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섬서행(08)
- 철매화와 주취검 둘 다 화산 본산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두 시진쯤 지나자 농꾼이 둘의 근황을 알려 왔다. 통신 벌레가 붙어 있는지라 매를 이용하지 않아도 둘의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 왜놈과 두 노괴는?
- 응 시리즈를 감지한 이후 서안 부도 동쪽의 산중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농꾼의 보고와 함께 눈앞으로 지도가 뜬다.
성혈문 놈들 성향을 봐서는 산중에 지하 근거지를 마련해 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 물길과 가까운데?
지도를 보니 야산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과 연결된 통로를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었다.
-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수중 생체 드론을 생성해 주변 물길 속에도 감시망을 구축했습니다.
응 시리즈가 물길 위를 날면서 물속으로 똥을 떨어뜨리는 영상이 뜬다.
마원이 경산 인근의 저수지에서 썼던 방법으로 수중 생체 드론을 생성했다는 말이다.
- 지금까지 탐색으로는 사람이 드나들 크기의 구멍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미리 뚫어 놓은 통로도 없고, 놈들이 통로를 뚫어도 바로 알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으니 놈들의 종적을 놓칠 걱정은 접었다.
SX-23의 시체를 찾아내 화산 속가들을 움직여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철매화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과거 난 농꾼의 해킹을 돕기 위해 제압된 철매화를 고문하듯 대하지 않았나. 내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철매화와 주취검을 제압할 때 당시의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흑천맹주를 살해한 사실이 드러날 수 있었다.
아니 철매화가 아니더라도 화산이 움직이면 서안의 밤을 지배하고 있는 흑천맹이 무슨 일인가 머리를 들이밀 수 있었다.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흑천맹이 미면나찰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 것이 뻔하다.
= 흑천맹의 상황은 어때?
흑천맹이 생각난 김에 농꾼에게 물었다.
- 미면나찰을 대신할 새로운 맹주를 내세우지 못했습니다만, 세 제자의 협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흉수를 쫓는 일은?
-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섬광격과 분진 폭발 같은 특이한 방법을 쓰는 내가 아직 흑천맹의 정보망에 걸려들지 않은 것은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데다 중원이 드넓은 탓이다.
호광에서 그랬듯 재빨리 일을 처리한 후 개방을 통해 섬서에서 성혈문이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화산에 알리고 수확하는 것이 가장 무난했다.
공동도 마찬가지.
상 노개가 천문위 섭외를 장담했으니 괜히 화산이나 공동 고수들을 끌어들여 흑천맹과 드잡이질 할 일로 키울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계속 말을 달렸다.
섬서로 들어서는 동개관(潼開關)을 지나 화산의 앞마당인 화음(華陰)을 조용히 빠져 나간다. 황하 대신 위수(渭水)를 따라 내달려 위남(渭南), 임동(臨潼)을 지나 서안 부도에 당도했다.
흑천맹의 텃밭인 부도 서부 환락가를 피해 객잔을 잡았다. 여덟이나 되는 머릿수라 객잔의 별채를 통째로 빌려 상 노개가 당도하기를 기다린다.
객잔에 자리 잡은 지 사흘째 밤.
- 리퍼, 급보입니다.
= 왜놈과 두 노괴가 움직인 거냐?
- 마*카*투 델타의 치료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혀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카*투 델타면 상 노개에게 먹인 나노 머신. 현재 상 노개의 호신강기가 해제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리다.
= 도대체 누가? 아니 개방의 천문위인 창걸개 조유덕과 함께 오는 중 아냐?
눈앞으로 영상이 떠오른다.
어두운 동굴 안이다. 동굴 입구는 무너진 상태. 밖에서 연신 금속성과 폭음이 들리고 있다.
상 노개의 동행이 무너진 동굴 너머에서 적들과 싸우는 듯하다.
= 어디야?
눈앞으로 지도가 떠오른다. 상 노개의 지금 위치는 낙남(洛南) 인근.
직선거리로 삼백 리가 안 된다. 절반 이상이 험난한 산길이라도 일행이 모두 초극 이상이니 한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다.
= 응2, 먼저 보내.
상황 파악을 위해 응 시리즈 중 하나를 미리 보내고 바로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상 노개가 낙남에서 습격당해 위급한 상황이다. 당장 구하러 간다.”
일행들에게 그렇게 명을 내리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 상 노개가 있는 곳까지 최단거리 경로를 찾아 모두에게 넘겨. 그리고 마원 따라붙게 하고.
