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섬서행(14)
“화산과 공동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이 어떤가?”
조유덕이 내게 말하기 무섭게 상 노개가 입을 열었다.
“수천 리 떨어진 절강의 지원까지 방해한 놈들이 코앞의 화산과 공동을 놔뒀겠나. 필시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을 것이 뻔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 전력으로 사람을 구하고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 아닙니까?”
“화산과 공동의 도움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필요하지요.”
섬서 흑도의 패자인 흑천맹과 다투는 일이다. 거기에 기련신마와 육가장도 관련되어 있다.
까닥 잘못하면 큰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 얻는 것도 없는데 위험부담은 큰일이니 화산과 공동이라도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다.
“그거라면 성혈문 놈들의 위험성을 공개한다거나….”
“지금 화산이나 공동에 성혈문 놈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명단을 공개해야 하는데, 놈들도 매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성혈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해당 문파에 소속된 수확 대상자들을 공개할 수밖에 없다.
놈들도 생체 드론을 사용하니 중간에 그 명단을 입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네 말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화산이나 공동으로 찾아가게 만들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
“예, 우리가 화산이나 공동의 도움을 얻는다면 그들은 호장우와 양연곤을 흑천맹에게 떠넘기고 화산이나 공동을 통해 알아낸 성혈 보유자들을 습격하러 가도 무방하니까요.”
흑천맹의 목적은 미면나찰의 복수다. 흉수가 나란 것을 알게 됐고, 나를 불러들일 수 있는 미끼인 호장우와 양연곤을 넘겨받았다. 놈들이 훌쩍 떠난다 해도 흑천맹에서는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끼리 승산은 있겠나? 저쪽은 천문위만 셋일세. 초극 고수들은 수십이고 말이야?”
흑천맹이 끼어들면서 안 그래도 어려운 싸움이 더욱더 어려워졌다.
“어쨌든 그들의 최종 목적은 저일 겁니다.”
흑천맹은 미면나찰의 복수를 위해, 성혈문은 제 놈들을 추적할 수 있는 나를 제거하고 수확 대상자들의 명단 확보를 위해서라도 나를 잡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 부분을 노려야지요.”
***
해가 지기 무섭게 움직인다.
일단 놈들이 부리는 생체 드론의 추적을 피하고자 놈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흉내 낸다.
일단 서안의 북부를 관통하는 위수까지 달려가 일행 모두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짝퉁 매의 관측을 피하고자 잠수한 상태로 위수를 거슬러 간다.
물속에서의 호흡은 나노 머신을 통해 해결했다.
뭐, 당연히 일행들에게는 수중 호흡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결이라는 사기를 치고 나노 머신을 가동한 것이다.
- 리퍼, 여기입니다.
농꾼이 찍어 주는 물속 위치에서 각자 무기를 꺼내 든다. 그리고 농꾼이 인도하는 대로 빠르고 정확하게 무기를 휘두른다.
수중에서 강변을 향해 그렇게 무기를 휘둘러 굴을 팠다.
어지간한 경지를 뛰어넘은 무인 넷의 노동력에 농꾼의 정확한 계산 능력이 더해지니, 한 시진도 안 되어 수십 장 길이의 수중 굴이 만들어졌다.
수평으로 파고들기를 마치고 위를 파낸다. 그렇게 위로 뚫고 올라가 물 밖의 지하 공간을 만든다.
“지금 위치는 서안 부도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일단의 작업을 마치자 위치 확인을 하고 다음 계획을 실행한다.
“일단 호신강기를 억제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모두가 호신강기를 억제하자, 농꾼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한동안 이들 체내 나노 머신의 전파 발신을 내가 켜고 끄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 발신 제한해.
- 예, 리퍼.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나노 머신의 발신을 제한한 상태에서 이들이 호신강기를 억제한다면 짝퉁 매나 여타 생체 드론의 광역 탐지에 위험 인물로 찍힐 이유가 없다. 생체 드론의 광역 탐지는 호신강기의 유무로 초극 고수를 판별하니 말이다.
