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로게이머 연습생 (2)
플레이할 캐릭터를 정하는 픽밴이 시작됐지만 별 다른 말은 오고가지 않았다.
팀의 리더이자 탑 라이너인 김종호는 무척 권위적인 사람이었기에 일방적으로 픽밴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정명이가 렘머잡아서 탑을 키워주고, 승혁이가 고철로봇잡아서 변수 만들면 될 것 같다. 픽 해.”
과거로 돌아와서일까? 정명은 생소한 픽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 옛날 스타일이군. 뭐 그건 상관없는데 왜 팀 게임이 아니라 솔랭에서 하는 것 마냥 캐릭터를 정하는 거야?’
다섯 명이 모여 한 팀으로써 하는 것과 집에서 모르는 사람들 끼리 게임을 돌리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같은 게임이지만 접근 방식에서부터 전략까지 완전히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팀으로써 연습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동네 피시방에서 게임 좀 하는 사람 다섯 명이서 즐겁게 게임하고 헤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팀 색깔은 게임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NPG_영진 님이 적에게 당했습니다]
“아오 짜증나. 죄송합니다 형님들. 오늘따라 잘 안 풀리네요.”
“야. 그냥 타워 끼고 사려 임마. 너 벌서 세 번째야.”
“알겠습니다. 아 씨. 저게 살아가네. 운 좋은 새끼.”
딱 봐도 상대방의 계산된 플레이였지만 영진은 한 끗 차이였다며 툴툴댔다.
정명이 과거에도 느낀 것이었지만 NPG의 미드라이너 김영진은 참 못했다. 혹시 연습생으로 들어온 것은 인맥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니. 잘 하는 게 있긴 있었다. 그는 남 탓을 통해 한 명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이른바 ‘정치’를 잘했다.
영진은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회색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정글은 뭐하지? 갱킹 성공률 높은 렘머 뽑아놓고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추냐.”
‘벌써 시작인가. 여러 의미로 대단하군. 한심한 놈.’
1:1 상황에서 혼자 죽어놓고 정글 탓이라니. 정명은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했다.
“지금 제가 가봐야 1+1로 죽을 것 같은데요. 저렇게 컸으니 세 명은 가야 잡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솔직히 네가 정글에서 혼자 놀고 있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아니냐?”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리더인 김종호가 둘을 점잖게 타일렀다.
“거기까지 하고 경기에 집중해라. 솔직히 정명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영진이 너 앞으로 좀 사려. 더 이상 죽으면 게임 진짜 힘들다.”
종호의 질타에 영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종호는 이 자그마한 팀의 실세였으니까.
“그리고 정명아. 탑좀 와 봐라. 이거 지금 오면 무조건 딴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탑의 상황도 썩 다르진 않았다.
솔로킬을 내 주지 않았을 뿐이지 cs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탑을 보니 라인은 밀려있는 상황. 상대방은 라인전에서 이겼기 때문인지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명은 그 틈을 찔러보기로 했다.
위이이이이잉
정명은 데구르르 굴러가 바니걸에게 부딪히고는, 도발을 걸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킬 연계.
정명과 종호는 모든 스킬을 전부 쏟아 부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됐다! 잘 했어 정명아!”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정명이었지만, 오히려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고 느꼈다.
사실 이 팀에서 가장 열심히 연습하던 것은 정명이었기에 정명의 움직임이 가장 좋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으니까.
1킬을 낸 뒤 종호는 그동안 못 먹은 미니언을 전부 먹겠다는 듯 바니걸이 없는 동안 라인을 쭉쭉 밀었고, 정명은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꼈다.
“종호 형. 이제 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리신이 안 보인지 오래 됐어요.”
“어 그래. 미니언 한 웨이브만 더 먹고.”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었다.
종호가 미니언 웨이브를 정리하려는 순간, 부시에서 음파가 튀어나왔다.
-이크!
“어? 어?”
[적에게 당했습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방 정글러에 의해 죽은 종호는 영진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 이 새끼 게임 줫 같이 하네 진짜.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이거랑 그거랑 같냐. 어휴 병신. 빼라니까.’
종호는 영진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무리하다 죽은 종호는 팀 보이스를 쓸데없이 욕으로 가득 채웠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유일하게 라인전을 팽팽하게 유지하고있던 봇 듀오가 종호를 달랬다.
“괜찮아. 다들 멘탈 잡고 후반 가자. 후반가면 우리가 이긴다.”
하지만 그런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이는 점점 벌어져 킬 스코어는 5대 15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 솔로킬을 네 번 당한 영진은, 염치도 없이 노골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승진이형! 고철로봇 잡았으면 좀 당겨봐요. 하는 게 없네 하는 게.”
