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섬서행(17)
= 따라잡는데, 얼마나 걸려?
열심히 내달리는 남궁화청의 등판에 딱 달라붙어 손가락을 까닥인다.
- 우리의 추적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2시간 내 가시권에 들어옵니다.
흑천맹의 초극 고수 수십에게 차광 필터를 생성할 나노 머신을 주입한 왜놈이다. 천문위인 육진성에게는 최소한 짝퉁 매들과 통신 가능한 나노 머신을 주입했을 터다.
거기에 수거한 SS-11은 95% 정도다. 5%의 SS-11이면 짝퉁 매 이삼십은 만들 수 있다.
육진성이 우리의 추적을 모를 리 없다 봐야 한다.
= 육진성 주위에 짝퉁 매들로 의심되는 개체들은?
- 표적 반경 5km에 생체 드론으로 의심되는 매들 일곱 마리가 보입니다만, 응5가 추적을 병행하며 사냥할 위치가 아닙니다.
육진성의 추적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 정의맹 세력권에 배정된 사냥 매 열쯤 불러서 의심 개체들 사냥해.
- 제일 가까운 개체들을 불러도 5시간 이상 걸립니다만?
= 시행해.
- 예, 리퍼. 사냥 매들을 재배치합니다.
태호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고수들, 마교로 짐작되는 그들과 합류하기 전에 육진성을 제거해야 했다.
뭐, 육진성을 열심히 쫓아가는 것은 남궁화청과 마원의 몫. 피풍의를 다루는 것은 농꾼의 몫이니 나는 시간이 남는다는 말이다.
= 방수로 몸 고정.
내 말에 등판의 방수가 움직여 나와 남궁화청의 몸을 하나로 묶는다. 이에 전신의 힘을 빼고 공력을 억제해 호신강기를 자연스레 해제한다.
= SS-11의 기억 데이터 검색해서 태호에 나타난 그자들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봐.
- 예, 리퍼.
마교로 짐작되는 그것들과 성혈문의 정확한 관계를 알아내야 했다.
상 노개의 짐작대로 성혈문과 마교 놈들이 적대 관계라면 별문제 없지만, 마교의 고위층 중 성혈문에 포섭되어 온전한 나노 머신을 가진 자가 있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된다.
- 리퍼, 성혈문의 상황은 호광에서 했던 리퍼와 남궁화청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 같습니다.
뭔 소리야? 호광에서 나와 남궁화청이 했던 예상들이라니?
남궁화청의 예상은 왜놈이 우리를 이용해 성혈문 잔당들을 정리하고 성혈의 비결을 독식해서 튀는 것이었고, 내 예상은 뒈진 성혈문주 말고 다른 놈이 있다는 거였잖아?
= 남궁화청과 나는 서로 반대되는 소리를 했던 것으로 아는데?
어이없어 하는 내 눈앞으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왜로 도망갈 셈이냐?”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풍단주는 바로 머리맡에 둔 왜도를 잡으며 침상에서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침상에서 굴러 내려온 마풍단주가 왜도를 뽑으며 몸을 일으켰다.
“웬 놈이냐?”
마풍단주가 왜도를 겨누며 외쳤다. 하지만 방 중앙 다탁에 앉은 인영은 찻잔에 차를 따라 여유롭게 마신다.
“네가 속했던 곳의 주인.”
“말도 안 되는 소리! 성혈문주는 죽었다.”
마풍단주가 목청을 돋웠다.
“아까운 녀석이었지.”
상대의 말에 마풍단주는 바닥을 박찼다. 상대가 여유 부리고 있을 때 한칼 먹이려는 수작.
하지만 몸은 다탁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데 왜도를 든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칼을 휘두르면 바로 죽는다는 직감.
타닥!
마풍단주는 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바로 뒤로 물러섰다.
“몸이 움직이지 않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당연한 일이야. 자네의 몸속에 흐르는 성혈이 주인을 알아보는 거지.”
개뿔이다. 저거 딱 봐도 증강현실 아니면 가상현실로 농락하는 거다.
마풍단주는 왜놈이라지만 강기를 사용하는 초극 고수에 나노 머신 소유자다. 밤이라도 낮처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방안은 여전히 어둡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상대의 얼굴을 윤곽마저 구분 못 하고 있으니, 나노 머신이 재현해내는 증강현실 아니면 자빠져 자는 녀석의 뇌를 만져 보여주는 가상현실이다.