물론, 얼굴을 바꾸고 체형에 살짝 변화를 주고 옷 정도는 갈아입어야 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다시 땅을 판다. 공력을 억제한다 해도 인간 한계까지 단련된 몸뚱이라 일 장 남짓 두께의 지면을 파고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땅 위로 올라온 일행은 서안 부도를 향해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나는 일행 셋과는 따로 떨어져 홀로 움직인다. 일행 모두 전파 발신 제한이 된 상태라지만 수신은 자유롭다. 호신강기의 방해도 없기에 응 시리즈가 보내 오는 정보는 고화질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중.
호장우와 양연곤은 흑천맹 총타의 심처에 자리 잡은 전각 일 층에 감금된 상태, 왜놈이 그 곁을 지키며 둘의 회복을 저지하고 있다.
흑천맹의 초극 고수들은 둘이 갇힌 전각을 둘러싸듯 매복하고 있고, 육가장의 두 노괴와 기련신마 일당들은 전각의 상층에 모여 있었다.
일행 셋은 개방에서 뚫어 놓은 개구멍을 통해 성벽을 넘어 서안 부도로 스며든 상태.
= 마원은?
- 서안 부도 동쪽 성벽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시작하자.”
서안 부도 성벽을 향해 내달린다.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올라 그 위에서 피풍의를 편다.
성벽 위를 달려 그대로 흑천맹 총타를 향해 몸을 날린다.
쾅, 콰콰쾅, 콰쾅!
분진 폭발의 충격이 연이어 나를 덮치며 내 몸을 수십 장 허공으로 밀어 올린다.
갑작스레 터진 폭음에 성벽 위의 번초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순식간에 하늘 위로 치솟아 바람을 타며 활공하는 내 귓가로 농꾼의 보고가 울린다.
- 전파 탐지, 사냥에 들어갑니다.
나의 노골적인 등장에 놈들의 생체 드론 몇 기가 왜놈과 노괴들에게 경고를 보내며 정체를 드러냈다.
생체 드론의 처리는 응 시리즈에게 맡기고 나는 흑천맹을 향해 활공한다.
호장우와 양연곤이 잡혀 있는 곳은 흑천맹의 심처. 몇 개의 담벼락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죄다 땅 위의 이야기. 허공을 날아간다면 그저 흑천맹 총타의 외부 담벼락에서 수십 장 거리를 둔 장소일 뿐이다.
흑천맹 총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날아가는 위치는 수십 장 상공, 밤하늘과 구분 안 되는 시커먼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상태니 그들이 눈치 채기는 힘들다.
왜놈과 노괴들은 생체 드론의 보고로 눈치를 챘겠지만, 그들은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전각 상공을 지나가는 순간, 방수가 움직인다. 방수가 털어낸 수십 개의 주머니가 전각을 향해 떨어진다.
각기 주머니마다 작디작은 낙하산이 달린 것들이라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순식간에 전각을 지나고 흑천맹 총타의 상공을 빠져나온다.
파라라락.
피풍의가 농꾼의 계산대로 움직이니 내 몸이 허공을 크게 선회해 방향을 튼다.
그래서 날아가는 곳은 주머니가 떨어져 내리는 전각 위.
파박, 팟!
방수가 이번에는 비수를 내던지니 비수들은 빛살이 되어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주머니들을 찢는다.
주머니가 찢기니 그 내용물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파라라락!
피풍의가 허공에서 말려들고 몸이 수직으로 추락한다. 동시에 눈앞으로 펼쳐지는 증강현실. 나는 농꾼의 인도에 따라 양손을 휘둘렀다.
휘릭, 휙!
내 손과 의지를 따라 생성된 기막의 회오리들이 떨어져 내리는 금속 분말을 휘감으며 전각 곳곳을 향해 날아갔다.
콰자작, 파작!
그리고 그 기막의 회오리를 따라 방수가 전격을 쏟아내니.
쾅! 콰쾅! 쾅콰콰쾅!
