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라이벌
가을에는 리그가 없기 때문에, 정명을 포함한 프로게이머들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기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정명은 그 휴가를 이용하여 잠시 한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이동 수단은 택시, 비행기, 버스. 그리고 다시 택시.
정명은 한국으로 가는 동안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당장 뻗고 싶을 만큼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힘들어...”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컴퓨터와 침대를 번갈아보던 정명은 이내 침대로 기어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
우웅...우웅....
정명이 한창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을 시각.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했다.
전화를 받아보니, 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명아! 한국 왔지? 지금 뭐 하냐?”
“어...저 피곤해서 잠깐 잤어요. 왜요?”
-지금 PC방이 좀 바빠서 그런데, 잠깐 나와라. 그럼...
아버지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정명이 다급히 말했다.
“아니 잠깐만요. 저 거기 어딘지도 몰라요. 제가 미국 간 다음에 개업하셨잖아요.
-아 그렇지 참. 여기가 어디냐면...
PC방은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상권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한적한 곳이라 그런지, 도심에서처럼 PC방이 한 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지는 않았다.
잠깐 걷던 정명은 아버지가 개업했다는 피시방에 도착했다.
“프로게이머 PC방...? 이름이 뭐 이래?”
PC방 안에는 정명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또한 계셨다. 일이 바쁘다더니, 그 탓인 듯 했다.
“우리 아들 왔구나!”
“돈 벌어서 왔습니다. 더 환영해주셔도 되요.”
정명은 부모님과 반갑게 포옹을 하고, 피시방을 슥 둘러봤다. 그런데 PC방의 규모 치고는 사람이 상당히 바글거린다.
“오늘 무슨 날인가? 뭐가 이리 사람이 많아요?”
“당연히 LOH 피시방 대회 때문이지. 앞에 포스터 붙어있던 거 못 봤어?”
PC방 대회는 문화상품권, 캐릭터 인형, 마우스 패드 따위의 자그마한 선물을 걸고 동네 사람들끼리 치르는 리그이다.
정명은 컴맹이었던 아버지가 피시방 대회까지 개최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뭐야. 아빠가 그런 것도 해요?”
“그럼. 요즘 먹고 살려면 다 해야 돼. 인터넷으로 신청했는데, 괜찮지?”
확실히 이런 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PC방에 활기도 불어넣을 수 있고, 나름 재미도 있고.
어차피 대회 진행이야 게임사 측에서 파견된 직원이 거의 다 하니까, 정명은 주문 받은 라면이나 끓이고 있으면 되었다.
참가한 사람들의 티어는 꽤 다양했다.
브론즈, 실버, 골드...티어란 티어는 다 모인 듯 했고, 제일 높은 사람의 티어가 다이아였다. 그야말로 딱 PC방 리그에 어울리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제각각이었다. 귀여운 초등학생부터 정명의 아빠뻘로 보이는 아저씨까지.
PC방 리그는 ‘무언가 성적을 거두겠다‘ 라기 보다는, 그냥 재밌게 노는 행사에 가까웠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듯 했다.
......
그로부터 3시간 뒤.
아직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잡일에 동원됐던 정명은, 잠시 밖에 나가 휴식을 취하고 왔다.
오늘의 대회 일정도 슬슬 끝나갈 시각. 정명은 PC방 한곳이 유독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
‘무슨 일 있나?’
사람들은 한 곳에 잔뜩 몰려들어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정명이 다가가서 보니, 사람들은 대회 외전 격으로 치러지고는 하는 1:1 경기를 구경하는 중 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1:1 이벤트 매치는 아까 전에 끝나서, 상품 증정까지 끝난 상태였으니까.
정명이 그런 의문을 품는 도중, 마침 게임이 끝났다. 큰 실력 차로 인한 일방적인 승리였다.
초고속으로 게임이 끝나자, 주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20연승인가? 대단하네. 방금 그 사람, 마스터 리그 사람이었는데.”
“쟤, 프로 아니야? 캐릭터 아무거나 잡아도 다 이기는데?”
“프로는 당연히 아니지. 저 얼굴을 까먹을 리가 없잖아.”
의자에는 한 소녀가 분홍색 풍선껌을 씹으며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었다. 아까 1:1 이벤트매치에서 우승하여 경품까지 타간 그 소녀였다.
아무래도 저 소녀는 1:1 매치에서 우승한 뒤로도 계속해서 도전자를 받았고. 그 도전자들을 모두 쓰러트린 듯 했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렸네. 이래서야 좀 곤란한데.’
당사자는 별 생각 없을지 몰라도, 대회 주최자 아들인 정명으로써는 무척 곤란했다.
대회는 뒷전이고 이곳에 관심이 모두 쏠린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일 테니까.
물론 강제로 해산시킬 생각은 없다. 그 대신, 정명은 그 소녀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할게. 미리 말해두는데, 제일 자신 있는 거 잡아. 난 프로거든.”
...
15분 뒤.
정명은 1:1 치고는 약간 긴 게임 끝에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비록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이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다.