망할 새끼들, 바퀴벌레도 아닐 진데, 죽여도 죽여도 이렇게 계속 기어 나오다니.
“원하는 것이 뭐요?”
마풍단주가 이를 물며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원하는 것이 없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 없잖소.”
상대의 말에 마풍단주가 뻔한 소리는 그만하라는 듯 대꾸했다.
“벽력응주!”
“벽력응주를 상대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하오.”
인영의 말에 마풍단주가 바로 답했다.
“그 능력, 내가 주지.”
말과 동시에 마풍단주의 머리가 울리며 시야가 흐릿해진다.
“여기에 영단을… 바로 먹고… 몸의 인도를….”
그리고 인영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영상이 끝났다.
- 영상의 인물이 전한 것은 천문위에 오른 소수마공 사용자의 데이터였습니다.
저 작자가 넘긴 영약과 천문위의 데이터로 상 노개를 압도할 힘을 얻었다는 거다.
소수마공은 마교의 무공, 저놈이 데이터의 주인이라면 최소 천문위에 오른 놈이다.
아니 태호 인근에서 진우탁을 덮친 놈이 썼던 것은 소수마공이 아니다. 그 말은 태호의 천문위는 왜놈에게 소수마공을 전한 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
젠장, 그렇다면 영상의 저 작자는 다른 천문위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마교 고위직이라는 소리 아닌가!
단일 문파 최강이라는 마교의 고위직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씨발! 욕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초극 고수였던 왜놈이 상 노개를 이길 정도의 공력을 갖게 만든 영약과 천문위의 데이터를 턱턱 넘길 정도의 인물이 왜 직접 나를 노리지 않는 거지?
마교도 신분으로 나를 죽였다가 정파 무림 전체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어서?
일단 놈의 정체를 확인해 봐야 했다.
= 왜놈에게, SS-11에게 천문위의 전투 감각 데이터 넘겼으면 저 녀석 정체 알 수 있는 거 아냐? 데이터 작성 개체를 알 수 있으니 말이야.
무공 데이터에는 다 꼬리표가 붙기 마련.
SS-11의 수확 데이터만 확보한 상태면 데이터 작성 개체가 모조리 SS-11로 수정되어 알 수 없지만, 농꾼은 SS-11 자체를 확보한 상태. SS-11이 받은 원본 데이터를 볼 수 있으니 그 꼬리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몇 분 뒤, 농꾼의 보고가 귀를 울렸다.
- 관련 데이터가 없습니다.
= 무슨 소리야?
- 현재 수거한 SS-11에 해당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SS-11이 받은 원본 데이터 중 해당 정보를 저장한 조각이 다른 5%에….
왜놈이 만든 매들 아니면 통신을 위해 나노 머신을 주입 받은 육진성에게 있다는 소리다.
짝퉁 매는 불러들인 사냥 매들에게 맡기고, 나는 육진성부터 잡아야지!
한 시간쯤 내달리니 육진성과 우리의 거리는 삼십 리 정도로 줄어들었다.
- 리퍼, 전파가 잡혔습니다.
짝퉁 매로 의심되던 일곱 마리 중 하나다.
그와 동시에 육진성이 황하로 뛰어들었다. 우리와 거리가 계속 줄어들자 짝퉁 매가 통신을 시도해 그 사실을 알린 것이다.
강으로 도망간 성혈문 놈들을 몇 번이나 놓친 나다. 거기에 뻔히 강이 있는 줄 아는데 대책이 없을 리 없다.
절강에서 출발한 진우탁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마원이 인근 물길로 나가 거하게 싸질러 놓았던 것이다.
마원이 푸짐하게 싸질러 놓은 것들이 물길을 타고 위수로 흘러들고, 거기에 감염된 물고기들이 위수를 타고 황하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
바로 물속에 들어온 육진성을 추적한다.
육진성은 반대편 강변으로 몸을 움직였다. 육가장이 태호 인근에 자리 잡은 탓인지 나름 수공에 익숙한 몸놀림.
물길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반대편에 도착한 육진성은 물속에서 땅을 팠다. 우리가 위수에서 그랬듯 강변을 파고들려는 모양이다.