- 예, 리퍼.
일행이 모두 별채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눈앞으로 그려지는 경로를 따라 건물 지붕 위를 달린다.
순식간에 부도의 성벽을 넘어 부도 밖으로 나온다.
“급박한 상황이니 경공이 빠른 부각주와 내가 먼저 가니 나머지는 뒤따라오도록. 부각주, 가지요.”
내 말에 남궁화청이 속력을 높였다. 나도 피풍의를 펼치고 남궁화청을 따라붙는다. 아니 그 등에 냉큼 업힌다.
활짝 펼쳐진 피풍의가 만들어낸 양력이 우리 두 사람의 무게를 확연히 줄여 주니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열심히 내달리는 일행과 거리가 죽죽 벌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상 노개께서는 개방의 창걸개와 동행한 것 아니었나? 개방 십대 고수 중 둘이 함께 있는데, 기습을 받고 위급한 지경이라니?”
남궁화청이 물었다. 연장자이자 무림의 선배로 묻는 거니 제대로 말하라는 거다.
“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알고 싶다.
“최소 천문위 하나가 낀 습격이겠군.”
“먼저 매를 보냈으니 잠시 뒤 상황을 알 수 있겠지요.”
- 리퍼, 상 노개의 호신강기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회복하고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다.
= 상 노개와 연결해.
- 연결되었습니다.
내 눈앞으로 상 노개의 얼굴이 보였다.
“상 노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상 노개와 연락이 된 건가?”
내 물음에 남궁화청이 물었다.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일단 부각주께서는 달리는 일에 집중해 주시지요.”
“…….”
내 말에 남궁화청이 입을 다물었다.
“상 노개 들리십니까?”
- 들리네.
내가 다시 부르자 그제야 상 노개가 답했다.
“도대체 누가 습격한 겁니까?”
- 기련신마와 그 일당들이네. 합공이 가능한 초극 다섯과 함께 들이쳤어.
기련신마? 화산과 공동 두 곳과 척을 지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작자다. 이름 그대로 섬서 서북 기련산 일대를 지배하는 천문위의 대마두.
그런데 그런 작자가 섬서 동남쪽 끄트머리라고도 할 수 있는 낙남에서 튀어 나와 상 노개를 습격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야?
“상 노개, 기련신마와 은원이 있는 겁니까?”
= 마*카*원 델타 데이터 백업해.
입으로 물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 예, 리퍼.
기련신마와의 은원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 노개와 조유덕을 구하기 위해서 기련신마와 부딪쳐야 하는 것은 필수. 그러려면 그의 무공을 미리 봐 두는 것이 유리했다.
- 나도 그 작자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네. 젠장,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니네. 유덕을 도와야 해.
“반 시진 안에 도착합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견뎌 보세요!”
상 노개와의 통신이 끊겼다. 상 노개가 공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탓이다.
= 어떻게 됐어?
- 공방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했습니다. 지금 데이터를 내려 받으시려면 호신강기를 억제해 주십시오.
피풍의를 제어하는 것은 농꾼의 계산과 배터리의 전력이고, 지금 속도를 주관하는 것은 내가 업힌 남궁화청의 두 발. 그러니 내가 공력을 억제하는 것은 우리의 속도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남궁화청을 붙든 사지에 힘을 주면서 호신강기를 해제하니 남궁화청이 입을 연다.
“상 노개와의 대화는 끝났나?”
“예.”
“흉수의 정체가 기련신마라고?”
“합공 가능한 초극 다섯과 함께 덮쳐왔답니다.”
“그 작자들이 왜?”
“저도 모르지요.”
눈앞으로 영상이 뜬다.
시커먼 강기에 휩싸인 인영이 냅다 창걸개를 들이받고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마*카*투 델타의 숙주, 상노개가 기련신마와 창걸개의 싸움을 길게 살필 여유 따윈 없었다.
오십 줄로 보이는 검객 다섯이 바로 상 노개를 덮쳐들었다.
기련신마는 천문위가 확실하고 맨손이라는 것 말고는 건진 게 없다.
대신 다섯 명의 합공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 노개가 그들의 합공에 수십 초 만에 허물어졌다. 저 정도면 정안각의 합공보다 뛰어나다.
“좀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알겠네.”
남궁화청의 대답과 동시에 속도가 더 빨라진다.
- HN-08과 마*카*원 델타가 응2의 관측 거리에 들어왔습니다.
= 시야 공유.
