지 않으면 팀의 결속이 한 등급 내려갑니다.
남은 시간 : 34시간 57분
정명은 오늘 일어나자마자 어떤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 때문에 아침부터 팀원들을 허겁지겁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정명은 OMA의 원딜러 피터 대신 전화를 받은, 그의 여자친구라는 사람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네? 옆에서 자고 있다고요? 그럼 깨워요. 뭐요? 안 일어나? 지금 당장 안 오면 뒷일은 책임 못 진다고 전해 줘요. 와, 신난다. 다음 경기에는 다섯 명이 아니라, 나 혼자 나가겠네. 그럼 연봉도 다섯 배겠죠?”
정명은 힘들다고 징징대는 팀원들의 이야기를 전부 무시하고 당장 연습실로 나오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혼자 연습실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북미팀은 이런 게 문제라니까. 한국 팀 같았으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팀원들이 이렇게 흐트러질 수 있는 것은 북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강압적인 것은 거의 없고, 모든 일이 대부분 자율적으로 이뤄지다보니 한번 흐트러지면 그것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기까지 무척 힘이 든다.
물론, 한국 팀 같았으면 당장 감독들이 야구방망이를 들이밀었을 테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정명은 연습실로 터덜터덜 들어오는 팀원들을 보며 그들을 좀 더 빡세게 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연습실로 들어온 피터는 고분고분 의자에 앉으면서도, 불평을 잊지 않았다.
“아 왜. 이번 주 상대는 래디언스잖아. 걔네는 연습 안 해도 이길 수 있을걸?”
피터의 말 대로, 항상 꼴지를 다투고 있는 래디언스는 연습을 조금 쉬어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팀이었다.
“그렇다고, 연습을 5일이나 빠지는 게 말이나 되냐? 벌써 리그 우승했어? 됐고, 이거나 읽어 봐.”
정명은 피터에게 문서 하나를 들이밀었다.
“래디언스의 원딜러가 비자 문제가 해결이 안 되서, 일정을 조금 조절했단다. 자.”
그리고 정명이 건넨 공문을 읽은 피터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원래 이놈들하고 싸우는 것은 한달 뒤였잖아!”
일정이 바뀌고, 이번 주에 OMA가 상대해야 할 팀은 ITU.
북미 팀 공공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