뭐 우리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물속에서 땅을 파고 있을 때 우리는 거리를 더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저렇게 땅속에 들어앉아 중계를 세우지 않으면 짝퉁 매와 통신할 방법이 사라진다. 우리의 움직임을 알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삼십 리를 내달려 육진성이 몸을 던진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땅속에 들어앉은 이후다.
“강을 넘지요.”
내 말에 남궁화청이 물길로 몸을 던졌다. 등에 업힌 내가 피풍의를 펼치고 있으니 물 위를 달리는 것은 여반장.
마원도 개방의 두 사람을 태운 채 땅 위를 달리듯 물 위를 달렸다.
= 놈의 위치는?
강변에 오르기 무섭게 농꾼에게 묻는다. 다섯 장쯤 떨어진 곳의 지면이 붉게 빛난다. 지면 위에 붉은 원이 그려지고 두 가닥 적선이 나란히 강변까지 그어진다.
원이 육진성이 숨어 있는 위치이고, 두 가닥 선은 그가 판 통로다.
= 지표에서 공간까지 거리.
- 702cm입니다.
경산 때보다 좀 더 두껍다.
“여기, 이십삼 척 하고 두 치 아래에 숨어 있습니다.”
내가 육진성이 숨어 있는 자리를 가리키자 남궁화청과 조유덕이 각자 무기를 잡았다.
= 구멍 뚫으면 안에 금속 분말 밀어 넣어 바로 폭발시켜.
- 예, 리퍼.
내가 칼을 뽑아 들고 나란히 선 붉은 선에 다가서자 마원이 슬그머니 다가와 방수 하나를 치켜들어 준비한다.
파학!
땅에 칼을 꽂고 도기를 뿜는다. 그리고 칼을 치우기 무섭게 마원의 방수가 땅에 뚫린 구멍에 꽂혔다.
방수가 뭔가를 토해내듯 꿀렁인다. 그리고 전격을 튀기니.
쿠쿠쿵!
굉음과 함께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두 자 정도 아래로 푹 꺼진다.
그리고 몇 초 뒤.
콰콰쾅!
붉은 원이 그려진 땅이 터져 나가며 전신을 강기로 두른 인영 하나가 튀어 오른다. 볼 것도 없이 육진성이다.
“타합.”
“헛!”
조유덕과 남궁화청이 기다렸다는 듯 덮쳐들고 천문위들의 격전이 시작된다.
둘이 그렇게 육진성을 몰아붙일 때, 나는 슬그머니 천도공을 일으키고 유심조를 시전했다.
“이 비겁한 놈들!”
내 기세의 변화를 눈치 챈 육진성이 조유덕과 남궁화청의 협공 속에서 악을 쓴다.
육진정이 어떻게 당하는지 본 육진성이다. 그러니 사촌 형제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줘야지.
육진정을 끝장낸 수직의 궤적을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현실로 꺼내 육진성을 향해 휘두른다.
파핫!
육진성의 이마 정중앙에서 턱까지 한 가닥 혈선이 달리며 그의 몸이 땅 위로 허물어졌다.
유심조의 궤적이 그의 머리를 가른 것이다.
바로 육진성의 시체로 다가가 나노 머신을 회수한다.
- SS-11 회수율 97%입니다.
육진성이 SS-11의 2%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해당 데이터 찾아.
- 예, 리퍼.
그리고 몇 분 뒤.
- 리퍼, 데이터 작성 개체가 오리지널로 확인되었습니다.
오리지널이라고 불릴 만한 개체는 하나밖에 없다.
= 전대 리퍼 말하는 거야?
원래 수확 임무를 수행했어야 할 전문가의 기억을 가진 개체. 자동 수확에 문제가 생기면 원래 나서야 했을 작자다.
- 예, 리퍼.
자동 수확에 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연락 두절된 작자.
그 작자가 사라졌기에 스페어였던 내가, 그냥 건강한 몸으로 환생했다 착각한 채 지방 흑도방파의 후계자 이도연으로 살아갔어야 할 내가 리퍼로 움직여야 했다.
아니 기어 나오려면 좀 일찍 기어 나오던가! 기껏 내가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죽도록 굴려서 편안한 수확 환경을 조성했더니, 성혈문이니 뭐니 만들어서 방해질이나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