게임이 정명의 승리로 끝나자, 맥이 탁 풀린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한다. 정명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정명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자 소녀의 눈이 정명에게로 향한다.
“뭐야, 어디 가! 한 판 더해!”
“안 한다. 너도 이제 그만 나와라.”
대회를 방해하는 소녀와 1:1 대결을 한 정명의 소감은...소녀의 실력이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었다.
‘괜찮네.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대단한데? 바로 1부리그 연습생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아.’
피지컬, 판단력, 센스. 나무랄 게 없다. 무엇보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나이를 고려한다면, 발전 가능성이 차고 넘친다.
‘아마 이 녀석이 프로씬에 나온다면, 구단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할 것 같네.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왔지?’
정명은 아마추어 주제 실력이 프로급으로 뛰어났던 소녀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너. 상당히 잘 하는구나. LOH 많이 연습 했니?”
“응? 그런 걸 왜 해?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그냥 다 이길 수 있던데.”
상당히 건방진 대답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표정을 보니 딱히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듯 얼굴을 찌푸린다.
“그랬는데...오빠가 이겼네. 나는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야, 나는 프로야 프로. 밥 먹고 연습만 하는데, 네가 이긴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생각 아니냐?”
“아 몰라. 오빠는 이제부터 내 라이벌이야. 기다려. 금방 따라잡을 테니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작별인사를 했다.
“그보다 하니라고 불러. 송하니. 그럼 오빠! 잘 있어! 또 올게!”
‘아, 맞아!’
정명은 묘하게 낯익은 소녀가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송하니. 천재 프로게이머이자 배우같은 외모로 상당한 팬덤을 갖고 있었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게이머 중 한명이었다.
@@@
다음 날. 방구석에서 혼자 뒹굴거리고 있던 정명의 핸드폰에 메일이 도착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 해설가 이동호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이동호는 요즘 해설가로써 착실히 인기를 쌓아가고 있었다. 정명의 기억대로라면, 분명 2년 안에 정상급 해설가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좋은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 결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상념을 뒤로하고, 정명은 메일을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부탁할 일이 있다고?”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정명은 바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동호는 신호가 2번 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 정명선수, 정말 오랜만입니다. 리그가 끝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오셨나봐요.
“네. 거기 혼자 있어봐야 할 게 없으니까요. 물론, 한국에 와서도 할 건 없으니 당분간 백수지만요.
처음에 그를 봤을 때, 정명은 프로게이머 연습생이었고, 이동호는 프로게이머를 은퇴하고 해설가를 준비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그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뿌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명뿐만 아니라 이동호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조금 긴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명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참. 부탁하실 일이라는 게 뭐에요?”
-이번에 방송국에서 영국으로 월드 챔피언십 리그 중계를 가야 하는데요, 혹시 통역으로 가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평범한 통역보다 정명 선수가 같이 가주시면 더 재밌는 방송이 되지 않을까 해서...
월드 챔피언십 리그. 그것은 1년마다 각 지역 최강의 팀들이 모여 세계 최고의 팀을 가리는 전 세계 LOH 플레이어의 축제였다.
이번에는 영국에서 그 리그가 열리기 때문에, 영어가 되는 정명에게 섭외 요청을 넣은 것이다.
정명은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방송국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용산으로 출발했다.
...
한 시간 뒤.
이동호와 만난 정명은 방송국 건물로 들어갔다.
가을에 리그가 열리지 않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기에, 건물 안은 사람이 없어 썰렁해 보였다.
PD를 만나러 복도를 걷던 정명은 이상한 간판을 발견했다.
“저기는 뭐에요? 연습실?”
“네. NBC스포츠에서 키우고 있는 선수들이에요. 한번 들어가 보실래요?”
꼭 대기업에서만 스폰서를 대라는 법은 없다.
매년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LOH의 열풍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게임채널 NBC는 자체적으로 게임 구단을 만들어버렸다.
NBC가 만든 신생구단인 NBC스포츠는 다음 시즌부터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서 맹연습중이라고 한다.
정명은 동호와 함께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호를 본 쉬고 있던 NBC스포츠 선수들은 전부 일어나서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동호 해설위원님.”
“
“안녕하세요. 감독님은 안 계시나 보네요?”
“예.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오셨다고 전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냥 구경하려고 온 거라. 편하게 하셔도 되요.”
잠깐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외부인이 들어와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정명과 동호는 연습실에서 금방 나와버렸다.
정명은 연습실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여기서도 이래요? 군기잡고?”
“조금 그런 게 있긴 하네요. 팀 운영은 제가 관여하는 게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감독님 말로는 애들이 어려서 컨트롤이 어렵다고 하세요.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그래서 군기를 바짝 잡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전 잘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연습실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약속장소로 간 정명은 그곳에서 PD를 만나 방송 출연을 확정지었다.
사실, 출연료는 얼마 안 된다.
하지만 최고의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일 게 분명했다.
물론, 비행기 값과 기타 비용을 방송국에서 내준다는 것도 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정명은 영국으로 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