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프로게이머 유정명. 우연히 1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 정명은 다시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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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정명은 혼자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보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레전드 오브 히어로.
화면에는 열 명의 영웅 캐릭터들이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화려하게 날뛰고 있었다.
“궁 갈겨! 궁, 궁! 아이고. 미드 뭐 하냐.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 하겠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아저씨의 흔한 술주정이었겠지만, 아예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과거에 그는 프로게이머 지망생이었으니까.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잘 되었다면 지금처럼 자그마한 방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지는 않을 테니.
프로게이머 생활은 꽤 오래 갔다.
4년 정도. 2부리그 팀을 전전하며 가끔 방송에 얼굴을 내비친 세월이었다.
성과는 없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최선을 다해 도전했으니까. 물론 결과에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빅팜 선수, 조금 더 집중해야 합니다. CS를 너무 놓치고 있어요.
-김나르 선수의 타워 다이브! 솔로킬, 빅팜 선수가 무너집니다! 여기서 미드라인마저 무너지면 경기가 답이 없어지는데요.
그가 응원하던 팀은 앞선 경기에서 2번이나 진 상황.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건만,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오늘 내내 실수하던 선수가 솔로킬을 따이며 승부가 완전히 기울어 버렸다. 10분 만에 10킬 차이까지 벌어진 것이다.
“어휴, 저것들은 또 강등전 치루겠네. 그래, 그냥 챌린저스 리그 가서 다시 시작해라. 그게 낫겠다.”
정명이 응원하는 팀은 인기도, 실력도 없는 팀이다.
그러나 가까스로 2부 리그에서 올라와 1부 리그에서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팬이 되었다.
그 모습은 프로게이머 시절 2부리그에서 악전고투를 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던 그 때와 무척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거 정말 지겠는데. 여기서 지면 승강전인데...”
정명은 응원하던 팀이 실수를 연발하자 답답한 마음에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응원했지만 결과는 그가 응원하던 팀의 패배.
경기가 종료되고 TV를 끄자 집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도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바람이나 좀 쐴까.’
오늘따라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좌절된 프로게이머의 생활이 떠올랐다.
‘프로게이머라. 요즘도 돈 엄청 번다지? 부럽구만 정말.’
정명이 프로게이머 시절 받았던 돈은 30만원 남짓. 그나마 성적을 못 내 스폰서가 없어진 뒤로는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감독이 우리들의 월급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계약서를 쓸 필요 없다고 우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시발...’
기분 나쁜 일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했다. 아무래도 맥주 한 캔 더 따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냉장고를 뒤졌지만, 맥주는 아까 마신 게 마지막인 듯 했다.
‘사러 갈까.’
집 앞의 편의점으로 가는 길.
매일같이 다녔기에 익숙한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낯선 존재가 있다.
정명과 같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엄청나게 눈에 띄는 미인이 있었던 것이다.
염색을 했는지 타는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모델 같은 몸매는 연예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와. 진짜 예쁘네. 서양인인가? 피부 진짜 하얗다.’
여느 남자가 그렇듯이, 정명은 곁눈질로 여자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런데 그 여자는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신호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봐요! 지금 빨간불이에요!”
하지만 여자는 정명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차선을 슬쩍 보니 멀리서 차가 빠른 속도로 오고 있는 상황. 정명은 빨리 달려가 여자를 끌어내기로 했다.
“미쳤냐?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이리로...”
여자가 고개를 돌려 정명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정명은 미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아름다움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멍하니 있는 동안 차는 계속 달려오고 있었지만.
빠아아아아앙!
그리고. 그것이 정명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으윽...‘
정명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정명은 어쩐지 몸이 엄청나게 피곤한 것 같았기에, 곧장 일어날 수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쓰러지듯 잠들기 직전. 옆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는가?”
정명은 스르르 감기던 눈을 번쩍 떴다.
여기는 어디냐고, 나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제 할 말만 계속했다.
“감히 이 몸을 구하려 했다니, 1000년은 이르다. 인간 주제에.”
말하고 있는 사람은 정명이 횡단보도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 여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정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어.”
정명은 자신이 땅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치어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있는 트럭이 보였다.
‘나는....죽는 건가?’
죽음을 인지했지만 정명의 기분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 이미 뇌가 활동을 정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대신 트럭에 치였음에도 119조차 불러주지 않는 야속한 여자는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자토스.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 중 하나. 원래는 죽었으므로 영혼이 흩어졌겠지만 내가 붙잡았다. 너는 앞으로 내 곁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아자토스는 입술을 핥았다.
사소한 행위에도 색기가 지독하게 퍼졌다. 정명은 다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런 본능은 남아 있는 것이 우스워졌다.
“너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다. 나를 위해 일 한다는 것은 영혼의 격이 높아진다는 말과도 같으니까.”
정명은 눈을 감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여자의 말이 자장가처럼 들리는 것이, 아마 얼마 못 버티고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기나긴 잠을.
의식은 점점 몽롱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여자의 말은 여전히 뚜렷하게 들렸다.
“그래도 다짜고짜 일 하라고 하면 억울하겠지.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겠다. 네가 가장 원했던 것 말이다.”
‘내가...가장 원했던 것?’
정명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이 가진 미련을 떠올렸다.
오늘 돈을 아끼려고 치킨을 다음 주에 사먹기로 정한 것부터 이 나이 먹도록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은 일, 그리고 부모님을 자주 안 찾아뵌 것 까지.
하지만 그 수많은 미련 가운데서도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대신, 나중에는 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약속해줄 수 있겠느냐?”
정명이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정명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