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섬머 시즌
다음 날. 정명은 잠에서 일어나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현대인의 슬픈 습관 중 하나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니, 친구에게서 메일이 와 있는 것이 보였다.
[제목 : 너 인터넷에 떴더라.]
http://novel.munpia.com/61280
누가 영어로 된 기사를 번역해서 언벤에 올렸더라.
축하한다. 앞으로 더 잘 될 거니까 힘내고.
그런데 연락 좀 자주 해 임마. 미국 가서 죽은 줄 알겠어.
......
언벤은 한국의 LOH 최대 팬 커뮤니티 사이트로써, 한국에 있을 때는 정명도 자주 들락날락 하던 사이트였다.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언벤 홈페이지 구석에 자그맣게 있는 번역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SAO에 새로 한국선수가 들어왔다, 좋은 경기력을 펼쳐줬다 등등이었고 마지막에는 정명의 간단한 인터뷰가 적혀 있었다.
조회수도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글이었지만, 정명은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더 올라갈 수 있어.’
정명은 부모님에게 기사를 메일로 전송했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디 참치잡이 배에 팔려가는 것 아닌가 싶어서 무척 걱정하셨었는데, 제대로 된 기사를 보여드리면 걱정이 좀 덜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일을 보내자마자 인터넷 전화가 걸려왔다.
-정명아 잘 지내고 있는 것 맞니? 어디서 사기당한 것은 아니고?
“사기 아니라니까요. 잘 지내요. 사람들도 좋고, 대우도 좋아요. 미국 오길 잘했어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정명과 부모님은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부모님이 건강히 잘 계시는 것 같아 기분 좋은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던 정명은,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폭탄선언에 깜짝 놀랐다.
“네? PC방을 개업하신다고요?”
-네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겠단다. 퇴직금 다 털어 넣었어.
‘아버지가 퇴직하는 건 분명 3년은 더 지나야 벌어질 일이었는데...’
심지어 정명의 아버지가 퇴직하고서 시작한 일은 PC방 사업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퇴직금을 전부 쏟아 넣어 치킨가게를 했었는데, 2년을 못 버티고 쫄딱 망해버렸다.
때문에 아버지가 또 다시 치킨 프랜차이즈를 낸다고 한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미래가 바뀐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좀 황당하네요. 아버지, 컴퓨터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 않아요?”
-일주일 전부터 공부하고 있더라. 이젠 너보다 잘 알걸? 그보다 네 아빠, 네가 유명해지면 사인회라도 열어서 매출 상승시키겠다고 벌써부터 설레발 중이셔. 그러니까 나중에 그런 말 들어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알았어요. 무슨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 주시고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화통화를 끝낸 정명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미래가 바뀌었다...내가 미국으로 왔기 때문인가? 내가 돈 한 푼 못 벌던 과거와는 달리 월급을 받는다고 하니까 안심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신 것일지도 모르고...’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지만, 어째서 미래가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일단 고민을 덮어둔 정명은 방에서 나와 습관처럼 오늘의 일과표를 확인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른 특이한 일정이 있었다.
“스트리밍 방송...?”
2.
스트리밍 방송은 1부리그, 2부리그팀 할 것 없이 꼭 해야만 하는 행사 중 하나이다.
팬들과의 소통이 중요하기도 하고, 선수 입장에서도 짭짤한 부 수익을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특히 돈 많은 팬이 선물하는 후원금은 때때로 선수 월급에 버금갈 때도 있기 때문에, 팬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스트리밍 방송은 꼭 해야만 하는 정기행사였다.
정명이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오니 어쩐지 낯선 여자가 연습실에 와 있었다.
미국에 온 첫 날 이후 본 적 없던, SAO 홍보팀에서 일하는 에젤린이었다.
정명은 컴퓨터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중인 에젤린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에젤린. 오랜만이네요. 근데 아침부터 뭐 하세요?”
“카메라 점검이요. 오늘 트이치TV에서 선수들이 방송해야 하니까요.”
정명은 그제야 계약서에 ‘의무적으로 스트리밍 방송을 해야한다’ 라는 조항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스트리밍 방송...좀 걱정되네요. 제가 말재주가 좋지 않아서...”
“정명씨, 개인방송 해본 적 없으세요?”
해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송을 한다고 해도, 무명 연습생의 방송을 봐 줄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에젤렌은 능숙하게 카메라와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셋팅을 다 했다며 컴퓨터를 팡팡 쳤다.
“걱정 마세요. 별 것 없으니까. 뭐, 가끔 무척 과격한 시청자가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요.”
“그것 참 무지하게 걱정되는데요......”
농담이라며 큭큭 웃던 에젤린은 방송 초보자인 정명을 위해 잠시 방송을 지켜봐 주기로 했다.
정명이 에젤린에게 받았던 아이디로 로그인하자, 에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Kimchi Warrior...?"
“그냥 적당히 생각나는 것으로 바꿔봤어요. 괜찮죠?”
“오, 멋져요. 뭔가 강해 보이는 느낌인데요?”
에젤린은 새로운 아이디에 대해 호평을 하고는 정명에게 방송을 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방송이 on air로 바뀌자, 시청자들이 소수지만 하나 둘 접속하기 시작했다.
방 제목에 SAO의 새 미드라이너라고 소개한 것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정명은 새로 들어온 시청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플로리다님, 탄산드링크님.”
