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섬서행(12)
섬서에 모인 우리 전력은 원래 육가장의 두 천문위를 상정해서 구성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육가장 두 노괴에 ‘기련신마’라는 새로운 천문위가 더해진 상태다.
그뿐인가? 정안각 삼인 일조 합공의 축이 되는 각 조의 핵심 인원이 잡혔다. 그 탓에 정안각 인원 넷은 천문위를 상대함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짐으로 전락해 버린 상황.
상 노개의 말대로 지원 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화인천에게 연락해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상 노개의 예측을 구구절절 풀어 줬다.
- 흠, 단주께서 지금 좀 움직이기 곤란하시다 하는데요?
화인천이 진우탁의 말을 전한다. 진우탁 이 양반 내게 뭔가 뜯어내려고 튕기는 거다.
그렇게 나오면 나도 방법이 있다.
“그래, 그럼 남궁세가에 연락해서 육가장을 공격하라고 할까?”
- 예? 남궁세가에 연락해서 육가장을 공격한다고요?
“지원을 못 받으면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야 하잖아. 육가장이 공격을 받으면 두 노괴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돌아갈 것 아냐? 명분도 이쪽에 있지. 육가장의 두 천문위가 정의맹 소속의 둘을 납치했어. 그 중에 멸왜단 소속인 호장우도 있고. 그러니 불가침 조약을 육가장이 깨뜨린 거잖아.”
- 단주께서 직접 지원하러 가신답니다.
“그냥 육가장 공격한다 그래!”
- 당장 달려갈 테니 기다리시랍니다.
지금 육가장이, 강남 흑도맹이 망하면 남궁세가 좋은 일만 시켜 주는 셈이다. 멸왜단이 제대로 이권을 챙기려면 확실한 무림 세력으로 정체성을 확립한 뒤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네가 모셔와.”
- 제가요? 단주 홀로 가실 때 보다 늦어질 텐데요?
화인천과 진우탁이 동행하면 이동 속도는 천문위인 진우탁의 속도가 아니라 초극 고수인 화인천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다.
“길 찾는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게 빠르지 않겠어?”
경공으로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면 시야가 좁아져 주위 지형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매를 쓰는 화인천과 함께 움직이면 길을 잘못들 염려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고 말이야.”
그냥 화인천에게 배정된 매를 임시로 진우탁에게 돌릴까?
아니 그건 이때껏 쌓은 신용을 스스로 걷어차는 짓이다. 매와 관련된 내 말이 죄다 거짓이란 것이 드러날 수 있으니 안 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우탁에게 그냥 개인용 매 한 마리 붙여 주는 건데….
- 알겠습니다. 단주를 모시고 최대한 빨리 가지요.
“내가 놈들에게 잡히면 죄다 네 탓이다.”
그렇게 화인천과 대화하며 손가락을 까닥인다.
= 서안까지 최단거리 경로 뽑아서 화인천에게 넘겨.
- 예, 리퍼.
- 어어? 이건 뭡니까!
농꾼의 대답을 이어 화인천의 기겁성이 귀를 울린다.
“최단거리 경로다.”
절강 영파의 멸왜단 총타에서 섬서 서안까지는 1,500km에 이르는 거리다. 쉬지 않고 달려도 20시간은 걸린다.
- 사천 리가 조금 안 되는군요.
“하루 안에 와라.”
- 예? 하루 열두 시진 만에 사천 리를 달리라고요?
“그래.”
- 하아, 죽어라 달려야겠군요.
“죽어라 달려.”
인천이 놈 진짜 죽어라 달려야 할지도….
그렇게 화인천과의 통신을 끝내자 상 노개가 묻는다.
“어떻게 됐나?”
“진우탁, 진 단주께서 직접 오시기로 했습니다.”
“잘됐군.”
입을 놀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꾸준히 발을 놀려 놈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 리퍼, 새로운 전파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짝퉁 매가 또 나타난 것이다. 전파 발신 제한 상태로 매들을 풀어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쓰는 모양이다.
짝퉁 매는 나타나기 무섭게 급강하한다.
= 저거 왜 저래? 회피 기동이 아닌데?
단순하게 응 시리즈를 피하기 위해서라 보기는 힘들다.
짝퉁 매가 도착한 곳은 육진정의 품이다.
- 통신용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 통신용?
전파 발신 상태가 된 상태에서 하늘을 날고 있으면 응 시리즈에게 사냥 당한다. 그러니 아예 불러 내린 것이다.
