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섬서행(13)
= 상대는 누구야?
- 데이터에 없는 상대입니다.
= 영상 돌려 봐.
영상을 앞으로 돌려 봐도 상대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다. 체격을 알 수 없는 풍성한 옷차림에 얼굴을 가린 작자다.
길옆에 한가로이 앉아 있다가 진우탁과 화인천이 달려오자 길을 막고 바로 진우탁과 격돌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무공은 어디 계열이야?
- 전신이 강기로 뒤덮인 상태라 화1의 기능으로는 정확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
우웅!
천도공을 일으키고 천문위의 전투 감각을 적용한다.
내가 갑자기 기세를 피워 올리자 일행들이 바로 주위를 경계한다.
“매에 걸려드는 것도 없는데?”
남궁화청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인가?”
상 노개는 묻는다.
“지원 오던 진 단주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영상을 모두에게 공유한다.
“하나가 진우탁, 진 단주라면 한쪽은 누군가?”
천문위의 격돌 영상에 남궁화청의 눈이 커졌다.
“알 수 없습니다.”
젠장!
천문위의 시선으로 상대를 살펴도 무공의 대략적인 형태를 짐작할 뿐이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무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제 안목으로는 상대의 무공도 제대로 모르겠군요. 개방의 두 분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개방의 안목에 기댈 수밖에 없다.
“모르겠군.”
조유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조유덕이 알 만하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 상 노개만 믿는다.
“마교의 수법 같은데?”
아니, 여기서 마교가 왜 튀어 나와!
“설마, 성혈문 놈들이 마교와 손을 잡은 겁니까?”
상 노개의 말에 남궁화청이 기겁했다.
“어째 적극적이지 않은데, 사숙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제 눈에는 저 작자 진 단주를 해치려는 것보다는 그저 잡아 두려는 속셈 같아 보입니다만?”
조 유덕이 화면을 살피며 말했다.
그 말 듣고 보니, 내 눈에도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흠, 성혈문과 연관 짓기에는 조금 무리 아닐까?”
상 노개가 인상을 쓴다.
“놈들이 산동에서 마교를 상대로 꾸몄던 짓을 생각해 보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뭐 내 판단의 근거는 상 노개와 달리 산동의 일은 아니다.
성혈문이 저 작자 개인을 꾀었든, 마교를 끌어들였든 간에 나선 자가 천문위다.
성혈문에서 동원한 것이라면 저기서 진우탁을 잡아 둘 게 아니라 섬서에서 기련신마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백배 낫지 않은가.
“하긴, 저 작자가 기련신마와 함께 움직였으면 자네들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었어도 나와 사숙을 구해내지 못했을 테니.”
조유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어쨌든 진 단주가 저기에 잡혀 있으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남궁화청의 말대로다. 어쨌든 저기서 진우탁을 빼내야 했다.
= 저기 위치 어디야?
- 호주 태호 주위의 향산입니다.
어쨌든 상대는 천문위. 그것도 작정하고 덤벼드는 진우탁을 상대로 시간을 끌려는 실력자다. 어지간한 전력을 보내도 도움이 되기 힘들다는 말이다.
= 황학약에게 연락해.
그러니 천문위를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 그에게 배정된 꿈틀이와 통신 벌레가 소멸해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 왜?
- 수련 중 뿜어내는 강기에 휘말렸습니다.
아나, 되는 일이 없네. 여전히 수련 중이라면 통신 벌레를 새로 배정해도 똑같은 꼴이 될 게 뻔하잖아!
거리상으로 신창양가가 가깝기는 하지만, 구민신창에게 부탁하기는 껄끄럽다. 솔직히 지금 양연곤도 잡혀 있는 상태 아닌가.
“부각주, 남궁세가에 연락 부탁합니다.”
“그러지요.”
남궁화청이 정안각 부각주로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남궁세가와 통신을 연결해 사정을 설명하니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주께서 호천을 길잡이로 출발하신답니다.”