“내가 일부러 안 당겼냐? 각이 안 나오니까 그런 거 아니야 임마. 그리고 너 형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그 말다툼 이후 계속 헛방질을 날리던 승진은 드디어 그랩에 성공하여 무언가를 끌고 오긴 끌고 왔다. 안타깝게도 끌고 온 게 카우킹이었지만 말이다.
쿵쾅!
NPG의 딜러진이 모두 허공에 떴다.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 상대방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허무하게 죽은 종호는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말했다.
“아 씨발. 그냥 서렌 치자. 짜증나서 못 해먹겠다.”
정명도 이 말에는 정말 동감이었다. 더 이상 게임을 한다면 수명이 5일쯤 줄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20분 항복. 게임이 초반부터 터져나가지 않는 이상에야 잘 하지 않는 가장 빠른 항복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게임이 끝나고, 이동된 대기실.
연습상대였던 파이어폭스팀은 정명의 팀을 한껏 조롱했다.
-??? 왜 벌써 항복이죠?
-아 거 열심히 좀 합시다. 대충대충 하는 게 너무 티 나네. 진심으로 한 거면 할 말 없고 ㅋ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을 봤나. 한판 더 해! 이번에는 발라줄테니까.”
흥분한 영진이 한 게임 더 하자는 채팅을 보냈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됐어요. 연습도 안 되고, 시간 낭비네.
-상대가 NPG라길래 긴장했더니 2군도 아니고 연습생들...이 정도면 사기죄로 고소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NPG 1군을 데려오면 해 줄 수도 있는데 ㅋ 파이어폭스는 상대방을 비하함으로써, 자신들의 승리를 고취시키는 것을 즐기는 팀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진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파이어폭스의 팬들은 저런 팀의 태도가 재미를 위한 쇼맨십일 뿐이라고 옹호했지만, 정명이 보기엔 아무리 봐도 저건 인성이 덜 된 것이었다.
화가 난 NPG 팀원과 파이어폭스팀의 키보드 배틀을 보던 정명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파이어폭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성이 참 쓰레기군. 쇼맨십이 아니라 저 인성은 진짜야.’
파이어폭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며 전부 나가버리자 NPG 숙소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버렸다.
게임에서 지고, 욕까지 먹은 상황.
팀원이 전부 서로에게 짜증이 난 상태에서, 영진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용 먹지 말자니까 그걸 왜 쳐요? 나 참. 어이가 없네.”
“네가 미드 키워주지만 않았으면 이 꼴은 안 났어 병신아. 환영술사 잡고 카드맨한테 솔로 킬 따인다는 게 말이냐 방구냐?”
“그거야 당연히 다른 라인 먹고 와서 컸으니까 그렇죠. 돈 차이, 레벨 차이 나면 상성이고 뭐고 없어요.”
“지랄. 퍼블 내준 게 누군지 기억 안 나냐? 리플레이 돌려줄까?”
....
싸움은 잠깐 자리를 비웠던 2군 담당 코치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팀 NPG의 코치이자 전 프로게이머인 김상태는 연습생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벌컥 화를 냈다.
“너희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얏! 당장 그만두지 못 해!”
김상태는 말로만 끝내지 않고, 서로 삿대짓하며 싸우고 있던 팀원들의 뒤통수를 세게 쳤다. 가만히 있던 정명도 맞았다.
소란스럽던 연습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리그 시작이 일주일 밖에 안남았어 일주일! 너네 프로게이머 되고 싶긴 한 거냐? 이래서 연습생 딱지 뗄 수는 있겠어?”
김상태의 훈계는 30분이나 계속되었고, 팀원들은 반성하는 척 고개를 떨궜다. 실은 김상태가 또 때릴까봐 반성하는 척을 했던 것뿐이지만.
정명 또한 이 나이 먹고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으니 기분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코치의 성화로 인해 연습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코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 게임을 하긴 했지만 팀의 분위기가 바닥까지 내려앉은 상황에서 연습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쉬지 않고 5시간동안 달린 연습게임의 결과는 0승 6패. 마지막에는 2부리그 팀은커녕 아마추어 팀에게도 패배했다.
김상태도 이제는 윽박지르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오늘은 일단 쉬라고 전달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빡세게 연습하자. 이번 리그에서는 꼭 좋은 성적 내야 돼. 너희들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 많다? 무슨 말인지 알지?”
프로게이머 연습생의 생활은 가혹하다.
월급을 받기는커녕 교통비, 식비도 각자의 돈으로 해결한다.
오직 컴퓨터와 열정만이 있는 열악한 환경.
그럼에도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았다. 자신에게는 재능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정명은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자신의 자그마한 자취방으로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