[이 사람 누구? 프로?]
“네. 최근 SAO의 미드라이너로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님 한국인이에요? 메타트론 선수 알아요?]
“네. 한국인입니다. 아, 한국에 있다가 GLG로 이적했던 선수 말이죠?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요.”
정명은 시청자들의 질문에 친절히 답하며 랭크 게임을 눌렀다.
하지만 프로라는 사람의 랭크가 실버밖에 되질 않자, 시청자들은 의문을 표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돼서 고 랭크의 아이디가 없어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올릴 거예요. 목표는 그랜드마스터 티어고요.”
정명이 그런 말을 함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솔로 랭크 퀘스트]
북미 서버에서 [마스터 티어]를 달성하십시오.
보상 : 800 포인트
갑자기 뜬 퀘스트에 살짝 놀랐지만, 지금은 방송중이였다.
정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아, 거 프로 맞다니까요. 마스터 티어까지는 금방 올려요. 지금 보여드릴게요.”
‘방송 처음 한다더니...’
에젤린은 익살스럽게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정명을 보며 살짝 놀랐다.
보통은 저렇지 않다.
방송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너무 의식하거나 게임에만 집중하여 재미가 없는 방송을 하기 마련인데, 정명은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랭크 게임이 시작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팀원 중에서 정명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김치 워리어? 혹시 한국인?
-저 사람 새로 SAO에 들어온 프로임. 지금 방송중. 미드 주면 무조건 이김.
-와. 잘 됐다. 나 5연패 중이었는데.
예상보다 격렬한 환대에 정명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무슨 캐릭터를 골라야 할까 고민하는데, 에젤린이 난입했다.
“저는 얘가 좋아요. 이 녀석을 하는 게 어때요?”
에젤린이 손으로 가리킨 캐릭터는 레전드 오브 히어로즈에서 3대 충(蟲) 캐릭터로 불리는 테미였다.
아무리 잘 키워놔도 한타페이즈로 넘어가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똥 캐릭터이지만, 강아지 같은 외모가 귀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영웅이기도 했다.
사실상 승리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다. 하지만 정명은 에젤린의 리퀘스트를 받아주기로 했다.
“그럼 이 녀석으로 해볼까요.”
“앗 정말요? 헤헤. 잘 됐다.”
테미를 탁, 고르자 귀여운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테미 대위, 출격합니다!]
-테미? 오, 이런 맙소사.
-방송 한다고 했던가? 들어가서 달풍선 쏠게. 다른 캐릭터 골라줘.
-나는 6연패 하기 싫다고! 제발 폭시걸이나 환영술사 같은 캐릭터를 잡아. 부탁이야.
“이 캐릭터로도 이길 수 있는데 참 못 믿으시네. 금방 캐리 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첫 방송은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실력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다보니 이상한 캐릭터를 해도 게임에서 지질 않았다.
오늘의 성적은 10승 0패. 덕분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달풍선도 꽤 많이 받았다.
[달풍선 40개]
[현재 정산금 : 28$]
‘치킨 사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벌었군.’
혹시나 해서 팬 수를 확인해보니, 팬 수도 조금 증가해 있었다.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으로.
정명은 이 20명이라는 숫자가 금방 500명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한 밤중.
정명은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가던 중 연습실에 아직도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살짝 가서 보니, 새비였다.
새비는 혼자 맥주를 마시며 솔로랭크를 돌리고 있었다.
“새비, 아직까지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어. 열심히 해야지. 우리에게는 이게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르는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 섬머시즌이 끝나면, 프로생활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야.”
조금 뜬금없는 말.
정명은 ‘술주정 부리지 말고 잠이나 자라’ 라고 하는 대신 조용히 새비의 말을 기다렸다.
“널 보고 드디어 깨달았다. 나에게는 재능이 없어. 인정하기 싫지만, 2년 내내 2부리그 생활을 면치 못 한다면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됐지.”
새비는 맥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마치 술의 힘을 빌어 겨우 말한다는 듯이.
“내가 확신하는데, 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을 거다. 네 실력은 진짜야. 하지만 우리는? 같은 팀이지만, 우린 네 발목을 붙잡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이렇게 연습을 해도 말야.”
정명은 조용히 그의 곁으로 가 맥주를 따랐다.
술에 취한 새비는 정명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
“도전...도전 좋지. 젊으니까. 그런데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꿈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참 비참한 거야. 넌 아직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아니...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 실력, 빈곤한 연습생 생활, 보답 받지 못하는 노력.
정명은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더 있어. 초는 손목이 안 좋고, 나는 나이가 많아. 앞으로 프로게이머 생활을 쭉 이어나가기엔 힘든 거지. 그러니까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거야.”
“맥스랑 사뮤엘은요?”
“걔넨 더 한다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네. 아 참.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것, 어디 가서 말 하지 말고.“
“저 그렇게 입 싸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럴 것 같아서 이야기 한 거야. 그럼 내일 보자.”
맥주 한 캔을 비운 정명은 침대로 돌아와 새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쩐지 씁쓸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기도 했다.
‘나 때문에...또 미래가 바뀐 건가?’
새비의 말을 들어보면 원래는 프로게이머 생활을 더 해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 일취월장하는 정명의 실력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는 것이다.
'미래라는건 참 사소한 일로도 확확 바뀌는군. 이래도 괜찮은 거...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