= 이제 주위에 비슷한 고도로 날아다니는 매 있으면 전파 발신 상태 따지지 말고 그냥 사냥해 버려.
탐지 반경을 넓히기 위해 날고 있는 생체 드론이 아니라면 900m 상공에서 날아다닐 매는 매우 드물지 않을까.
- 예, 리퍼.
= 아, 그리고 지금 왜놈은 뭐 하고 있어? 서안 부도로 향했다면서?
홀로 떨어진 왜놈, 마풍단주의 행적을 쫓는다.
육가장의 노괴가 짝퉁 매를 활성화해 통신을 시도할 만한 상대는 성혈문 잔당인 왜놈 정도지 않나.
- 서안 부도 서부 환락가에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환락가? 왜놈이 미치지 않은 이상 육가장의 두 노괴를 뛰어다니게 만든 상황에 기녀를 낀 채 술 처먹고 있을 리 없다.
서안 서부 환락가는 흑천맹의 영역이다. 흑천맹을 끌어들일 수작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전혀 상관없는 기련신마도 끌어들인 놈이다.
미면나찰, 흑천맹주와 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면 흑천맹을 끌어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섬광격에 전격, 분진 폭발. 남들이 쓰지 않는 특이한 수법들이다.
흑천맹에서는 미면나찰을 죽인 흉수를 특정하기 위해 이 수법의 현상들을 나열했을 것이 뻔하고, 왜놈이 이걸 들었다면 나를 떠올리지 못할 리 없다.
“성혈문의 왜놈이 지금 흑천맹의 영역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흑천맹을 끌어들일 생각 같습니다.”
“흑천맹을?”
내 말에 조유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흑천맹이라면 아직 맹주가 정해지지 않았을 텐데? 일부를 끌어들여 우리와 충돌시켜 전체를 움직이게 할 계략인가?”
“그냥 흑천맹 전체가 적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흑천맹 전체가 나설 뭔가를 성혈문이 내줬다는 말인가?”
내 말에 상 노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련신마처럼 성혈을 내주기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흑천맹은 수뇌부만 여섯입니다. 미면나찰의 제자 셋과 그들에게 각기 붙어 있는 후원자가 한 명씩. 그들이 일반적인 초극의 수준을 뛰어넘는 고수이기는 한데, 천문위는 아닙니다. 성혈을 그렇게 낭비해 흑천맹을 끌어들일 바에야 차라리 용문수채를 끌어들이는 것이 낫지요. 전대 채주가 천문위에다가 채주가 확고히 권력을 잡고 있으니.”
상 노개의 말에 조유덕이 대꾸했다.
“매로 꼬드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요?”
거기에 남궁화청이 덧붙인다. 쓸데없는 소리가 더 나오기 전에 사실을 밝혔다.
“제가 흑천맹주와 구원이 있었는데 최근에 해결했습니다. 아마, 그 사실을 빌미로 흑천맹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내 말에 셋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면나찰, 그 망할 년을 해치운 게 자네였나?”
“어떻게? 당시 자네 무위로는 천문위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텐데?”
조유덕의 말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남궁화청이 물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을 상세히 밝히면 내가 형산 속가인 백라장을 처리한 것이 들통 날 수도 있기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때운다.
“그러고 보니 수법이 같잖아. 벼락을 부리고, 폭발을 일으키고, 사람 눈을 멀게 하는 광휘의 검까지!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
상 노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내 말에 상 노개가 고개를 끄덕인다. 섬서 흑도의 맹주인 흑천맹이 동원할 수 있는 초극 고수는 수십. 서안 부도에 도착하면 놈들에게 그만한 전력이 추가되는 것이다.
“일단 멸왜단주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세.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흑천맹이 아니라 저 일당들도 버거워.”
상 노개의 말이다.
“놈들이 서안에 들어서면 바로 두 사람의 성혈을 강탈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흑천맹과 합류하기 전에 구출 시도를 해보자는 건가?”
남궁화청의 말을 상 노개가 확인한다.
“예. 기련신마에게 성혈을 건네주기로 했으니, 흑천맹과 합류한다면 흡혈로 성혈 강탈을 시도할 것입니다.”
“흡혈을 시도한다 해도 두 사람 다 피를 좀 빨리겠지만 죽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남궁화청의 말에 반박했다.
“무슨 소린가?”
남궁화청이 물었다.
“정안각 전원은 물론, 제가 만나서 검증한 모든 성혈 소유자들은 흡혈로 성혈 강탈이 불가합니다.”