남궁호천은 남궁세가의 수확 대상자 중 하나. 남궁세가 감시망을 책임지고 있는 인원 중 하나다.
= 남궁호천에게 최단 거리 경로 넘겨서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게 해.
- 예, 리퍼.
진우탁이 정체불명의 천문위와 부딪치고 있는 곳은 남궁세가와 육백 리 거리.
남궁호천의 안내를 받은 남궁 가주는 세 시간 만에 그 거리를 내달렸다.
남궁 가주가 향산 인근에 도착했을 때다.
- 리퍼, 신원 불명의 초극 고수 다수를 발견했습니다.
= 뭐?
농꾼의 보고와 동시에 열둘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내 남궁 가주의 앞을 막아섰다.
= 저것들 뭐야? 땅이라도 파고 숨어 있었던 건가?
화면을 분할해 영상을 돌려보니 산등성이의 수풀 사이에서 기어 나왔다.
= 해당 지점에 꿈틀이 떨어뜨려서 수색해.
땅을 파고 들어가 매의 추적을 피하는 것은 성혈문과 왜놈들이 쓰던 수법. 어쨌든 땅속에 근거지를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 예, 리퍼.
열둘의 흑의인들이 잠시 남궁 가주의 앞길을 막자 진우탁과 싸우던 천문위가 냅다 태호를 향해 뛰어들었다.
천문위가 그렇게 물러나자 열둘의 흑의인 역시 태호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 놈들의 근거지로 통하는 통로는 찾았냐?
물로 기어들어가 매의 추적을 피하는 것을 보니 성혈문과 연관 있는 놈들이 분명하다.
- 해당 지점에 지하로 연결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 뭐, 그게 말이 돼? 초극 열둘이 수풀 사이에 그냥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 화1의 기록 검색 결과 열둘이 숨어 있다는 것은 사전에 발견했었습니다.
= 그런데 초극 고수인 줄 몰랐다고?
- 호신강기를 억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응 시리즈의 초극 고수 판별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성혈문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다.
- 마*카*투 감마의 연락입니다.
화인천으로부터 연락이다.
= 연결해.
- 형님, 단주께서 당장 섬서로 가기는 어렵다 하십니다.
“하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천문위 하나와 초극 고수 열둘이다.
막강한 전력을 가진 정체불명의 세력이 코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는데 세력의 수장이자 최고수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남궁세가나 신창양가도 마찬가지다.
- 보타문의 존장을 청해 멸왜단주 대리를 맡길 수 있도록 며칠간 말미를 달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라고 해.”
그렇게 화인천과의 통신을 끊었다.
“아무래도 사숙의 예상과 달리 마교와 성혈문 놈들이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만? 성혈문 놈들이 아니면 저렇게 매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알 리 없지 않습니까?”
“성혈문도 매를 쓴다.”
조유덕의 말에 상 노개가 뚱하니 반응했다.
“사숙은 마교도로 보이는 저들이 성혈문을 상대하기 위해 나온 자들일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까?”
“아마도 성혈문이 유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산동 장보도 사건 자체가 성혈문이 마교를 노리고 부리는 수작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으니, 상 노개의 말도 전혀 가망 없는 소리는 아니다.
저들이 성혈문과 한패든 아니든 확실한 것은 성혈문이 저들을 저기로 불러들였다는 소리.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세상만사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마교는 남궁세가를 장악하려던 흉계를 꾸몄던 전적이 있다.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어쨌든 성혈문 놈들의 수작질에 진우탁이 당장 우리를 지원하러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며칠의 시간을 벌 뿐이다.
마교까지 끌어들여서 얻은 며칠의 시간으로 성혈문 놈들이 뭘 하려는지 궁금하다.
흑천맹의 장정들이 서안 부도의 성벽에 뭔가를 잔뜩 붙여 놓고 떠나자 한 떼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었다.
“도대체 뭔 일이랴?”
“흑천 맹주를 해한 흉수를 찾았고, 그 조력자를 잡았다는군.”
“흉수가 누군데?”