전각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쿠르르릉!
전각이 무너져 내린다.
“빌어먹을 놈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질을!”
전각 안에서 육가장의 두 노괴가 튀어 나오며 내게 강기를 쏘아냈다.
천문위 둘이 쏟아내는 탄강들. 피하기에는 너무 많다.
파라락!
피풍의를 펼치며 허공에서 중심을 잡고.
우웅!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공력을 전력을 다해 유사 기맥에 불어 넣는다.
오올!
섬광격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다섯 자루 칼날이 그리는 궤적이 공간을 수놓는다.
쾅, 콰콰쾅, 콰쾅!
내가 휘두르는 섬광격이 탄강을 일차로 받아내면 그 뒤를 방수가 휘두르는 섬광격이 두드리고 찔러 넣고 밀어낸다.
탄강 자체는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내 전신을 두드리며 몸을 허공으로 내동댕이친다.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이라 다행이다. 아마 땅이었으면 바닥을 몇 바퀴 굴렀어도 그 여력을 다 해소하지 못했으리라.
- 리퍼, 환강입니다!
허공을 사정없이 구르다가 간신히 자세를 잡는데 농꾼의 경고와 함께 빛의 구슬이 나를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알아서 피해!”
그렇게 외치며 유심조를 펼친다. 뭉개지는 오감에 육감이 벼려지며 나를 향해 몸을 날리는 두 개의 인영이 느껴진다.
육가장의 두 노괴다. 기련신마는 저 멀리서 땅을 굳게 딛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나를 노리는 힘의 결정이 움직인다. 내 몸을 뒤쫓는 환강의 주인이 기련신마란 말이다.
피풍의가 이리저리 변형되고 그 변형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 그러다가 아예 접혀 버리니 땅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환강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니.
두 발을 뻗어 지면을 밟는 동시에 그걸 쳐내는 궤적을 마음속에 그린다.
하지만 천문위의 데이터가 불러낸 직감이 외친다.
힘으로 막기에는 무리. 부딪치면 죽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려지는 하나의 궤적. 환강을 막아내는 것도, 비껴내는 것도 아닌 희한한 궤적이지만 지금은 다른 걸 떠올릴 여력이 없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칼을 휘두른다. 그저 환강 근처를 한 번 핥듯이 훑고 밖으로 뿌려지는 칼날.
순간, 힘의 결정이 강기의 폭풍으로 변해 유심조의 궤적을 타고 퍼져 나갔다.
졸지에 강기의 폭풍을 맞이하게 된 육가장의 두 노괴가 기겁을 하며 칼을 움직였다.
콰콰콰콰쾅!
강기의 폭풍이 몰아쳤지만 천문위가 그리는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다.
“천문위도 아닌 놈이 환강을 해체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육가장의 두 노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얼마나 놀랐는지 대여섯 장 밖의 나를 덮칠 생각도 못 하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일단 살았다. 방수가 움직여 내 몸을 던진다. 그렇게 두 노괴와의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 개구단을 꺼내 삼킨다.
우웅!
비어 버린 단전을 개구단의 힘으로 채우며 묻는다.
= 왜놈은?
- 전각의 붕괴를 피해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시야 한쪽으로 호장우와 양연곤의 위치가 표시되는데, 무너진 전각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 머리는?
- 둘 다, 뇌 상태는 양호합니다.
이 상태로 시간을 끌면 알아서 회복하고 도망갈 수 있다는 말이다.
“벼락과 어둠을 밝히는 칼?”
“놈이다!”
“맹주의 원수를 갚자!”
“잡아 죽여!”
한 발 늦게 내 등장을 눈치 챈 흑천맹의 초극 고수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장 주위에서 달려드는 놈들이 스물이 넘는다.
허공에서 터진 섬광격에 눈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놈들 하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눈에 나노 머신이 만들어낸 차광 필터가 번뜩인다.
망할, 왜놈 새끼! SS-11을 온전히 회수하려면 흑천맹 초극 고수들을 다 죽여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