“어떻게?”
아니 그렇다면 그냥 그런 줄 알지 그걸 또 묻고 있냐?
“성혈을 가진 자의 타액과 닿으면 성혈의 특징을 잃도록 일종의 독을 썼습니다. 참고로 자기 침은 상관없습니다.”
대강 앞뒤 맞춰서 지껄인다.
“성혈을 강탈할 수 없다면 놈들이 두 사람을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궁화청이 다시 물었다. 이번 물음의 대답은 상 노개가 한다.
“벽력응주가 성혈 강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놈들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죽여야 할 상대네. 그런데, 알다시피 벽력응주가 작정하고 도망가면 천문위라도 잡기 어렵지 않은가.”
“벽력응주를 불러들일 인질로 활용할 것이라는 말이군요.”
“필시.”
놈들의 뒤를 쫓던 일행은 서안 부도 성 밖에서 발을 멈췄다.
부도 성안까지 따라 들어갔다가는 도망가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 듯해서다.
성 밖에서 응 시리즈를 통해 놈들의 행동을 살핀다.
놈들은 부도 서부에 자리 잡은 흑천맹 총타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예상대로 흑천맹과 손을 잡은 것이다.
= 흑천맹의 감시망은?
- 아직 건재합니다.
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박살 날 감시망이 아직 멀쩡하다는 것은 뻔하다. 놈들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말이다.
= 안의 상황 공유해.
- 예, 리퍼.
흑천맹 총타의 심처.
호장우와 양연곤이 사지가 부서진 채 침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기련신마가 흥분된 얼굴로 서 있었다.
“어느 놈으로 하시겠습니까?”
왜놈, 마풍단주가 기련신마에게 물었다.
“천문위가 셋이나 된다는 보타산 속가보다는 요사이 망조가 들었다는 신창양가가 부담 없지.”
기련신마의 대답에 왜놈은 널브러진 양연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상의를 어깨까지 벗겨 냈다. 그렇게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입을 가져가더니.
콰작!
세게 깨문다.
쓰읍!
힘껏 피를 빤 왜놈이 입을 떼니 그의 목덜미에서 상처가 희미해진다.
“흐흐.”
그 광경에 기련신마의 입에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퉤!”
왜놈이 갑자기 입에 머금은 피를 뱉어내자 기련신마의 웃음이 멈췄다.
“왜 그러나?”
“이놈의 피는 쓸 수 없습니다.”
기련신마의 물음에 왜놈이 인상을 쓰며 답했다.
“무슨 소린가?”
왜놈은 대답 대신 양연곤을 팽개치고 호장우를 잡아들었다.
콰작!
그리고 목덜미를 세게 물어 피를 빨아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노 머신 핵심 집단과 통신이 차단되는 즉시 나노 머신의 기능이 정지되게 세팅해 놓은 상태니 해킹 불가는 당연하다.
“그 빌어먹을 벽력응주가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게 분명합니다.”
“벽력응주가 부린 수작 때문이라면, 그놈들 모두 이럴 가능성이 큰데! 그럼, 내게 줄 성혈은!”
기련신마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뭐가 잘못되었나?”
육진정이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벽력응주가 수작을 부려 놓은 듯 합니다. 성혈을 강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당장 저 둘을 구하러 달려오지도 않겠군.”
“아마도 그렇지요.”
“그럼, 더 보여줄 필요도 없겠군. 치우세.”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건가?”
“매가 당한 건가?”
셋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그런 모양입니다.”
뭐 당한 거는 응 시리즈가 아니라 서생원이지만 말이다.
- 리퍼, 급보입니다.
= 흑천맹의 감시 체계가 공격받고 있다는 것이지?
그 정도는 예상한 일이다. 저놈들 내게 흡혈 장면을 보여주려고 감시망을 놔둔 것이다.
성혈 강탈을 막기 위해 내가 덮쳐들기를 기대했는데, 성혈 강탈 자체에 실패하니….
- 아닙니다.
대답과 동시에 눈앞으로 화면이 뜬다.
쾅, 콰카캉!
전신을 강기로 휘감은 두 개의 인영이 격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천문위끼리의 싸움이다.
= 이거 뭐야?
- 화1이 보고 있는 광경입니다.
화인천에게 붙여 놓은 매가 보낸 영상이라고?
그 말은 저 중 하나가 진우탁이라는 말이다.
아니 한시바삐 섬서로 와야 하는 사람이 왜 저기서 싸우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