“흉수는 정의맹 정안각주인 벽력응주 이도연이라는군. 잡힌 조력자는 정의맹 정안각의 일원인 호장우와 양연곤이고 말이야.”
“양연곤? 양 씨라고! 설마 신창양가의 혈족?”
“그럴 걸, 정의맹에 신창양가가 속해 있지 않나? 아니 신창양가만이 아니지 남궁세가와 황보세가까지 속해 있지.”
“신창양가와 남궁세가에 황보세가면 정도팔가의 세 곳이 힘을 합해 흑천맹주를 죽였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왜? 신창양가와 남궁세가는 남직례에 있고, 황보세가는 산동에 있는데? 어느 쪽이든 섬서로 오려면 하남이라는 큰 땅덩어리를 지나야 한다고?”
“죽은 흑천맹주가 누군지 모르나?”
“섬서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있나. 미면나찰 아닌가.”
“그래, 미면나찰이네. 미면나찰의 특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 않나?”
“미면나찰이야 채양보음으로 유명한…. 설마, 미면나찰이 저 세가의 혈족들을 잡아먹었다?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미면나찰이 언제 소문내면서 잡아먹던가? 그리고 미면나찰에게 혈족이 당한 세가도 뭐 좋은 일이라고 소문내겠나?”
“그렇긴 하군. 그런데 잡은 사람들로 뭔가 한다는 건가?”
“아, 자네는 머리도 나쁘지 않으면서 글 좀 배우게. 글 좀!”
“글 배우는 머리랑 내 머리는 다르지.”
“에효. 이틀 뒤 공개 처형을 한다는군. 잡힌 둘의 목을 잘라 효수를 할 거래.”
“공개 처형? 흑천맹이 정의맹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건가? 흑천맹은 현재 미면나찰도 죽고 없는 상태 아닌가. 진짜 전쟁이 일어난다면 흑천맹 쪽이 좋을 게 없는데?”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지. 정의맹과 흑천맹 사이의 거리도 거리고, 정의맹은 강남 흑도맹 때문에 섬서까지 와 전쟁을 하기는 무리지. 그리고 지금 천문위가 없다 해도 흑천맹이 어디 보통 세력인가. 초극 고수가 득실거린다고. 전쟁하면 정의맹도 적지 않은 피해를 봐야 해. 아니 그뿐인가? 얻는 것도 없어. 흑천맹의 세력권을 정의맹이 차지하겠다고 나서면 공동과 화산이 가만있겠나?”
“그걸 아니깐 흑천맹도 저리 나오는 거군.”
“그렇지.”
서안 부도 내를 보여주는 화면을 닫는 손이 분노로 부들거린다.
“이 미친 새끼들이!”
공개 처형이라니! 효수라니! 숙주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나노 머신이다.
그냥 모가지 덜렁 잘라 내걸어 놓으면 나노 머신이 움직여 뇌에 직접 산소를 공급할 것이 뻔하다.
머리가 잘렸는데 사람이 살아 있다? 이건 나노 머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성혈의 존재를 무림에 공표하겠다는 거군.”
상 노개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걸 막고 싶으면 이틀 안에 호장우와 양연곤을 구해 가라는 말이고.”
“그냥 엄포를 놓는 게 아닐까요? 성혈을 가진 자는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걸 공개한다면 제 놈들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육가장의 두 노괴나 기련신마만 있다면 부각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성혈문의 잔당인 그놈, 왜놈이 있습니다. 중원을 떠나면 그뿐인 놈입니다. 아니 왜놈의 입장상, 중원이 성혈로 한 번 뒤집혀서 그 정기가 쇠한 뒤 슬그머니 왜놈들을 끌고 돌아올 생각일지도 모르지요.”
“각주는 지금, 놈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자는 말씀이오? 지금 우리 전력으로?”
“그 둘을 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지요. 왜놈과 노괴들을 놓치면 놈들은 또 이런 일을 벌일 겁니다.”
그러니 죄다 죽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