산 중턱에서 강기를 튕기며 싸우는 광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
씨발! 욕부터 나오는 상황이다. 상 노개와 창걸개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기련신마와 합공 가능한 오십 줄의 검객 다섯만이 아니었다.
여섯의 초극 고수가 더 있었다. 합공이 가능한 둘로 이루어진 조가 셋. 그들이 상 노개를 둘러싸고 있었다.
합공을 펼치는 이인 일조가 세 개 조. 그 세 개 조가 연계되어 펼쳐지는 협공이 상 노개를 완전히 묶어 두고 있었다.
상 노개의 쌍장이 그리는 누런 구렁이가 흉포한 용트림을 치지만 여섯이 삼 면에서 세우는 벽을 뚫지 못했다.
창걸개 조유덕은 어떤가? 이쪽은 상 노개보다 더한 상황이다.
기련신마를 상대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데, 다섯 검객의 합공이 번번이 균형을 깨트린다.
그들의 합공에 대응하는 순간 기련신마의 공격이 날아들고 매번 피를 토할 수밖에 없다.
조유덕이 수확 대상자가 아니어서 나노 머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예전에 끝났을 싸움.
어떻게든 속도를 올려 나와 남궁화청이 일찍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
“폭발을 일으킬 겁니다.”
“알겠네.”
내 말을 남궁화청이 바로 알아듣고 대답한다.
양발로 앞으로 꼬꾸라지듯 내달리는 남궁화청의 허리를 감고 양손에 기막의 회오리를 만든다.
휘리릭!
방수가 찢은 주머니에서 금속 분말이 흘러나와 회오리에 휘말리고 회오리가 내 손을 떠나 남궁화청의 앞으로 떨어진다.
남궁화청의 발길이 막 회오리를 지날 찰나.
콰콰쾅!
폭발이 일어나며 피풍의에 막대한 양력을 더 한다.
그렇게 일 각을 넘게 달렸을 때다.
- 리퍼, 급보입니다.
농꾼의 목소리가 또 귀를 때린다.
= 또, 뭐?
- 성혈문의 잔당과 그 일행들이 산을 벗어났습니다.
= 그것들은 응 시리즈 셋이나 붙여놨잖아!
반 이상 왔는데 놈들 때문에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아니 정안각 전력만으로 육가장의 두 노괴를 상대하기 불안해서 조유덕을 부르지 않았나. 그러니 먼저 상 노개와 조유덕을 구해야 한다. 왜놈과 두 노괴는 그 뒤에 때려잡으면 된다.
- 성혈문의 잔당은 서안으로 진입 중, 육가장 두 천문위의 진행 방향은 리퍼를 뒤따르고 있는 정안각 인원들을 향해서입니다.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저것들이 지금 우리 상황을 어떻게 알고?
아니 전파 추적으로 우리가 몰고 다니는 매들이나 통신 벌레의 거리가 떨어진 걸 알 수 있다 해도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이 너무할 지경이다.
“무슨 일이 또 생겼나?”
“따라오는 정안각 인원들을 노리고 육가장의 두 노괴가 따라붙은 듯합니다.”
남궁화청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당했어. 기련신마도 놈들과 한패였어.”
남궁화청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움직일 수 없다.
“각주, 어떻게 할 생각이오?”
남궁화청이 내달리는 발을 멈추지 않고 묻는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되돌아가 정안각 인원과 합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일단 상 노개와 창걸개를 구하지요.”
정안각 인원들을 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 정안각 사람들 인근 지도 띄워.
바로 지도가 뜬다.
젠장, 물길이 있으면 확실한데 근처에 이렇다 할 물길이 없다.
= 두 노괴와 거리 차는?
- 반 각 안에 따라잡힐 거립니다.
평지가 아니라 수풀이 무성해 시야가 제한된 산중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 정안각 인원들 정남으로 유도하고 통신 벌레랑 매는 예정대로 움직여.
정안각 인원들과 놈들이 추적할 수 있는 생체 드론과 분리한다.
놈들이 짝퉁 서생원으로 생체 드론의 전파를 쫓는 거라면….
- 리퍼, 다수의 전파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신호 감지 위치가 지표면과 수백 미터 떨어진 하늘이다.
저 위치에서 전파를 뿌릴 놈은 뻔하다.
짝퉁 매! 그것도 세 마리.
저게 있으면 육가장의 두 노괴로부터 정안각 사람들을 빼돌릴 수 없다.
= 사냥해!